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무슨 사진일까, 한 장씩 넘기다 '아, 그때 그랬지'라는 멜랑콜리한 추억에 잠기는 게 아니라, 3천 장이 주는 압박감에 결국 포기
그렇게 초기화 계획은 저 멀리로 멀어져 갔다.
......
스마트폰 약정기간 2년을 넘기면 성능이 떨어진다는 소문처럼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느낌적인 느낌을 여러 번 받게 되고, 그럴수록 초기화를 해야 한다고, 진짜 해야 한다고 필요성을 재차 거세게 느꼈다. (물론 3월 달이지만) 거기에 새해도 밝았으니, 나의 스마트폰도 새단장이 필요해, 라는 생각이 더해졌다.
'그래, 진짜 초기화를 하자'
그렇게 그 많던 사진을 1천 장으로 줄이고
앞으로 무분별하게 사진을 찍지 말자고
아니면, 주기적으로 사진 폴더를 관리해주자고
결코 처음이 아닌 익숙한 반성을 또 해본다.
드디어 백업을 마치고, 정해진 절차를 따르는데 삼성 클라우드 서비스가 종료된다는 팝업을 만났다.
그리하여 막 정리해 아무것도 없는 사진첩에 또다시 천 장의 사진이 다운로드되기 시작했다.
당최 사진의 굴레를 벗어날 수가 없군, 이 돼 버렸다.
그래도 이건 좀 궁금했다. 대체 어떤 사진들이 다운로드될까?
다운로드된 건 2016-2018년 사진들이었다. 그리고 가장 큰 비중은 여행과 관련된 기록들이었다. 여행 전, 교통편이랑 숙박, 가고 싶은 식당 알아본 것이 캡처 형태로 많았다. 또 여행 가서 아침 먹는 것부터 저녁까지의 기록들도. 사진을 보면서 그 당시의 신남과 설렘이 살아났다.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평소에 찍은 사진보다 내가 예쁜 거 같다, 라는 생각은 나만 하나? ㅋㅋㅋㅋ 일상의 찌듦이 사라진 내 모습은 사실은 예쁘구나, 라는 자칫씁쓸할 수 있는 생각을 지우고, 내가 유일하게 내가 예쁘다고 하는 순간을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나는 생각하련다.그게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고.) 암튼, 그렇게 갔구나, 먹었구나, 만났구나, 머물렀구나, 했구나의 기록을 살펴보는데, 유독 시선이 머무는 사진이 있었다. 그건 일생에 한 번 꼭 가봐야 하는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명소가 아니라, 별이 많이 붙은 숙소가 아니라, 현지에서 맛본 맛있는 음식이었다. 그중에서도 나는 조식에 눈이 갔다.
그렇게 조식 사진을 모아보았다. 샌드위치가 주식인 유럽에서 흰 접시에 담았던 - 가짓수 많던 치즈와 햄으로 만든 - 샌드위치와 일본을 대표하는 초밥, 사시미를 담은 일본에서의 조식, 그리고 콩지를 선택한 말레이시아의 아침, 갓 구운 에그타르트를 종원원이 서빙해주던 마카오, 그리고 친구와 마트에서 소시지 한 봉지에 과일을 사선, 직접 해 먹었던 조식, 호텔 조식은 아니지만 지역 카페에서 맛본 특색 있는 조식 메뉴까지.
개그맨 김민경이 '나 혼자 산다'에 출연해서 "여행도 먹으러 가는 거고, 눈 뜨면 해야 하는 게 먹는 거"라는 얘기를 했는데, 정말로 농담 안 붙이고 점점 먹는 게 전부가 돼 가고 있다. 아니 전부다. 예전엔 여행에 있어서 근사한 자연 뷰를 만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면, 이젠 그 근사한 곳은 또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이지 싶다. 실제로도 아, 내가 여길 갔구나를 사진을 봐야 떠오를 정도다. 그러니까 그냥 도장깨기 같은 느낌이랄까. 반면, 맛있었고, 특색 있었던, 그리고 소소한 추억이 얽힌 로컬 식당에서 경험한 음식은 다시 그 나라를 여행한다면 또다시 가고 싶을 정도로 만족감이 높다.
조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하얀 침대 시트다. 특급호텔의 침대 시트는 한결같이 하얀색이다. 막 다림질한 듯한 기분 좋은 까슬까슬함도 있다. 그 안에 들어가면 ‘아, 참 좋다’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게 된다. 나는 아내에게 우리 침대도 하얀 시트로 바꾸자고 했다. 아내는 황당한 표정으로 한참을 쳐다보더니, 이렇게 대답한다. “당신이 다 세탁하고, 매번 하얀 침대보 갈고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
그날 이후로 난 매일 밤 졸랐다. “착하게 살겠다.” 하얀 침대에서는 “정말 열심히 하겠다. 최선을 다하겠다. 정말 잘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아내는 요지부동이었다. 한번 마음먹은 일은 꼭 해야 하는 성미를 가진 나는 새벽마다 일어나 왔다 갔다 했다. 잠든 아내가 깨도록 불을 켜고 부스럭거렸다. 잠을 깨, 졸린 눈으로 도대체 뭐하냐는 아내에게 ‘불면증’이라고 했다. 하얀 침대 시트에서는 정말 잠이 잘 올 거라고 했다. 결국 내 월급을 아내의 통장으로 직접 이체한다는 조건으로 하얀 침대 시트를 얻어냈다. 요즘 난 하얀 시트에서 잔다. 잠이 정말 잘 온다. 그 깔끔한 하얀색 시트의 느낌이 정말 행복하다. 아, 그리고 … 정말 매번 최선을 다한다.
김정운 작가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중
김정운 작가의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을 읽고, 내 머릿속에 남은 건 하얀색 시트였다. 잔상처럼 나에게 그런 행복감을 주는 게 무엇일까, 라는 질문을 떠나보낼 수가 없었다. 물론 그 답은 뚝딱떠오르지 않았다. 그로부터 시간이 꽤 지났다. 그리고 이젠그 질문에 대답을할 수 있을 거 같다. 나에게 하얀색 시트 같은 것은 하얀 접시에 담긴 음식을 소중한 사람과 함께 먹는 게 순간이 아닐까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