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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모아 Aug 24. 2024

[4화] 진영 이야기 - 우유가 이어준 인연

<연재소설> 비밀의 부부

전화를 건 사람은 남편이었다. 그는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모자 좀 쓰고 있지.”


언제 도착했는지 남편이 비를 맞고 있던 나에게 후드를 씌워주었다. 우린 한동안 나란히 앉아 말없이 강물을 바라보았다.


이러고 있으니 단짝이었던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다.


지금은 남편이 된 민우랑 친하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대접받던 시절, 부담스러우면서도 남몰래 설렜던 그런 감정은 이제 없지만 나는 아직도 국문과 조인성이라 불리며 유명세를 떨치던 민우가 내 남편이란 사실이 실감 나지 않을 때가 많다.


우리는 초등학생 때 처음 만났고 중학생 때 친해졌다.


중학생 때부터 민우가 대단히 멋지다고 생각했지만, 친구네 뭐네 주접떨다가 다른 여자들한테 선수를 뺏겼고, 그렇게 내내 그가 만나는 온갖 여자들을 지켜보았다.


사실 뭘 어쩔 용기도 없었기에 친구로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그러다 이성으로 끌리는 걸 도저히 부정할 수 없게 된 건 정확히 22살 가을, 생전 술 이라고는 입에도 대지 않던 민우가 입대하기 전 준영이란 이름의 여자친구랑 헤어지고 술이 떡이 되어 나를 찾아온 날이었다. 그는 나를 준영인지 뭔지로 착각해서 미친 듯이 키스를 퍼붓었는데, 수많은 여자를 만나 갈고닦은 기술로 준영이 아닌 엄한 나를 낚은 것이다.


그날 이후 욕심이 생겨버린 나는 예전처럼 민우와 편하게 지낼 수 없었고, 나한테 키스 한 사실조차 기억 못 하던 민우는 내가 왜 자신을 피하는지 이유도 모른 채 입대했다.


그가 입대한 후 위문편지 조로 일주일에 한 번씩 여러 신문사의 만평을 오려 보냈는데 그는 단 한 번도 답장하지 않았다.


첫 휴가를 나와 학교로 찾아온 민우에게 답장을 안 한 이유를 물어보았다. 그는 직접 쓴 편지도 아닌데 무슨 답장을 하냐며 퉁명스레 대답했다.


군대 간 남자치고 표정이 하도 밝기에 준영이랑 다시 만나는 거냐고 묻자 민우는 그게 누구냐고 되레 물으며 대답을 회피했다.


나는 그 후로도 계속 만평만 오려 보냈고, 그는 답장을 안 했으며, 우리는 휴가 때 가끔 만나 간단히 안부를 주고받았다.


그가 제대할 무렵, 나는 파주로 갑자기  이사하게 되었고, 그 후로는 말 못 할 사정으로 민우와 거의 연락을 끊고 살게 되었다.


2년이 흘러 내가 다시 서울로 오게 되었을 때 얼결에 민우가 사는 동네로 이사하게 되면서 예전처럼 자주 만나게 되었지만 아쉽게도 그때는 민우에게 여자친구가 있었다.


이렇게 늘 가까운 듯 먼 듯, 친구인 듯 아닌 듯했던 우리는 지금도 부부인 듯 아닌 듯 애매하다.


나는 이 애매함을 더는 견딜 수 없다.


나를 미치도록 사랑해서 한 연애와 결혼이 아니란 걸 알기에 사랑한다는 말을 한 번도 안 한 걸 문제 삼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서운하긴 하다.


서운하면서도 궁금했다.


왜 나와 결혼했을까?


뭐 하나 아쉬울 것 없던 중1 남학생이 따돌림받던 여학생에게 잘해 준 이유는 뭘까?


가장 궁금한 건 십몇 년을 친구로 지내던 내가 뜬금없이 사귀자 했을 때, 그리고 사귄 지 두 달 만에 결혼하자 했을 때 망설이지 않고 흔쾌히 승낙한 이유다.


사실 내가 민우에게 충동적으로 결혼하자 말한 날은 나 혼자 몸 달아 연애하자 한 것이 못내 속상했던 날 중 하루였고, 기왕 자존심 접고 연애 걸은 거 하고 싶은 거 다 해 보련다, 마음먹은 날이었다.


