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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씨 May 29. 2021

당근 마켓에 비키니를 올렸을 때

최소한이 지켜지길

핸드폰이 울렸다. 당근 마켓이었다


"늦은 시각에 죄송해요."라고 시작하는 메시지였다. 시계를 보니, 다음 날로 막 넘어가려고 하고 있었다.

그녀는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내가 올린 상품을 한 개도 아니고, 무려 4가지-만년필 하나 병 잉크 총 6병-를 사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가격 에누리를 해줄 수 없겠느냐고 덧붙였다.


나는 당근 마켓에 상품을 올릴 때, 가격 네고가 안 되도록 설정하는 편이다. 내 기준일수도 있지만 저렴하게 올린다. 내가 정가보다 조금 저렴하게 사는 편이라 가능한 일이기도 하고, 또 물건을 팔아서 이윤을 얻으려는 것보다 내가 비록 안 쓰지만  누군가 필요한 사람이 잘 쓰면 좋겠다, 싶어서다. 짐을 줄이고 싶은 마음도 크다. 근데 이번엔 4가지를 한꺼번에 산다니까 조금 가격을 낮춰도 되겠다 싶었다. (생각해보면, 루미큐브 사겠다고 해서 약속 잡고 나갔는데 돈 주기 직전에 가격 깎는 분도 만났는데 그분도 깎아주긴 했다만 ㅋㅋ 나 같은 사람은 장사하면 안 된다. 암튼)


"5천 원 깎아 드릴게요. 아시겠지만 저렴하게 올려서요."


그랬더니, 그녀가 5천 원을 깎아서 11만 원이 된 걸 1만 원 더 깎아서 10만 원에 안 되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거절을 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거래가 성사되지 않겠구나, 했다. 근데 그녀가 사겠다고 했다. 그리고 예쁜 말을 덧붙였다. 자기 상황을 설명하고, 혹시나 민폐가 되지 않았는지를 물었다. 예의 있게. 별일 아닐 수도 있는 이 짧은 리액션에서 나는 그녀에게 호감을 느꼈다. 가끔 드물지만 가격만 흥정하고, 아주 짧은 순간  무례한 인상만 남기는 고객도 있으니까. 이번 네이버 사태를 보면, 이런 분은  그분의 세발의 피에도 못 미치는 정도겠지만.


당근마켓




그녀와 직거래를 하기로 한 날, 나는 그녀에게 뭔가를 챙겨주고 싶었다. 말이라 쪼들린다는 말이 마음에 걸린 걸까.  방을 둘러봤다. 뭐 챙겨줄 게 없을까, 하고. 귀걸이가 보였다. 한 때 귀걸이 만드는 거에 꽂혀서 열심히 만들었던. 검정, 보라, 회색 3가지를 챙겼다. 귀걸이는 호불호가 갈리니까. 맘에 드는 걸로 건네주려고. 근데 맘에 안 든다고 하면 어쩌지? 제작자로서 자존심에 스크래치 나는 리스크 아닌가?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잠시 귀걸이를 주지 말까, 하다가 아님 말고의 정신으로 귀걸이를 챙겼다.  



그녀를 만났다. 거래를 마쳤다. 그리고 내심 좋은 후기가 올라오겠다, 싶었다.  (물론 좋은 후기를 바라고 귀걸이를 준 건 아니지만.) 근데 그녀가 후기를 남기지 않았다. 



혼자 하는 생각은 참 멋대로여서 나는 굳이 안 해도 되는 쓸데없는 생각들을 마주했는데, 이런 거였다. 균형이 중요한 건데, 괜히 귀걸이를 줬네. 과잉 친절이 꼭 좋은 건 아닌데... 아니 오히려 과잉 친절은 호구로 보이게 하는데... 괜히 오버했네... 고시 합격까지 뒷바라지해줬더니, 그 남자 배신하더라의 교훈은 틀린 게 아닌데... 에잇. 쓸데없는 생각 물러가라.




다음 날이 되었다. 그날이 오늘이었다. 진동이 울렸다. 후기가 올라왔다. 후기도 참 예쁘게 남겼다. 진짜 음료수를 받은 건 아니지만 음료수를 받은 것보다 기분 좋은. 말 한마디의 위력은 생각보다 크다. 그렇게 판매한 건 만년필과 병 잉크인데, 막상 그 얘긴 없는 후기가 돼 버렸다. 뭔가 주객이 전도된 ㅋㅋㅋ





예쁜 후기



내가 만든 귀걸이



최악의 경험도 올려본다. 비키니를 올린 적이 있다. 한두 번 입었던 하지만  앞으로 입을 것 같지 않은. 어떤 분이 사겠다고 하면서 가격을 깎았다. 안 입는 거니까 알겠다고 하고 가격을 내려줬다.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몇 분 후 메시지가 왔다


"제가 여동생 대신 물건을 받으러 가는 건데, 혹시 놀라실까 봐. 괜찮을까요?"


그러니까 내가 입었던 비키니를 사려는 사람이 남자였던 것. 나는 안 괜찮다고 했다. 거래는 쫑이 났다.


당근 마켓엔 참 다양한 사람이 있다. 물건을 매개로 아주 잠깐 만나는 사이일지라도 지킬 건 지키는 매너를 바래보면 무리일까. 당연히 회사에서도. 그럼, 이번 네이버 같은 일도 안 생겼을 테니까. 근데 그 최소한이 안 지켜지는 것 같아서 조금은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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