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대답을 보류했다. 대답을 할까 말까 고민했다. 왜냐면 불매 운동이잦아들고 있을 때쯤, 오사카를 다녀왔기 때문이다.
일본어 새벽반, 등록
일본어를 배우고 싶었다. 사실 꽤 오래전부터 배우고 싶었는데, 한 나라의 언어를 배우는 일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쉽게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근데, 내 멘탈을 흔드는 일이 연거푸 일어났다. 답이 안 나오는 문제들로 내 머릿속이 어지럽고, 혼란한 시기, 나는 그 시기를 견딜 수 있는 돌파구가 필요했다. 시작만 하고 끝을 못 보는 것도 싫지만 그보다 흘려보내야 하는 것을 흘려보내지 못한 채 시간만 낭비하는 게 더 싫었다고 할까. 그렇게 일본어 새벽반을 등록했다. ‘4개월 과정의 초급 단계를 통과하면 일본 여행을 다녀와야지’ 하고.
새벽반을 다닌다는 건
회사를 다니면서, 새벽반을 다니는 건 꽤 도전적인 일이었다. 우선, 일찍 일어나는 일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겐 시차 적응의 시간이 필요했다. 또 회사 일의 영향도 배제할 수 없다. 중요한 발표를 앞둔 날, 출장 가는 날, 술을 늦게까지 마신 날(이건 친구들이랑 마신 것 같다) 암튼, 그렇게 중간중간 결석과 지각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진급 시험을 통과하며 초급반, 중급반, 회화반까지 올라갔다.
뜻대로 안 되는 인생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동사 보통형을 배울 때쯤 일본 불매 운동이 불 붓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불길은 점점 거세졌다. 예매한 일본 여행을 취소하고, SNS에 인증하는 것이 바람직한 한국인의 모습인양 비쳤고, 인증샷을 올리면 치킨, 피자를 무료로 주는 마케팅도 기승을 부렸다. 더 나아가 유니클로 매장에 들어갔다는 이유 만으로 뒤통수 사진이 온라인에 게재되는 마녀 사냥도 일어났다. 그렇게 내 계획에 변수가 생겼다.
차고 넘치는 이유에도 불구하고
여행을 다녀올 이유는 차고 넘쳤다. 나한테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일본어 공부를 계속 이어갈 동기를 만들기 위해, 가고 싶으니까, 또 900원일 때 환전한 엔화도 좀 있었고, 비행기 값도 저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하나 불매 운동, 그게 문제였다. 그래서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미루고 또 미뤘다.
그러다 지난 11월 오사카 여행을 다녀왔다. 그리고 나의 오사카 여행은 대외적으로 밝힐 수 없는 떳떳하지 못한 여행이 돼 버렸다.
변명 아닌 변명을 하자면, 나는 평소부터 가능하면 일본 제품과 국산 제품이 있을 때 한국 제품을 구매했다. 한국 제품의 성능이 조금 떨어져도, 조금 더 비싸도 그랬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과거에 저지른 만행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그렇게나마 알리고 싶어서였다. 핵심 부품까지 따지면 아예 안 샀다고는 말 못 하지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대안이 있을 때 일본을 최우선으로 제거했다는 것이다. 근 십 년 일본을 여행하지 않은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일본 불매를 외친 개그맨이 닌텐도 인기 게임을 플레이하는 영상을 업로드해서, 이중성 논란에 휩싸였다고 한다. 꾸준히 불매를 했지만 불매 운동이 진행 중일 때 일본 여행을 다녀온 나는 그에게 동정표를 던져 본다. 왜냐면 세상엔 비난할 일이 그것 말고도 많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에서 엄연히 리콜되는 제품이 국내에선 결함이 있는데도 버젓이 팔리고, 언론에선 기사화 조차 안 되는 것에 분개해야 하고, N번방이 이슈가 되고 있는 데도 근절될 수 있는 방향으로 법제도가 재정비되지 못하는 것에 목소리를 내야 하고, 풍요의 시대, 지구촌 어딘가에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생명이 있는 것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단순히 물건을 사고, 안 사고, 여행을 가고, 안 가고 가 아니라 일본 기업이 우리나라에서 양질의 고용을 창출하고, 더 나아가 기부를 하면서 상생의 길을 모색하는 그런 건설적인 방향으로 목소리가 모아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