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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씨 May 30. 2020

돈을 잃어버렸을 때

빨리 떨치고, 덜 불안해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지 않을까

여행이 끝날 때까지 짐을 무사히 지키면 좋겠지만 잃어버리면 잃어버린대로 어떻게든 된다


책 [가자, 어디에도 없었던 방법으로] 중에서





망고밥을 먹다가 불안감이 엄습했다




태국 치앙마이에서 망고밥을 먹다가 '벌떡' 일어났다. 있어야 할 지갑이 있어야할 곳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순간 불안감이 엄습했다. '어쩌지?' 하고. 바로 일어나서 방금 전까지 있었던 장소로 전력 질주했다. 다행히 나의 지갑은 의자 아래 얌전히 자리하고 있었다. 지갑을 그 어느 때보다 소중히 들고, 식당으로 돌아왔다. "요즘 젊은이들은 돈이 전부라고 생각하는데, 나이가 들면 알게 된다. 그것이 사실임을."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의 글귀가 여행 중이라 더 크게 와닿았다. 수중에 돈이 없다는 사실을 인지했을 뿐인데도 막막하고 절박해질 수 있다는 것을 그때 달리면서 생생하게 경험했다.








자꾸 사라지던 허취위




제주도의 게스트하우스에서 중국인 허취위를  만나게 됐다. 하루 먼저 도착한 친구와 다음 날 도착한 내가 만 하루를 같이 보내고, 나 혼자 제주도에 남겨진 참이었다. (특가 항공권의 단점이라고 생각하지만 가격이 진짜 착했다.)  나는 예전에 추천 받은 숙소를 떠올렸고, 그 숙소에서 마지막 날을 보내려고 했다. 그녀는 다른 침대를 쓰는 여행자였고, 그렇게 우린 다음 날을 함께하게 됐다.

      

다음 날, 쇠소깍으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그녀는 사진을 보여줬다. 어제부터 계속 영화 건축학개론 촬영지를 비롯해 자기가 구매한 아이오페, 토니모리와 같은 화장품을 보여주고 있는 그녀였기에 익숙해지고 있던 차였다. 이번에 보여준 건 편의점에서 살 수 있는 것이었다. 농심 새우탕면, 깁밥 한 줄, 삼각 김밥  3가지였다. '한 끼 식사구나'했는데, 아니었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의 식사라고 했다. 그러면서 한국의 편의점 음식이 너무나 맛있다고 했다. 한 끼로 먹을 수도 있는 분량을 그렇게 아쉽게 먹으니, 더 감격적인 맛이 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그 후에도 그녀의 한국 찬양(?)은 이어졌는데, 뭐 이런 식이었다. 걷고 있으면 뒤에서 감탄사가 들렸다. 궁금해서 가보면, 한국의 바닥이 너무 아름답다는 것이었다. 그 말에 바닥에 시선을 뒀는데,  나쁘진 않지만 그렇다고 감탄까지 할 정도는 아니었다. 또 같이 걷다가 너무 행복하다며 노래를 불렀다. 날씨도 좋고, 전날 머문 여행자는 조금 쌀쌀 맞았는데, 나랑 다니는 것도 좋다고 했다. 좋은 기운은 쉽게 전염이 되나보다. I am so happy를 계속 들으니까 나도 덩달아 행복해지는 것 같았다. 또 걷다가 웃음 소리가 나서 태블릿을 들고 있는 그녀를 봤다.  숙소 나오면서 SNS에 나와 함께 찍은 사진을 올렸는데 여기까지 듣고, 나는 기분이 안 좋아졌다. '거울도 잘 안보는 나인데, 나한테 말도 안하고 사진을 올렸다고‘ 하고. 근데 그녀의 다음 말에서 무장해제가 돼 버렸다. 친구가 나를 소개해달라고 했단다. 예쁘다고. 잠시 가졌던 까칠함은 그 한마디에 눈녹듯 사르르르 자취를 감췄다.  그 댓글을 인증샷으로 남겼다.  추억 소장용이랄까. 그렇게 올레 7코스를 걷고 또 걷는데, 드문드문 그녀가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워낙 호기심도 많고, 워낙 감탄할 것이 많은 그녀니까 또 사라졌다 금방 모습을 드러내니까 직접적으로 묻지 않았다. 아니, 그것보다 더 큰 고민이 있었다. 그건  배가 너무 고프다는 것이었다.  아침으로 편의점에서  행사 하는 소시지를 하나씩 나눠 먹은 게 고작인데, 점심 시간도 지났는데 허취위는 밥 먹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카드에 문제가 있다는 얘길 들은 것 같은데, 그것 때문인 것 같다고 어렴풋이 짐작했다.

