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에 맡겼다, 영화 카모메 식당

만약 내일 세상이 끝난다면 뭘 할까? 답을 찾고 싶다면

by 안녕씨




지도를 펴 놓고, 한 지점을 찍는다. 그리고 숙명처럼 그곳으로 향한다. 책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에 나오는 에피소드다.


책을 읽고 책에 소개된 것들을 직접 '해' 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 책이 아니었더라면 인도를 여행하지 않았을 테니 내가 인도를 여행한 것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도 위의 특정 장소를 찍어 보는 모험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했다. 현실적인 벽 앞에서 당연한 것이었다. 5일 안팎의 넉넉과 거리가 먼 일정이 첫 번째 벽이 되었다. 나는 가능하면 공항에서 가까운 곳에서 움직여야 했다. 또 비용 문제도 간과할 수 없는 벽이었다. 대중교통으로 도달할 수 없는 곳은 그만큼의 비용 상승 요인이었기에. 하지만 '꿩 대신 닭'이라고 하지 않았나, 요즘은 시대가 달라져 닭 대신 꿩이라고 하지만 암튼, 영화 정도는 순전히 운에 맡겨 볼 수 있겠다, 싶었다. 고작 두 시간, 내가 알게 모르게 허투루 쓰는 시간을 나는 알고 있기에. 그렇게 영화 [카모메 식당]을 보게 됐다. 영화 심야식당 같은 느낌일까, 건조한 추측을 하면서. 근데 그 우연의 끝이 꽤 흡족스러웠다. 왜냐면 내가 좋아하는 것들 - 여행, 여행지에서의 만남, 맛있는 요리, 환대, 운동, 언어 - 이 아기자기하게 모여 있는 담백하면서 따뜻한 영화였기 때문이다.


영화 카모메 식당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 오니기리를 주메뉴로 하는 식당을 연 여주인공 사치에가 비둘기라는 이름의 가게를 오픈한 사연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가게의 순조롭지 않은 시작이 그려진다. 한 달간 단 한 명의 손님도 다녀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드디어 첫 손님이 방문한다. 일본 문화 덕후인 토미다. 토미는 갓챠맨(독수리 오 형제)의 주제곡을 묻는다. 사치에는 가사를 떠올려 보지만, 후렴구만 생각날 듯 말 듯 맴돈다. 토미가 가게를 떠난 후에도 풀지 못한 문제처럼 가사를 기억해내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서점 카페에 홀로 앉아 있는 일본 여성을 보게 된다. 사치에는 거침없이 그녀에게 다가가 독수리 오 형제의 가사를 물어본다. 그녀는 너무나도 쉽게 가사를 적어준다. 그 일이 계기가 돼 세계 지도를 손가락으로 찍었더니 핀란드가 나왔고 그렇게 핀란드를 찾았다는 미도리를 집으로 초대하게 된다. 미도리는 그녀의 환대에 보답하고자 카모메 식당에서 일하겠다고 한다. 미도리는 마치 자기 가게 인양 애정을 갖고, 홍보, 인테리어, 메뉴 등등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그리고 사치에와 함께 하나씩 시도해 본다. 그렇게 가게는 조금씩 활기를 찾아간다. 그러다 부모님의 지난한 병시중으로 지친 와중에 TV에서 우연히 핀란드를 보고, 여행을 온 마사코가 합류하게 되고 그렇게 세 명의 일본인 여성이 카모메 식당을 운영해 나가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로맨스를 기대했다면 이 영화는 그 기대를 무참히 저버린 영화이다.





로맨스가 1도 없는데도, 훈남이 1도 등장하지 않는데도 이 영화가 좋았던 이유는 뭘까. 시각과 미각을 동시에 자극하는 먹음직스러운 일본 요리를 보는 즐거움도 크지만, 손님이 점점 늘어가는 카모메 식당을 지켜보는 재미도 크지만 나는 사치에라는 캐릭터의 힘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사치에는 어린 나이에 엄마를 여의고, 집안 살림을 도맡아야 했다. 너무 일찍 엄마가 되었다. 그래설까. 누군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좋아한다. 그런 유년시기, 그녀에게 잊지 못할 추억이 있다. 일 년에 딱 두 번 -소풍 가는 날과 운동회 하는 날- 아빠가 손수 만들어준 모양새는 볼품없지만 맛있었던 오니기리다. 그런 그녀가 핀란드에 오니 기니를 주메뉴로 하는 일식당을 연다. 그녀의 하루는 이렇다. 매일 합기도와 수영을 하며 체력을 다진다. 더 맛있는 커피를 내리기 위해 다른 사람의 조언에 기꺼이 귀 기울이고, 커피를 내릴 때마다 맛있어지는 주문을 왼다. 낯선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어서 핀란드 사람과 필란드어로 당당하게 대화한다. 궁금한 게 있다면 낯선에게 다가가 묻는다. 더 나아가 그 낯선 사람을 집으로 초대해, 맛있는 요리를 대접한다. 왜 낯선 나라에서 식당을 열었냐고 묻는 질문엔 멋진 사람을 만나고 싶어서라고 말하곤, 농담이라고 덧붙인다. 또 만약 내일 세상이 끝난다면 마지막으로 무엇을 할 거냐는 질문엔 이렇게 답한다



만약 내일 세상이 끝난다면 마지막으로 뭘 할 거예요?


엄청 맛있는 걸 먹고 싶어요. 좋은 재료를 써서 잔뜩 만들고 좋은 사람만 초대해서 술도 한잔하면서 느긋하게 식사를 즐기는 거죠




좋은 재료를 알아보고, 맛을 향한 최상의 조합을 찾아낼 줄 알고, 좋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술 한 잔 하는 즐거움을 아는 여자가 사치에인 거다. 나는 사치에가 참 매력적이어서, 만약 서울에 카모메 식당을 연다면 매일이라도 갈 수 있을 거 같다.





우연히 본 영화에 그야 말로 '대'만족을 한 나는, 영화가 이렇다면, 여행에 있어서의 지도 찍기도 엄청나지 않을까, 부풀어 오르는 기대를 멈출 수 없게 됐고, 이 기대를 조금 잔잔하게 만들기 위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의도적으로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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