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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씨 Dec 20. 2020

슬프면서 따뜻한 밀리언 달러 베이비

뜻대로 안 될 때 내가 보는 영화

뜻대로 안 될 때가 있다. 노력한다고 이 노력의 결과가 과연 해피엔딩으로 이어질까, 의심이 불쑥불쑥 고개를 들 때 나는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재생한다.



영화는 삼나무와 참나무로 둘러싸여 떠날 수도 머물 수도 없는 깡촌에서 태어난 매기(힐러리 스엥크)가, 31살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플랭키(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트레이너를 만나, 권투 세계 챔피언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다룬다. 그녀의 유일한 편이었던 아버지를 어린 나이에 여의고, 140kg에 달하는 엄마, 제집인 양 수시로 감옥행을 선택하는 오빠, 그리고 미혼모 여동생을 둔 13살 때부터 설거지라는 돈벌이를 해야 했던 - 스스로 쓰레기임을 자각했던- 한 여성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렇게 녹록지 않은 환경 속에서 권투가 너무 좋다던 그녀는 그 좋은 것을 포기할 수 있는 많은 핑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권투라는 기회를 붙들며 인생의 화려한 절정을 맞이한다. 한 마디로 인생 역전 스토리이다.  하지만 그 모든 노력과 운에도 불구하고 동독 매춘부 출신, 속임수로 악명 높은 블루 베이라는 선수를 만나 세계 챔피언 메달을 코앞에 두고, 척추를 다치는 치명적인 부상을 당한다.  


여기까지를 나는 영화의 전반부로 봤다. 아무것도 없는 여자 주인공이 유일한 기쁨이자, 인생 역전의 기회인 권투를 통해 본인의 인생을 척박한 토지에서 비옥한 토지로 개척해 나가는 이야기. 그리고 그 과정은 너무나도 정직하고, 너무나도 치열해서 쉽게 좌절하고, 쉽게 포기하는 나를 되돌아보 했다


하지만 영화는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희망이란 두 글자를 도통 찾아볼 수 없게 한다.  척추 부상으로 평생을 침대에 누워있어야만 하는 매기를 보여주면서부터다.  그것도 세계 챔피언을 목전에 앞둔 전성기 직후라는 점이 인생의 쓴맛을 더 쓰게 부각한다. 근데 그녀는 그런 상황에서 오히려 트레이너가 속상해할 일이 더 걱정이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이 걱정할 까 봐 아프지 않다고 애써 괜찮은 척을 한다.  그런 그녀를 보며 사랑과 관심이 부재했을  그녀의 삶에 마음이 아팠다.  왜 나에게만 이런 시련을 주냐고 세상을 향해 원망할 법도 한데, 그 엄청난 불행 앞에서 묵묵히 현실을 받아들이는 그녀를 보며 줄곧 험난했던 과거가 오버랩됐기 때문이다.  그래설까. 익숙하게 불행을 맞이하는 모습이 유독 뇌리에서 잊히지 않는다. 근데 영화는 잔인하게도 계속해서 그녀의 삶에 핵펀치를 날린다. 욕창으로 한쪽 다리마저 절단해야 하는 상황.  프랭키는 그녀에게 삶의 이유를 찾아주려고 한다. 하지만 그녀에게 삶은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는 고통 그 자체였다.  결국 그녀는 어려운 결정을 내린다.   그리고 프랭키에게 조력자가 되어 줄 것을 부탁한다.


- 이렇게 살 수 없어요. 저는 많은 걸 이루었고, 넓은 세상도 봤어요. 사람들이 제 이름에 환호했죠. 물론 진짜 이름이 아니라 대장이 붙여 준 이름이지만 저한테 환호했어요. 잡지에도 실렸고요.



프랭키는 물론 거절한다.  하지만 그녀의 결심은 단단했기에 혀를 깨물며 그녀의 결심을 실행으로 옮긴다. 그러길 두 차례, 과다출혈로 상황이 더 나빠지는 걸  지켜본 프랭키는 결국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한다.  그리고 그녀의 마지막 순간을 따듯하게 의미 있게 만들어준다. 프랭키가 지어준,  세상이 환호했던 '무 쿠슐라'의 의미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내 사랑', '내 혈육'이라는.  한 때 밀쳐 내기만 했던 프랭키에게 그녀는 그렇게 커다란 애정체가 되었음을 확인한다. 꺼져가는 삶에 희미하지만 행복한 미소가  잠시 스쳐 지나간다.  그녀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안락사라는 민감한 문제의 옳고 그름을 잠시 접어 두고, 한 남자가 자신을 파괴할 수도 있는 어려운 결정을 내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후 프랭키는 자취를 감춘다. 그리고 영화는 한 때 매기와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레스토랑에 혼자 앉아 있는 프랭키의 모습을 흐릿하게 보여주면서 엔딩 크레디트를 띄운다.



이 영화는 실화라고 한다. 그래설까. 누군가 이 영화를 평하길 잔인하다고 했다. 노력 끝에 해피엔딩 펼쳐지지 않는다고. 영화에서 말하길 권투의 핵심은 존중인데, 링 위에서 정당하지 못한 방법에 의해 정당하게 노력을 기울인 사람의 삶이 파괴됐다고. 나도 처음 볼 땐 이 영화를 그렇게 해석했던 거 같다. 근데 지금은 조금 달라졌다. 물론 볼 때마다 감상평이 달라지고 있지만, 내가 이 영화를 반복해서 보는 건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현실적으로 조정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살아간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기에 녹록한 현실을 견디기 위해 사람들은 부지런히 양서를 읽고, 좋은 영화도 보고, 교류를 나누다. 성악설과 성선설, 백지설 세상을 바라보는 여러 잣대가 있겠지만 지금까지의 나는 성선설을 믿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결과가 내 행복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실망할 일이 더 많았기 때문이었다. 노력으로 인한 꿈의 쟁취 그리고 해피엔딩이 아닌, 안락사라는 기대하지 않은 엔딩처럼. 근데 이 영화를 여러 번 보고, 나는 기대치를 낮추게 됐다. 아니, 노력이 결실 맺는 방식을 조금 넓게 해석하게 됐다.  권선징악을 다루는 동화처럼 단순하게 생각하지 말자고. 노력의 결과를 근사한 집, 사랑하는 사람과의 해피엔딩으로 단순하게 귀결시키지 말자고. 짧은 삶이었지만 사랑하는 권투를 원 없이 했고 그로 인해 삶의 환희를 누렸고 그 과정에서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사랑을 경험한 것도 내가 그린 해피엔딩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의미 있는 해피엔딩일 수도 있다고. 그렇게 해피엔딩을 조금 더 융통성 있게 해석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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