지금도 그날의 내 행동을 회상하면 얼굴이 홧홧해지고, 도대체 무슨 용기로 그랬을까 헛웃음만 나온다.


“십몇 년 봐 온 사이에 연애는 좀 시간 낭비 같아. 뭘 더 알아가야 할 사이도 아니고.”


민우가 빙그레 웃었다. 내 속을 이미 다 아는 양.


“요는?”


“결혼이나 할까?”


“그러지 모.”


황당해하며 거절할 것을 예상하고 일부러 장난처럼 내뱉었는데 그는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승낙해 버렸다.


내 청혼을 기다렸다는 듯 한 번에 오케이.


“언제가 좋아?”


스케줄을 묻는 민우는 평소에 볼 수 없는 진지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꺼내 달력을 보기 시작했다.


예상 못 한 반응이라 나는 잠시 당황했다.


그러다 이 모든 것이 장난이고, 아주 못 돼먹은 농담이라는 것, 그러니까 박민우만의 방식으로 날 조련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원치 않는 일을 맞닥뜨리면 상대가 스스로 그 상황을 철회하도록 더 강한 수를 두곤 하는데 바로 그 작전을 쓴 것이다.


이렇게 무안한 방식으로 거절하다니. 아무리 터무니없어도 내 스스로 청혼을 철회하도록 하는 건 너무한 거 아닌가.


“하여간 못됐어. 이렇게 죄 이겨 먹어야겠어?”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야?”


“장난도 이겨 먹어야 직성이 풀리지? 놀라는 모습 한번 보려고 장난 좀 쳐봤더니 한술 더 뜨긴.”


내 말을 듣는 그의 표정이 묘했다.


화가 난 건가, 김이 빠진 건가. 여하튼 곱지 않은 눈빛이었다.


“장난···이었어?”


“장난이지, 그럼.”


“난 또 괜히 진지 해버렸네.”


그가 핸드폰을 다시 바지 뒷주머니에 넣었다.


“되게 무안 주네. 결혼 얘기는 이제 장난으로도 안 해!”


민우는 미간을 심하게 우그러뜨린 채 대답이 없었다. 인상을 쓰니 코가 더 날카롭고 길어 보였다.


왜 이러는 걸까.


감히 누구를 놀려 먹는 거냐고, 사귄 지 두 달 만에 웬 헛소리냐고, 그리고 자신은 철저한 비혼주의인 걸 모르냐고 할 줄 알았는데. 나의 예상과 달리 그는 말없이 한참 생각에 잠겨 있었다.


굳게 다문 입술, 찡그린 눈매. 분위기가 하도 냉랭해서 나도 그냥 가만히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말없이 꽤 오랜 시간 어색하게 앉아 있었다.


“난 장난 아니었는데?”


그가 정적을 깨고 던진 말은 현실감이 없었다.


“뭐?”


“넌 왜 그런 실없는 장난을 해?”


“······?”


“왜 그런 장난을 하느냐고.”


나를 몰아세우는 이유가 계속 골리기 위함인지 아니면 진짜 화가 난 건지 알 수 없어서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정말로 화 나 보이긴 했지만, 혹시 이것도 쇼의 연장인가 헷갈리기도 했다.


보아하니 쇼는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면 왜 이렇게 진지하게 화를 내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말도 안 되는 청혼이긴 해도 대차게 까인 건 나인데 왜 자기가 열을 내는지, 결국 나보다 더 짓궂은 방식으로 본때를 보였으면서 왜 억울해하는지. 나도 슬슬 화가 차올랐다.


“장난이 아니라고? 영화 보러 가는 날 정하는 것도 아니고 당장 핸드폰 꺼내서 언제가 좋아? 이게 장난이 아님 뭐야?”


“장난··· 아니었다잖아.”


낮고 차분한 목소리.


그는 간혹 이렇게 소름 돋게 차가운 얼굴로 화를 내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이 사람이 누구인지, 내가 아는 박민우가 맞는지 어리둥절했다.


“마지막으로 묻는 거니 똑바로 대답해. 결혼하자는 거 장난이었어, 진심이었어?”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귀 언저리에서 터질 듯 고동치는 심장 박동수만 세고 있었다.


“장난이었다 이거지? 알겠어.”


그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가방을 메고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반반이었어. 장난 반, 진심 반.”


나는 민우의 뒤통수에 대고 크게 소리쳤다.