  그때 전날 같이 여행했던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행 잘 하고 있느냐고. 나는 너무나 배가 고프다고  했다. 동행자가 있는 여행에서 혼자만 밥을 먹는 건 아무래도 모양새가 영 아니지 않느냐고. 그러다 천지연 폭포에서 허취위는 필란드 대학생 뚤리와 친해졌다. 뚤리는 친구랑 제주도로 여행을 왔는데, 친구가 갑자기 몸이 안 좋아져 친구를 숙소에 남겨둔 채, 혼자 여행 중이었다. 그렇게 셋이 돼서 제주도를 둘러 봤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배가 안 고픈 상태 그러니까 무감각한 상태가 돼 버렸다. 그래도 시간은 흘러서,  저녁 시간이었다. 저녁 메뉴를 정하기로 했다. 두루치기 유명한 곳으로 정해졌다. 그때 허취위가 중국인 무리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만원짜리 지폐를 손에 들고,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중국 사람들한테 돈을 이체해주겠다고, 돈을 빌려달라고 했는데 만원만 줬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사라진 건 중국사람들이 보일 때마다 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던 것이었다. 그 전에 우리가 저녁을 사겠다는 말도 했는데, 그녀는 그렇게 하는 게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이었다.  어쨌든 허취위는 그 돈으로 한국의 두루치기를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맛있게 제주도에서의 마지막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여행 중 빈털털이가 된 여행자의 특별한 여행




미얀마를 검색하다 어느 블로거의 글을 보게 되었다. 이미지  없는 긴 글을 안 좋아하는데, 정말이지 빼곡하게 글자가 적힌 글이었다. 근데 읽다보니, 멈출 수가 없었다. 너무 흥미로웠다. 내용인 즉, 지갑을 잃어버리고 호스텔에서 칩거(?) 중인 여행자에게 일어난 일이었다. 돈이 없으니까 외출을 자제하고, 호스텔에 늘 상주하고 있는 아시아 여자, 순식간 그녀에 대한 소문이 퍼졌다고 했다. 그리고 여행자들은 그녀를 '행동'으로 걱정해주기 시작했다.  어떤 여행자는 오전에 다녀온 관광지의 입장권을 그녀에게 건네줬고, 그럼 그녀는 그 티켓을 들고 관광을 나갔다. 또 어떤 여행자는 점심을 사줬고, 또 다른 여행자는 저녁을 사줬다. 그녀는 여행자의 호의로 굶주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게 그녀는 돈을 잃어버리지 않았을 때의 여행보다 더 잊히지 않는 따뜻한 여행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인연은 여행지에서 끝나지 않았다. 한국을 찾은 여행자에게 더 근사한 저녁을 대접하며 훈훈하게 마무리되고 있었다.




꽤 오래 안 들고 다니던 가방을 중고 거래로 팔았는데, 그 돈을 홀라당 잃어버리고 쓰는 글이다.

가방이 사랑해주는 주인을 만나서, 제 쓰임을 다 하길 바라며. 더 이상 내가 잃어버린 돈을 떠올리지 않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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