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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씨 Nov 14. 2020

인생 잘 살고 있는 걸까

흙수저였지만 열심히 살았는데


무서웠고 동시에 짠했던 아이들





대학생 때, 봉사를 하러 간 적이 있다. S 그룹에서 주최하는 1박 2일 캠프였다. 취지는 저소득 문화 소외 계층 아이들의 자아 찾아주기였다. 나는 그곳에서 두 그룹의 아이들을 만났다. 첫 번째 그룹은  저멀리 산촌 마을에서 올라온 문화 소외 지역의 아이들이었다. 예쁜 미소를 장착한  수줍음이 많은 아이들이었다. 근데 두 번째 그룹이 예사롭지 않았다. 소위 말하는 문제아였기 때문이다. 그들과의 첫 만남은  이랬다. 구석진 자리에 홀로 어둠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앉아 있는 여자 아이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신발 너무 예쁘다. 어디서 샀니?"라고. 내 딴엔 혼자 있는 아이가 새로운 곳에 잘 적응할 수 있게 대화를 하려고 한 건데, 돌아온 반응은 참담했다. ㅆㅂ, 바가지, 아이씨, 동대문...... 바가지를 씌운 상인에 대한 짜증과 험한 말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연결되지 않는 단어들이 외롭게 허공을 떠돌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혼자 만의 시간을 방해한 나에 대한 것일 지로 모르겠다. 암튼 당황했지만 나는 선택을 해야 했다. 분위기가 안 좋으니까, 이 자리를 피하고 볼까? 아니면, 내가 이 순간 자리를 뜨면 본인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아이가 되레 상처를 받지 않을까?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눠볼까.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정말이지, 용기를 낸 행동이었다. 그렇게 서너 번 행사장에서 그 학생을 마주치면 웃으면서 아는 체를 했다. 근데 그 아이가 친구들에게 내 얘기를 하는 걸 듣게 됐다. "ㅈㄴ 깝쳐."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깝치는 건데, 내가 그 학생에게 그런 사람이 돼 버렸다. 그리고 그 말은 스무 살 여대생에게 비수가 되어 꽂혔다. 그리고 무서웠다.  그 아이가 날 해칠까 봐. 나는 그 일을 핑계 삼아 더 이상 그 아이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근데, 그때까지도 그 아이들을 속속들이 알았던 건 아니다. 그저 정서가 많이 불안한 중학생 아이들이라고 짐작했을 뿐.


캠프는 잘 기획되었고, 프로그램도 알찼다. 심리 검사도 하고, 적성 검사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그림도 그리는 다채로운 시간이었다.  그리고 내 역할은 그 수업에 참가해, 수업을 보조하는 것이었다. 근데 거슬리는 게 있었다. 1시간 조금 안 되는 수업 시간에 한 번도 아니고, 두어 번, 그것도 매 수업시간마다 화장실을 굳이 가겠노라며 수업을 방해하는 학생이었다.  미안함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한없이 가볍고, 불량한 그들의 태도. 나는 나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다른 학생들 생각해서 자제 좀 하지, 왜 그럴까 하고. 그 후 그들의 인솔 교사와 대화를 나누게 됐다. 문방구에서 슈퍼에서 물건을 훔치는 게 아니라, 자동차 절도로 소년원을 다녀온 아이라고 했다. 또 본드 중독에 대한 얘기도 나왔다. 수업을 방해하려는 악의가 아니라 약물 중독으로 어쩔 수 없는 불가피한 행동이라는 것이었다. 새로운 정보는 그들에 대한 생각을 모두 바꿔버렸다.  이전엔 그들의 이해 불가한 행동을 내 잣대로 비난했다면, 내가 그들과 같은 상황이었더라면 나는 과연이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판잣촌 에서 보호자의 관심이 부재한 상황에서 이웃 사는 형들과의 교류....

 .. 그렇게 캠프 마지막 날이 되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학생들과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보낸 시간은 '정'이란 걸 쌓게 했고, 우린 그 시간을 뒤돌아 보며, 아쉬운 작별을 하고 있었다. 근데, 자원봉사자 중 한 명이 울음을 터뜨렸다. 사연을 들어보니, '무서운' 중학생이 예쁘다며 휴대폰 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단다. 내게 만약 그들과 보낸 1박 2일의 시간이 없었다면, 고작 15살짜리가 연락하겠다는 데 울었다고? 하면서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를 그녀의 행동이 나는 아니, 그 자리 누구라도 이해되었다. 근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아이가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지금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데 내 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 물론 나한테는 외모에 관한 언급은 안 했다. 막상 내 얘기가 되니, 달랐다. 그녀의 얘기에 그냥 주지, 라며 가볍게 웃어넘겼는데 그랬던 내가 멈칫 주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근데 두 번의 거절을 그 아이에게 주고 싶지 않았다. 번호가 뭐라고. 나는 나를 설득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내 휴대폰 번호를 알려줬다.


