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래로 코가 창에 닿아 있고, 콧구멍에서 뿜어 나오는 콧김이 검은 창 위로 또 다른 타원을 그려내고 있다.
알몸이 거의 창문에 닿아 있으니 욕실 안을 훔쳐보는 놈과 나는 유리 두께만큼, 그러니까 1센티도 안 되는 간격으로 대치 중인 것이다.
황급히 창 아래로 몸을 숨겼다.
창문을 열어 범인이 누군지 확인하고 싶지만, 알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놈도 그걸 아는 건지 사라진 내 몸을 찾으려는 눈이 아직도 꿈뻑이며 창 안을 훑고 있다.
아침에 환기를 목적으로 올려둔 볼레(volet, 빛막이 덧창)를 덜 닫았나 보다. 이런 실수는 좀처럼 하지 않는데···
누가, 대체 왜. 강력한 의문이 물음표가 아닌 분노의 느낌표로 머릿속을 헤집는다.
'다 보였을까?'
욕실 창 너머로 현란하게 출렁이던 앞 동 주민의 엉덩이가 떠오른다.
며칠 전 간유리 뒤로 둥근 살덩이 두 쪽이 물기를 닦아내는 손의 움직임에 따라 덜렁이는 모습을 보았다.
엉덩이 주인은 분명 백인 노인이었다. 근육이 소실된 하얀 살 뭉치가 볼륨을 잃고 허벅지로 가파르게 이어졌기 때문이다.
간유리의 허술함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날, 놀란 얼굴로 서 있는 나에게 큰딸이 다가와 내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보았다.
저 할아버지 또 저러시네. 밖에서 다 보이는 걸 모르시는 건지, 아니면 보여도 별 상관없는 건지······아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방을 나갔었다.
“변태들은 나라 불문 인종 불문 어디에나 있구나. 이래서 RDC(Rez-de-chaussée, 한국에서는 1층)은 절대로 싫다 했던 거야.”
“어쩔 수 없었잖아. 둘 다 불어 한마디 못하던 때였는데 무슨 수로 구미에 맞는 집을 찾아?”
“어떻게 블라인드도 확인 안 하고 샤워를 시작했지? 내가?”
“다행이네. 병이 다 나았나 보다.”
내가 눈을 흘기자 남편의 입이 오므라들었다.
“분명히 다 보였을 거야.”
“보이긴 뭐가 보인다 그래? 간유리잖아.”
“간유리라도 창에 바싹 붙어 있으면 다 보여.”
“그래? 그건 또 몰랐네.”
“박민우, 너 이거 또 소설에 넣기만 해 봐. 이제 진짜 안 참아.”
남편은 짙은 눈썹 아래 커다란 눈을 부릅떴다. 저럴 때면 동그란 이마가, 조각처럼 날렵한 콧날이 더욱 돋보인다.
“필요하면 뭐든 끌어다 써야지. 글로 밥 먹고 사는 게 쉽니?”
“내 경험은 내가 필요할 때, 내가 쓸 거라고!”
잘 팔리는 추리 소설 작가인 남편은 웹에 글을 올리는 족족 종이책으로 출간하자는 제의를 받곤 한다.
반면, 나는 5년 전, 지방 신문사 신춘문예에 당선된 이후 이렇다 할 작품 한 편을 내지 못하다 로맨스로 장르를 변경한 후 더욱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뜬금없이 프랑스에 가서 살아보자는 남편에게 미쳤냐고 대꾸했다가 글 쓰고 싶은 게 맞냐, 만날 일상의 굴레를 못 벗어나니 글이 안 나오는 거다, 새로운 경험으로 네 껍질을 깨야 뭐라도 나올 것 아니냐 등의 논리적인 잔소리로 설득당했다. 아니 사기당했다.
나는 말도 안 통하는 이 먼 타국에서, 도와줄 가족이나 친구도 없이, 마땅히 외식할 식당이나 반찬 가게도 없이 세 아이를 키우며, 살림하며, 부지불식간에 어퍼컷의 형태로 날아오는 문화 충격과 잽의 형태로 공격해 오는 지속적인 가사 노동의 스트레스로 일기 한 줄 쓸 여력이 없다.
