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녕씨 Mar 06. 2021

여행도 먹으러 가는 거고

각국의 조식 이야기



2년을 넘긴 스마트폰

1년 더 써야지, 하고 리셋을 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내 장벽을 만났다.

백업을 하는데, 사진이 무려 3천 장이었다.

대체 무슨 사진일까, 한 장씩 넘기다 '아, 그때 그랬지'라는 멜랑콜리한 추억에 잠기는 게 아니라, 3천 장이 주는 압박감에 결국 포기

그렇게 초기화 계획은 저 멀리로 멀어져 갔다.

......

스마트폰 약정기간 2년을 넘기면 성능이 떨어진다는 소문처럼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느낌적인 느낌을 여러 번 받게 되고, 그럴수록 초기화를 해야 한다고, 진짜 해야 한다고 필요성을 재차 거세게 느꼈다. (물론 3월 달이지만) 거기에 새해도 밝았으니, 나의 스마트폰도 새단장이 필요해, 라는 생각이 더해졌다.  


'그래, 진짜 초기화를 하자'


그렇게 그 많던 사진을 1천 장으로 줄이고

앞으로 무분별하게 사진을 찍지 말자고

아니면, 주기적으로 사진 폴더를 관리해주자고

결코 처음이 아닌 익숙한 반성을 또 해본다.


드디어 백업을 마치고, 정해진 절차를 따르는데 삼성 클라우드 서비스가 종료된다는 팝업을 만났다.

그리하여 막 정리해 아무것도 없는 사진첩에 또다시 천 장의 사진이 다운로드되기 시작했다.


당최 사진의 굴레를 벗어날 수가 없군, 이 돼 버렸다.


그래도 이건 좀 궁금했다. 대체 어떤 사진들이 다운로드될까?


다운로드된 건 2016-2018년 사진들이었다. 그리고 가장 큰 비중은 여행과 관련된 기록들이었다. 여행 전, 교통편이랑 숙박, 가고 싶은 식당 알아본 것이 캡처 형태로 많았다. 또 여행 가서 아침 먹는 것부터 저녁까지의  기록들도. 사진을 보면서 그 당시의 신남과 설렘이 살아났다.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평소에 찍은 사진보다 내가 예쁜 거 같다, 라는 생각은 나만 하나? ㅋㅋㅋㅋ 일상의 찌듦이 사라진 내 모습은 사실은 예쁘구나, 라는 자칫 씁쓸할 수 있는 생각을 지우고, 내가 유일하게 내가 예쁘다고 하는 순간을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나는 생각하련다. 그게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고.) 암튼, 그렇게 갔구나, 먹었구나, 만났구나, 머물렀구나, 했구나의 기록을 살펴보는데, 유독 시선이 머무는 사진이 있었다. 그건 일생에 한 번 꼭 가봐야 하는 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명소가 아니라, 별이 많이  붙은 숙소가 아니라, 현지에서 맛본 맛있는 음식이었다. 그중에서도 나는 조식에 눈이 갔다.



그렇게 조식 사진을 모아보았다. 샌드위치가 주식인 유럽에서 흰 접시에 담았던 - 가짓수 많던 치즈와 햄으로 만든 - 샌드위치와 일본을 대표하는 초밥, 사시미를 담은 일본에서의 조식, 그리고 콩지를 선택한 말레이시아의 아침, 갓 구운 에그타르트를 종원원이 서빙해주던 마카오, 그리고   친구와 마트에서 소시지 한 봉지에 과일을 사선, 직접 해 먹었던 조식, 호텔 조식은 아니지만 지역 카페에서 맛본 특색 있는 조식 메뉴까지. 



개그맨 김민경이 '나 혼자 산다'에 출연해서 "여행도 먹으러 가는 거고, 눈 뜨면 해야 하는 게 먹는 거"라는 얘기를 했는데, 정말로 농담 안 붙이고 점점 먹는 게 전부가 돼 가고 있다. 아니 전부다. 예전엔 여행에 있어서 근사한 자연 뷰를 만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면 , 이젠 그 근사한 곳은 또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이지 싶다. 실제로도 아, 내가  여길 갔구나를 사진을 봐야 떠오를 정도다. 그러니까 그냥 도장깨기 같은 느낌이랄까. 반면, 맛있었고, 특색 있었던, 그리고 소소한 추억이 얽힌 로컬 식당에서 경험한 음식은 다시 그 나라를 여행한다면 또다시 가고 싶을 정도로 만족감이 높다.



조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하얀 침대 시트다. 특급호텔의 침대 시트는 한결같이 하얀색이다. 막 다림질한 듯한 기분 좋은 까슬까슬함도 있다. 그 안에 들어가면 ‘아, 참 좋다’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게 된다. 나는 아내에게 우리 침대도 하얀 시트로 바꾸자고 했다. 아내는 황당한 표정으로 한참을 쳐다보더니, 이렇게 대답한다. “당신이 다 세탁하고, 매번 하얀 침대보 갈고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



그날 이후로 난 매일 밤 졸랐다. “착하게 살겠다.” 하얀 침대에서는 “정말 열심히 하겠다. 최선을 다하겠다. 정말 잘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아내는 요지부동이었다. 한번 마음먹은 일은 꼭 해야 하는 성미를 가진 나는 새벽마다 일어나 왔다 갔다 했다. 잠든 아내가 깨도록 불을 켜고 부스럭거렸다. 잠을 깨, 졸린 눈으로 도대체 뭐하냐는 아내에게 ‘불면증’이라고 했다. 하얀 침대 시트에서는 정말 잠이 잘 올 거라고 했다. 결국 내 월급을 아내의 통장으로 직접 이체한다는 조건으로 하얀 침대 시트를 얻어냈다. 요즘 난 하얀 시트에서 잔다. 잠이 정말 잘 온다. 그 깔끔한 하얀색 시트의 느낌이 정말 행복하다. 아, 그리고 … 정말 매번 최선을 다한다.


김정운 작가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중



김정운 작가의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을 읽고, 내 머릿속에 남은 건 하얀색 시트였다. 잔상처럼  나에게 그런 행복감을 주는 게 무엇일까, 는 질문을 떠나보낼 수가 없었다.  물론 그 답은 뚝딱 떠오르지 않았다. 그로부터 시간이 꽤 지났다. 그리고 이젠 그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있을 거 같다. 나에게 하얀색 시트 같은 것은 하얀 접시에 담긴 음식을 소중한 사람과 함께 먹는 순간이 아닐까라는.




덧붙이면. 초기화한 스마트폰은 아주 만족스럽다. 진작할 걸.






유럽의 조식



인천공항라운지에서의 조식
오스트리아에서의 조식
오스트리아에서의 조식
말레이시아에서의 조식
일본에서의 조식
일본 로컬 카페에서의 조식


작가의 이전글 슬프면서 따뜻한 밀리언 달러 베이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