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첫잔처럼' 보다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나날들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by 안녕씨



반숙 라면이 먹고 싶어 졌다





- 냄비에 면발이 잠길 정도 한 마디로, 약간 부족하게 물을 넣는다

- 물이 끓기 시작하면 면발과 스프를 넣고, 조리 듯이 끓인다

- 물과 면발이 '팔팔' 끊기 시작하면 찬물을 넣어준다

- 찬물로 온도를 낮추는 과정을 서너 면 반복한다

- 예쁜 그릇에 라면을 담아내고, 그 예쁜 그릇에 달걀 하나를 ‘툭’ 투하한다.

- 달걀 노른자의 정가운데를 젓가락으로 '' 터뜨리고 나서 뭉치지 않게 풀어낸다



영화 ‘첫잔처럼’에서 주인공(이호연)이 자취방 침대에 걸터앉아 라면을 끓이는 장면이다. 침이 고였다. 그렇게 라면의 유혹을 떨치지 못하고, 주방으로 향했다. 하필 농심 짜파게티와 팔도 비빔면뿐이었다. 인생이 참 얄궂다, 원하는 건 이렇게 빗나가나, 이런 생각을 하며 차마 빗속을 헤치고 집 밖을 나설 생각은 못하고, 라면 맛있게 끓이는 법을 폭풍 검색하기 시작했다.





곰소궁 횟집 정식





라면 맛있게 끓이는 법을 검색하다가



단연, 백종원이라는 키워드가 독보적이었다. 승자독식 현상이 심화되는 건, 그러니까 1등만 '심하게' 기억되는 건 마음 한편을 불편하게 만든다. 일본처럼 이탈리아처럼 작은 가게도 100년 넘게 생존하고, 더 나아가 사랑받을 수 있는 다양성이라는 가치가 존중받는 생태계가 한국에서도 자리 잡았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근데 백종원 아저씨는 건강한 생태계 면에선 파괴적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사소한 포인트들이 쌓이면서 좋아하게 됐다. 골목시장이라는 TV 프로그램에서는 엉망인 냉장고 상태를 지적하면서, 본인은 스트레스받을 때 냉동실 청소를 한다는 말을 했다. 나는 그 부분이 인상 적였다. 사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제일 먼저 그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 하기 마련인데, 그렇게 누군가는 술잔을, 누군가는 게임을, 누군가는 쇼핑을, 나는 여행을 도피처로 삼는데, 그는 업과 관련된 일로 스트레스를 건강하게 푸는 방법을 갖고 있고, 또 실제로 그렇게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모습이 책임감 있는 어른으로 비쳤기 때문이다. 또 tvN 스트리트 푸드 파이터에선 중국에서 중국어로 요리를 주문하고, 궁금한 것을 거침없이 소통하는 모습이 비쳤다. 후에 인터뷰를 보니까, 식재료, 주문과 관련된 음식에 특화된 중국어를 따로 과외 받았다고 했다. 철저히 본인의 업과 관련된 능력을 키우는 전략적인 사람이구나, 했다. 나는 노력하고, 애쓰는 모습에는 욕을 못하겠다. 마지막으론 군산을 여행할 때였다. 곰소궁 횟집을 찾았다. 가게는 조금 특색있게 운영됐는데, 젓갈 정식을 주문하면 무려 16개의 젓갈이 갓 지은 흰밥과 함께 나왔다. 그리고 5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사장님이 손님 앞에 서서 각각의 젓갈의 명칭과 특징, 에피소드를 재미나게 설명해줬다. 그러다 몇 번째 젓갈이었을까. 사장님께서 백종원 씨를 언급했다. 몇 번과 몇 번 두 가지 젓갈을 섞어 먹고선 백종원 아저씨가 그 맛을 극찬했다고 했다. 그 설명을 듣곤, 나도 두 가지 조합으로 맛을 봤다. 극찬까지는 나오진 않았다. 그 미묘한 우수함을 발견할 만큼의 안목이 겨우 대표 젓갈 이름 정도 기억해 내는 나에겐 무리였던 거다. 근데 백종원 아저씨는 각각의 맛을 기억해내고, 더 나아가 더 나은 조합을 고민하고 있구나, 감탄을 했다. 그렇게 백종원 아저씨의 레시피를 클릭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 냄비에 물을 넣고, 수프를 면 보다 먼저 투하한다 (수프를 먼저 넣으면 끓는점이 높아지면서 면의 찰진 식감이 살아난다고)