일상의 굴레를 벗기는커녕 전보다 몇 배는 더 단단한 껍질에 갇혀버렸다.
게다가 낯선 땅에서 당한 황당한 일들을 하소연하면 남편은 내 이야기를 극적으로 포장하여 자기의 소설에 녹여내 버렸다.
말하자면 프랑스 생활의 단물은 혼자 다 맛보고 있는 것이다.
“듣자 하니 억울하네. 내가 네 것을 가로채는 것처럼 말한다?”
“네가 써버린 걸 내가 또 쓸 수는 없잖아.”
“무슨 소리? 완벽하게 바꿔 쓰고 있구먼.”
물론 그는 내 일화를 자신의 스토리에 맞게 재단하고 봉제해서 사용한다. 다만 어떻게 바꿔도 묘한기시감이 들고 김 빠진 탄산수를 마시는 것같은 느낌에 쓰기 꺼려진다.
“핑계가 참 많다는 생각은 안 들어?”
어학당 강의를 하는 바쁜 일상 속에서도 변명 없이 거침없이 매일같이 글을 쓰고 있는 그에게 내가 하는 말은 나태한 핑계로 들릴 것이다. 억울하지만 달리 반박할 말이 없다.
“밖에 가서 욕실 창에 대고 눈 좀 깜빡거려 봐. 확인해 봐야겠어.”
“종일 일하다 이제 집에 들어온 사람한테 이런 것까지 시켜야겠어?”
“왜 이러셔? 너도 궁금하잖아.”
“내가? 아닐걸?”
“아니긴, 벌써 이걸 소설에 어떻게 녹여낼까 고민하고 있으면서.”
“아, 왜 욕실 벽에 대문짝만 한 창을 만들어서 이 난리람? 변태 같은 프랑스 놈들!”
남편은 추운 오밤중에 별 걸 다 시킨다는 둥 구시렁대면서 문을 나섰다.
귀찮은 듯 뒷말하고 있지만 저건 완벽한 페이크다.
지금 이 장면은 분명히 그의 소설 속에 삽입될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에게도 이 실험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들이 놀다 던져둔 고등어 인형과 쥐 인형 두 개를 욕실 창문 앞에 바싹대고 움직여 보았다.
우리 집 욕실 구조를 대략 설명하자면, 욕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정면으로 보이는 벽면에 창문이 있고, 그 창 아래로 작은 욕조가, 그리고 그 욕조에는 샤워기가 달려있다.
욕실은 무척 좁아서 문에서부터 두 발자국 앞에 욕조가 있는 셈인데, 건식 욕실이라 샤워는 비좁은 욕조 안에서만 가능하고, 덕분에 물에 젖은 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창문에 닿곤 한다.
왜 샤워기가 달린 욕조를 창문 아래에 배치했을까. 무슨 생각으로 욕실 창문을 저리 커다랗게 만들었을까. 허리춤부터 천장까지 벽을 뻥 뚫어 놓은 이유가 대체 뭐냐는 말이다.
목욕할 때면 이런 불만 섞인 의문이 떠오르곤 하는데 10월부터 추워지는 겨울에는 특히 더했다.
말도 안 되게 크고 허술한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칼바람도 짜증 나는데 이제는 창 너머로 누군가 훔쳐볼 수도 있다는 것까지 신경 써야 한다니...
간유리 안으로 쑤욱 등장한 두 개의 동그라미가 깜빡거리기 시작한다.
“아무것도 안 보였다니까.”
“말이 돼? 여기선 깜빡이는 네 눈이 선명하게 보였는데?”
“무언가 움직이고 있구나, 알 수 있는 정도였어.”
“정말이야? 앞 동 할아버지 엉덩이도 적나라하게 보였었다고.”
“우리 집은 1층이라 안이 잘 안 보이는 간유리를 썼겠지.”
