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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씨 Apr 26. 2020

알리오 올리오를 50번 만들어 봤습니다

독립의 다른 말은 매끼니를 스스로 해결하는 게 아닐까?



단순한 건 질리지 않는다. 이탈리아 전역에서 즐겨 먹는 요리,  알리오 올리오를 손수 만들어 보기로 했다. 공지영 작가의 신작 '딸에게 주는 레시피'  읽고 난 후였다.  라면 끓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는 중년의 남성이 아내의  부재 상황에 놓였을 때 느끼는 무력감, 우울감을 언급했는데, 짧았던 내 독립생활이 오버랩됐기 때문이다.





 


독립은 매 끼니를 스스로 해 먹는 것



호주 시드니 Sydney에서  넉 달, 생활한 적이 있다. TESOL(Teaching English to Speakers of Other Language)  과정을 밟을 때였다. 조금 특이하게 호스텔 도미토리 정확히 2층 침대 2개가 놓인 방에서 지냈다. 부연하면 세계 여행자들의 아침 또는 저녁을 간접적으로 볼 수 있는 환경이었다. 거주지와 할 일의 세팅이 완료된 상태에서 독립의 다른 말이 세 끼의 끼니를 스스로 해결하는 일임을 깨달은 건 호스텔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식빵이 질려갈 때쯤이었다. 하지만 요리 '신생아'인 내가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제한적이었다. 시리얼, 과일, 라면, 백화점 타임세일, 다시 식빵의 로테이션이었다. 지금 아쉬운 건 질 좋고 저렴한 소고기가 지천에 널린 호주에서 스테이크나 실컷 해 먹는 건데, '스테이크는 외식'이라는 공식에 사로잡혀 내가 구울 수 있다는 가능성을 떠올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무지한 상태였다. 책에서 람이 자립하는데 필요한 능력으로 요리까지는 아니어도 밥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꼽은   인상적이게 된 건 그 넉 달의 시간  의 영향이었다.








알리오 올리오  도전기





책을 펴놓고, 집에 있는 재료로 알리오 올리오를 만들었다. 그 결과는 엉망진창인 주방과 "누난 이상한 거만 먹어. 난 못 먹겠다."라는 동생의 피드백으로 대신하겠다. 알리오 올리오 레시피를 따랐지만 알리오 올리오라고 할 수 없는 정체불명의 요리였다. 총제적 난국이었던 그날의 요리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우선, 면 삶는 시간을 책에서 알려준 대로 따랐다. 가정마다 화력이 다르고, 또 냄비에 따라 열전도율이 다른 데 융통성이 없었다. 그렇게 면은 덜 익은 상태가 됐다. 두 번째는 재료를 쓰는 데 인색했다. 올리브유는 너무 적게 넣었고, 마늘, 청량고추도 특유의 맛을 내기 부족한 양이었다. 세 번째는 불 조절에 실패했다. 달궈진 프라이팬에 올리브유를 넣고 마늘과 청양고추의 향이 은은하게 우러나게 했어야 하는데, 화력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네 번째, 레시피 책이 아닌 에세이를 맹신했던 점이다. 책엔 면수에 대한 언급이 없었고, 면수는 그대로 버려졌다. 마지막으로 내 입맛, 내 취향에 대한 고려가 없었다.





 



총제적 난국  정면돌파





그 후, 현대백화점 문화센터에서 10주간 쿠킹 클래스를 수강했다.  강사님이 와인 한 스푼을 넣으라는 걸 한 컵을 넣을 뻔하기도 하고, 듬성듬성 썰라는 양파를 채 썰기도 하고, 맨 마지막에 완성된 요리에 뿌려야 하는 깨를 양념장에 넣기고 하고, 뚜껑을 닫아야 하는 순간을 놓치기도 하고..... 초보자가 겪을 수 있는 여러 실수를 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요리 레시피 책을 읽었다. 그리고 틈틈이 알리오 올리오 만들기에 도전했다. 시간이 갈수록 내 알리오 올리오는 꽤 알리오 올리오다워 졌다. 더 나아가 알리오 올리오의 다양한 변주를 시도하게 됐다. 양파, 새우, 삼겹살, 베이컨, 소시지, 파마산 치즈, 파슬리가 더해졌다. 그러다  알리오 올리

오의 고장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왔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내 캐리어에는 페퍼론치노 스파게티 생면,

통후추가 들어 있었다.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유도 사고 싶었지만 수하물 규정 때문에 못 샀다. 암튼 그 이후에도 나는 이탈리아에서 공수한 재료로 알리오 올리오를 요리했다. 지금 내 알리오 올리오는 되게 맛있다.





"위녕, 산다는 것도 그래. 걷는 것과 같아. 그냥 걸으면 돼. 그냥 지금 이 순간을 살면 돼. 그 순간을 가장 충실하게, 그 순간을 가장 의미 있게, 그 순간을 가장 어여쁘고 가장 선하고 재미있고 보람되게 만들면 돼."




지금까지 50번도 넘게 알리오 올리오를 만들었다.

간단한 요리로 소개된 알리오 올리오는 냄비 하나, 라면 한 봉지, 조리 시간 5분 내외의 라면과 비교했을 때, 전혀 간단하지 않다는 생각을 알리오 올리오를 만들 때마다 하지만 그래도 세심하게 식재료 하나하나에 정성을  쏟아 요리를 완성했다는 데에서 오는 성취감은 꽤 자존감을 높여준다.



오늘은 모처럼 알리오 올리오를 만들어봐야겠다. 음, 벌써 침샘이 고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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