- 물이 끓으면 면발을 넣고, 익힌다

- 예쁜 그릇에 면발만 우선, 건져 낸다

- 냄비에 계란을 풀어서 취향에 따라 파를 곁들인다



그렇게 라면을 떠올리다 보니 호주의 게스트하우스까지 추억이 소환됐다. 냄비 대신, 라면 그릇에 면발을 넣고, 수프를 넣고, 뜨거운 물을 붓고, 때에 따라 계란, 치즈, 청경채를 곁들여 가스레인지 아닌 전자렌즈에 3-4분 돌려 먹던 라면들. 그 대단할 것 없는 라면이 집에서 끓여 먹던 것과 다른 마치 분식점에서 사 먹는 라면 같은 정서를 자아내던 것은 어째서일까. 봉지 라면도 그때 처음 경험했다. ‘군대 라면’ 일명, 뽀글이는 봉지를 잘 뜯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라면 상단의 봉합된 부분이 일자로 열린 가운데, (덜 열려도 된다. 하지만 과하게 찢어지면 곤란하다. ) 거기에 수프를 넣고, 뜨거운 물을 붓고, 열이 집중되도록 봉지 입구를 철저히 막으면 이 또한 맛이 끝내준다. 이 두 가지가 내가 호주 하면 떠오르는' 정겨운' 라면들이다.

반면, 딱히 인상적일 것 없는 최근의 내 라면 조리법은 이렇다. 냄비에 물을 적당량 붓고, 가스레인지에 올리고, 수프를 투하하고, 면을 넣고, 가끔 파, 계란, 후추를 곁들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기본에 충실한 라면이다. 그리고 일상의 내 라면은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는 일처럼, 매일 출퇴근을 하는 것처럼 그냥 그런 라면이 되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하루하루들


다시 영화 '첫잔처럼'을 이야기하면, 어느 주말이었다. 살기 위해 조깅을 하던 호연은 회사 동료들을 마주치게 됐다. 동기는 연장자인 호연에게 커피를 쏠 것을 귀엽게 청하고, 그렇게 호연은 커피를 제조하게 됐다. 남산에서. 준비물은 종이컵, 카누 커피, 서울우유, 키세스 초콜릿, 물이었다.(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내 눈썰미로만 의지해 적은 재료들임) 그 무엇 하나 특별할 것 없는 재료들이었다. 호연은 종이컵에 카누 2 봉지를 아낌없이 투하하고, 키세스 초콜릿을 애교처럼 첨가하고, 흰우유 위에 마치 바리스타처럼 뜨거운 물을 원을 그리듯 부었다. 아이스 카페 모카가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냄비 없이 끓였던 호주의 라면이 내게 특별한 추억이 된 것처럼 남산에서 호연이 보여준 퍼포먼스를 보며 커피를 마셨던 등장인물들에겐 그 순간이 특별한 시간으로 기억되지 않았을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인생이 재미없는 게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무색무취의 특징 없는 하루가 된 건 아닐까. 그렇다면 어느 정도는 내 책임이지 않을까. 그리고 그 시작은 라면을 끓이는 것처럼 사소한 일에서부터 시작해보는 건 어떨까. 나 아닌 누군가를, 환경을 탓하는 것보단 그게 어른의 태도에 가깝지 않을까. 그런 의미로 오늘은 호연의 방식으로 라면을 끓여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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