그는 잠시 멈춰 서는 듯하더니 뒤도 안 돌아보고 다시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진심이 훨씬 더 컸어!”


내가 다시 소리쳤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멀어져 갔다.


“진심이었어!”


왠지 모르게 다급해진 나는 결국 속마음을 다 보이고 말았다.


발걸음을 멈춘 민우가 몸을 돌려 다시 돌아와 내 앞에 섰다. 약이 올라 미칠 것 같았다.


“재수 없는 놈.”


나는 독이 바짝 올라 그를 노려보았고, 민우는 핸드폰을 다시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선영이 누나? 지금 바빠요? 저 잠시 가도 돼요? 아니, 누나 서명이 좀 필요해서요. 지금 구청에 들러서 서류 준비해서 가면 1시간쯤 걸릴 거예요.”


그는 갑자기 내 손을 잡더니 일어나라고 눈짓했다.


“진영이랑 혼인신고 하려는 데 아시다시피 증인이 필요해서요.”


나는 너무 깜짝 놀라 그의 어깨를 주먹으로 때렸다.


“미쳤어?”


어이없는 그의 행동을 막기 위해 전화기를 뺏으려 했지만, 손이 닿지 않았다.


“결혼은 원래 이렇게 정신없이 해야지, 안 그럼 못해요. 오늘 누나 서명받고, 가능하면 제 친구 서명도 받아서 내일 바로 제출하려고요. 당연히 진영이도 알지요. 진영이가 하재서 하는 건데.”


그가 곁눈으로 나를 힐끗 바라보았다.


이게 고약한 장난이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인가. 언니까지 끌어들여 나를 창피 주려는 심보였다. 지나치게 선을 넘는 건 내가 아니라 민우였다.


“누나, 저 지금 구청에 가야 하니 이따 집에서 얘기해요!”


그가 전화를 끊고 어안이 벙벙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그의 핸드폰을 빼앗아 언니와 진짜 통화한 것이 맞는지 통화내역을 확인했다.


그는 정말로 언니와 통화했다.


“돌았어?”


“왜? 뭐?”


“장난도 유분수지!”


“장난 아니라고 했지?”


다시 심각해진 그의 표정. 왜 저렇게 우기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장난이 아니면? 이게 다 뭐 하는 짓이야?”


“결혼하자며?”


“누가 이렇게 하재?”


“우리 집 유별난 건 알지? 난 그 유별남이 진저리 치게 싫어. 게다가 결혼한다고 사람들 북적이고 친하지도 않은 사람들 만나 부자연스럽게 인사하고, 사진 찍는 것도 질색이야. 결혼은 그냥 당사자끼리 약속하면 족하다고 생각해.”


“정말 이게 장난이 아니란 거야?”


“몇 번을 말해야 해?”


“라스베이거스에서 술김에 하는 결혼도 아니고··· 뭘 이렇게 충동적으로 해?”


“장난처럼 말했지만 이미 충분히 생각하고 고민하다 어렵게 꺼낸 말 아니었어?


“난 그렇지만··· 넌 아니었을 거 아냐?”


“알다시피 난 결혼엔 관심 없어. 그런데 만약 하게 된다면 너랑 해야겠다, 뭐 그런 생각은 늘 하고 있었어.”


“···왜?”


“우유 때문에.”


“우유라니?”


“네가 초등학교 3학년 때 맨날 나한테 우유 줬었잖아. 그때 결심했었어. 너랑 결혼해야지 하고.”


“지금 농담할 때야?”


“뭐 어쨌든, 신부인 네가 웨딩드레스 입고 주례사 들으며 지루한 시간 보내고, 생전 다시 볼 일 없는 친지들, 친구들 만나 사진 찍는 거 원하면 해야겠지만 네가 서운하지 않다면 난 그냥 혼인신고하고 우리끼리 언약식만 했으면 해.”


“아무리 그래도··· 나야 부모님도 친척도 없지만 넌 아니잖아. 집안 어른들이 가만히 계시겠어?”


말하는 도중에 깨달았다.


이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결혼할 수밖에 없는 건 순전히 나 때문이란 걸.


내가 그 대단한 민우네 집안 어른들 눈에 찰 리 만무했고 그분들의 허락하에 축복받는 결혼식을 한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민우는 그걸 알고 있었고, 승산 없는 싸움에서 내가 상처받는 걸 막아주려는 의도였다.