며칠 후, 모르는 번호로 연락이 왔다. 캠프에 참가했던 친구들이 모여서 성인 비디오를 보고 있다며, 여러 명의 아이들이 휴대폰을 대고 서로 자기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확실한 그런 거 보면 안 된다고, 공부하라고  아니, 설령 보더라도 이런 상황에서 이런 대화는 부적절하다고 말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그런 가르침을 는 어른이 있었을까를 나는 그당시 생각했던 것 같다. 박스 줍는 할머니가 유일한 보호자, 또 다른 아이는 몸이 불편해 집 안에만 누워 있는 어머니가 유일한 보호자...... 그들과 대동소이한 그 아이들의 가정환경이 오버랩됐다. 누군가에겐 너무나 당연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스트레스를 유발할 만큼 과도한, 하지만 부모님의 관심과 사랑이 부재한 아이들은 그렇게 그들의 시간을 그렇게 보내고 있었다. 어제와 별반 다르지 않을 그들의 미래를 그려봤다. 좀 더 나은 미래를 열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불가능은 아니겠지만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불편해졌다. 만약 내가 캠프에 참가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길 가다 우연히 그들을 스쳐 지나갔더라면, 나에게 그 아이들은 무섭고 두려운 존재, 그래서 가까이하고 싶지 않고 더 나아가 말 조차 섞기 싫어지는 타인이 되었을 확률이 높다. 근데, 그들의 사정을 너무 알아버려서 그 아이들이 너무 가엽고 안타까웠다. 가족을 그리라는 강사님의 주문에 검은색 크레용을 들고, 목 메달아 자살하는 가족 그림을 그리던 고작 14살, 15살 아이의 하루가  너무 짠해서다.




한 통의 전화가 우리의 마지막이었다. 그 후 나는 내 삶을 살았고, 그 아이들도 어디선가 그들의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우린 마주치지 않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나는 내 생활 반경에서, 그들은 그들의 생활 반경에서 각자의 삶에 충실했고, 나는 그렇게 그들을 잊고 살아가고 있었다.












인생 잘 살고 있는 걸까?





대한항공 땅콩 회항 사건이 기사화될 수 있었던 건 익명의 커뮤니티 덕분이었다.  그곳에서 '제가 인생을 잘 살고 있는 건 지 모르겠어요'라는 제목의 글을 읽게 됐다. 내용은 평생 용돈이란 걸 받아 본 적 없는 흙수저로 태어나, 머리가 비상해 의대 갈 만큼의 성적을 얻었지만, 적성에 안 맞을 거 같아서 의대가 아닌, 명문대 공대 입학, 삼성전자에 입사한 분의 글이었다. 믿었던 상사한테 상처 받고, 그 와중에 병원 개업한 친구들을 보니까 '그때 의대를 갔어야 하나' 후회하는 마음과 잘 살고 있는지 인생에 대한 회의가 든다고 했다. 그러면서 누군가가 선망하는 대학의 졸업장을, 누군가가 선망했을지도 모를 직장에 다니는 마흔의 아저씨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적었다. 너 잘 살고 있다는 그 한 마디가 듣고 싶어서 글을 남긴다고. 댓글은 따뜻했다.


- 지금은 그래도 흙수저는 탈출하셨으니까 대단해요

- 처자식도 있고, 삼성 전자 다니는데도

이런 고민을 하네요, 저도 같아요

- 잘 살고 있어요

- 멋져


그 댓글들을 보면서 나는 아주 오랜만에 우리나라가 정말 헬조선이구나, 싶었다. 얼마 전, 개그맨 박지선 씨가 모친과 삶을 마감한 기사도 큰 영향을 줬을 것이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 입학했고, 또 누구나 들어갈 수 없는 경쟁률 높은 공채 개그맨이 됐고, 누군가에게 모질게 굴지도 않았을 것 같은, 오히려  모두에게 웃음을 줬던 그녀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인 지는 모르겠지만, 성실함과 선한 마음으로 살아가기엔 대한민국이 척박한 환경이란 반증이 아닐까? 하고. 그 생각으로 머릿속이 어지러운 가운데 검색창에 흙수저를 넣고 엔터를 눌렀다. 흙수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체 어느 정도 수준이냐는 질문의 글이 있었다. 2층집 살며 해외 유학 도중 IMF가 터져서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며 본인을 흙수저라고 적은 어떤 저자가 떠올랐다.  글을 읽어보기로 했다.

   본인은 전기가 끊겨서 촛불 켜고  쌀 살 돈이 없어서 굶어본 적이 있다고 했다. 댓글을 살펴봤다. 대학 다닐 때 잘 곳이 없어서 대학에서 숙박하면서 라면을 주로 먹었다는 댓글이 있었다. 또 이혼, 재혼, 폭력, 가난이 복합적으로 얽힌 사연도 있었다. 그건 흙수저도 못 들고 태어난 거라는 내용도 있었다. 나는 그곳에 굳이 안 보태도 되는 듣기 싫은 말을 익명의 힘을 빌려서 남겼다. 부채처럼 남은 그때 그 아이들에게 해주지 못한 말이 떠올라서다.  서로 얼마나 불행한 지 경쟁하는 무의미한 일 하지 말고 본인을 불쾌하게 만드는 상황을 굳이 소환하지 말고 생산적인 일에 시간을 쓰라고. 그랬더니, 험악한 댓글이 달렸다. 너도 이곳에서 댓글 달고 으면서, 생산을 논하지 말라고 했다. 맞는 말이긴 했다. 무릇 충고는 결점 없는 사람이 해야 한다고 믿으니까.  그러면서 이 글이 마음에 안 들면 본인을 차단하라고 했다. 나는 바로 그 사용자를 차단했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잊혀가던 그 아이들을 떠올렸다. 환경을 탓하며 지나간 과거 불행에 발목 잡혀, 지금도 그 불행을 떠올리며, 어디서 감히 흙수저를 입에 담아, 라며 굳이 경쟁하지 않아도 되는 레이스에서 불필요한 경쟁을 하며, 세상을 향해 적개심을 품는 날카로운 어른으로 성장하지 않았길  바라면서 말이다.







나무 위키에 따르면 수저 계급론은

부모가 자식을 뒷받침해주는 능력에 따라 결정되고, 그 능력치가 높으면 금수저, 낮으면 흙수저로 분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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