“이 나라가 그리 세심한 나라였어? 시에서 제공하는 저소득용 아파트를 층별로 관리할 만큼?”
“그만 잊어.”
“내가 나가서 볼 테니까 이번엔 네가 욕조에 들어가서 서 있어 봐.”
남편은 유난 그만 떨라는 말을 남기고 책과 원고가 널브러져 있는 책상 앞에 앉아 버렸다.
매주 다가오는 연재소설 마감도 버거운데 갑자기 퇴직해 버린 동료의 수업까지 떠맡게 되어 예민한 나날이었다.
한국어 교원 자격증이 있는 남편은 한국에서 하던 강사직을 프랑스에서도 하고 있다.
돈도 돈이지만, 프랑스에서 거주증을 받고 살기 위해서는 직업이 필요했기 때문인데 요새는 나에게도 한국어 교원 자격증을 따서 어학당에 취업하라고 강권하고 있다.
“프랑스 들어오기 전에 자격증 땄으면 네가 꿰찰 수 있는 자리잖아. 전공도 국어였으니, 인터넷으로 수업 몇 과목 듣고 두 어 번 실습하면 바로 딸 수 있었는데.”
그가 내 입을 다물게 하는 작전을 개시했다. 내가 귀찮아질 때면 쓰는 방법이다.
프랑스 어학원의 한국어 강사는 빠듯한 월급을 받지만, 소설가의 부업으로는 꽤 좋은 직업이다. 게다가 남편은 한국에서의 수입도 있어서 강의를 많이 맡지 않는다.
이런 협상이 가능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10년이라는 긴 강사 경력과 이 지역이 아직 한국어를 배우려는 학생이 많지 않다는 것, 또 프랑스 거주를 위해 직업이 필요할 뿐 월급이 적다고 이직을 감행할 사람은 아니라는 점, 그리고 제일 중요한 이유로는 한국에서부터 오래 같이 일했던 동료가 이곳 어학원 행정팀 팀장이라는 것이다.
기막힌 머리 회전을 자랑하며 기상천외한 추리소설을 쓰는 남편은 전 세계의 나라 중 복지가 좋고, 글의 영감을 받을 수 있으며, 치안도 괜찮은 나라를 리스트로 정리한 후 프랑스를 골랐다.
그의 계산은 딱 맞았다. 저소득층에게 보조금과 여러 가지 혜택을 제공해 주는 복지 선진국인 프랑스에서는, 자녀들의 양육 수당도 제법 든든하게 챙겨주는데 우리처럼 자녀가 셋인 다둥이 저소득층 가족에게는 특히 많은 혜택이 제공된다.
예를 들어, 세금 면제 혜택이랄지 집세나 학비 보조 등이 포함되는데, 방학 중에는 아이들의 활동비 보조금 명목으로 소정의 수표도 지급된다.
다만, 프랑스에 도착한 지 2년이 다 되어가도록 우리는 그 혜택을 못 누리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카프(CAF, 가족수당 기금)에서 왜 우리한테는 양육 수당을 안 주는 거지?”
컴퓨터를 바라보던 남편의 얼굴이 일순 일그러졌다. 이 얘기만 나오면 왜 저렇게 예민해지는지 알 수가 없다.
“그건 우리를 위한 제도가 아니라고 했지?”
“왜? 외국인이라서? 아님 세금을 적게 내서?”
“나 참···”
“왜 이렇게 아이들 일에 무관심이야?”
그가 대답을 기다리는 나를 쏘아본다.
“또 시작인 거야?”
남편은 신경질적으로 의자를 젖히더니 핸드폰을 쥐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냉랭한 분위기를 감지한 아이들은 이미 방으로 숨어 버렸다.
어느덧 남편과 말을 안 한 지 일주일이 되었다.
화해할 뻔했다가 집안 환기 문제로 크게 부딪히면서 전례 없이 긴 냉전이 지속되고 있다.
사실 환기 때문에 다투는 건 늘 있던 일상이지만 이번에는 좀 다르다. 내가 극도로 싫어하는 행동을 일부러 하면서 공연히 나를 자극한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국인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귀가하는 길이었다.
집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인상을 찌푸리며 창문을 열어젖히는 남편을 보고 있자니 똬리를 틀고 있던 울분이 터져 나왔다. 집에만 오면 저러는 데 볼 때마다 기분이 영 상한다.
마치 재래식 화장실에 들어선 사람처럼 병적으로 환기를 시키곤 하는 데 그럴 때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내 겨드랑이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으며 그의 눈치를 보게 된다.
밖에서 들어온 사람이 입구에서부터 못마땅한 표정으로 보란 듯 창을 열어젖히는 행동은 나를 향한 일종의 시위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젠 그가 코를 킁킁대기만 해도 또 무슨 냄새가 나는 건가 나도 덩달아 코를 킁킁거리게 된다.
사실 나는 겁도 많고 의심도 많은 사람이다.
원래 이런 사람은 아니었고, 과거에 겪은 사건 때문에 주변을 과하게 경계하게 되었는데 나의 이런 성향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남편이 내 트라우마에 정면 도전하는 행동을 대수롭지 않게 하는 것이 무척 서운하다.
1층에 사는 하루하루가 나에겐 전쟁과도 같은데···
“창문 열려면 전등은 꺼달라고 했지? 이렇게 불까지 켜고 창을 열면 어떻게 해? 거실 볼레(Volet)는 다 올리지 말고 울타리 높이까지만 올려 달라고. 이렇게 다 올려버리면 밖에서 우리 집이 너무 잘 보인단 말이야.”
우리 집 거실은 전면이 통유리창으로 되어있고 현관문 크기의 창 하나가 여닫이 형태로 열리는 구조라서 환기할 때면 그 창을 통째로 열어야 한다.
물론 거실 밖으로는 테라스가 있고, 나지막한 울타리가 있긴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울타리 앞의 화단을 발판 삼아 누구든 쉽게 뛰어넘어 들어올 수 있고, 키가 큰 사람은 울타리 너머로 집 안도 훤히 볼 수 있다.
“울타리가 있는데 대체 뭐가 보인다는 거야?”
“울타리 위로 볼레를 다 올려버리니까 하는 소리지. 앞 동 3층이나 4층같이 윗집에서 내려다보면 우리 집 안이 다 보여! 게다가 불까지 켜두면 저기 선반에 있는 사진 속 내 머리핀 색도 구별할 수 있다고 말했잖아.”
“환기하는 십 분 사이에 누가 우리 집 안을 들여다본다고 그래?”
욕실 간유리에 번졌다 사라지는 콧김이 떠오른다. 뿜어 나오는 온기가 팔뚝 맨살에 닿는 것만 같다.
“몰라서 물어? 욕실 창문에 코가 뭉개지도록 얼굴을 처박고 들여다보던 놈 기억 안 나? 그런 사람이 한 둘이겠어? 여기는 이 도시의 할렘이라고! 저녁 6시 이후에는 피자 배달원도 배달을 꺼리는 동네! 모녀 넷만 있는 날도 많은데 걱정도 안 돼?”
“제발 그 모녀 넷 소리 좀 그만해!”
남편은 갑자기 벌건 얼굴로 소리를 지르더니 아이들의 장난감 함에서 인형 두 개를 집어 들어 내 눈앞에 흔들었다.
“네 몸이나 이 인형들이나 볼 것 없는 건 매한가지야! 누가 본다고 이 난리야?”
춤추듯 덜렁이는 인형들은 며칠 전 내가 욕실 간유리 뒤에서 남편에게 흔들어 보였던 인형이었다. 그는 정확히 저 두 개를 골랐다.
“내 말 맞지? 다 보였지?”
“그래! 다 보이더라. 이 인형들뿐 아니라 네 얼굴에 있는 점도 다 보이더라! 됐냐?”
남편은 인형을 쓰레기통에 쑤셔 박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누구 때문에, 대체 누구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