“내가 원해서 우리 집에 태어난 것도 아닌데. 그동안 나도 충분히 힘들었어. 이젠 그만할래.”


어떻게 저리 쉽게 결정하는지, 그는 마치 이날만 기다려온 사람처럼 그를 향한 집안의 기대와 사랑을 툭툭 잘라내 버렸다. 하필 그 칼이 내가 된 것이다.


“난 양가 어른들 만나고 어쩌고··· 그런 것도 싫어. 너만 좋다면 선영이 누나랑 몇몇 친구들 모아놓고 조촐하게 했으면 좋겠어.”


원래도 추진력이 굉장한 사람인 건 알았지만 이렇게 화끈하게 밀어붙일 줄은 몰랐다.


그의 의지대로 우리는 다음날 구청에 가서 혼인신고를 했고, 그날 바로 속초로 신혼여행을 떠났으며, 친구였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사람들처럼 남자와 여자가 되었다.


그는 우리가 이렇게 남녀로 잘 정리된 것은 모두 자신의 덕이라고 했다.


“오랫동안 친구였던 남녀가 연인이 되면 어색해서 쭈뼛거리게 돼. 그럼 그때부터 튼 거야. 이게 사랑이 맞나 우정 아닌가 머리가 복잡해지면 답이 없어. 시작하는 순간 예전 관계는 다 지우고 그냥 확 저질러야 해. 이성, 감정 이런 거보다 몸이 앞서야 한다는 거지.”


그는 엉큼한 표정으로 느끼하게 웃었다.


친구로 알아 온 시절의 박민우와 남편이 된 박민우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얘가 왜 이리 하루아침에 변했나, 이렇게 노골적인 면도 있었나 순간순간 놀라웠다.


“여자를 그렇게 무수히 만나더니 이쪽으로 도가 텄구나.”


“부부 사이에 그런 말은 실례야.”


“너 그동안 결혼하고 싶어 안달 났는데 참은 사람 같아. 비혼주의 그거 다 뻥이지?”


“무슨 소리? 결혼은 네가 하자 해서 한 거야.”


“네가 더 신나 보여.”


“이거라도 해야지.”


생각에 잠기게 하는 말이었다.


기분도 상당히 나빴다.


무슨 의미냐 물으려다 그의 대답에 상처받게 될까 봐 두려워서 묻지 못했고, 노력이라도 해서 내 자존심을 지켜주겠다는 의미로 추측하고 말았다. 마음이 작으니 최선이라도 다하겠다는 의지···


반짝이던 신혼 때는 잊고 있던 이 말은 결혼한 지 5년쯤 지난 어느 날, 갑자기 내 머릿속에 다시 떠올랐다.

꽁꽁 묻어 둔 응어리가 시련의 침식으로 몸통을 드러낸 것이다.


그때부터였다. 내 결혼은 사랑이 아닌 의지와 노력으로 시작해서 유지되고 있다는 생각은 시간이 갈수록 나를 더욱 외롭게 만들었다.


그래서였나?


언제부턴가 나는 남편에게 나와 결혼한 이유를 묻기 시작했다. 결혼 후 여러 번의 아픔을 겪으면서 부부라기보다는 동거인에 가까운 관계가 되어버린 후 생긴 버릇이었다.


애먼 질문을 대하는 민우의 반응은 늘 회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 물었는데 그 이유는 민우의 마음을 알고 나면 그와 나, 우리 관계에 드리운 이 애매함이 조금은 정리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것이 긍정적인 방향으로든 부정적인 방향으로든.


나는 눈앞에 흐르는 강물만 바라보고 있는 남편에게 결국, 이 질문은 또 했다.


“우유 때문에 했다니까.”


이번에도 변함없이 우유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내 급식 우유 덕에 자기가 이렇게 잘 큰 거라는 둥, 그래서 그때부터 날 반려자로 찍었다는 둥.


“내가 그 농담하지 말랬지?”


민우의 눈은 여전히 강물에 고정되어 있다.


“진짠데. 정말 우유 때문에 한 건데.”


“짜증 나!”


내가 화난 걸 눈치챈 민우가 진지한 어투로 되물었다.


“사귀고 결혼하는 이유는 하나지, 뭐 다른 게 있어?”


우유로 끝나지 않고 이렇게 첨언한 건 처음이다.


“있지. 많지.”


민우는 피식 웃더니 또 말없이 강물만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조심하는지. 내가 대답을 강요하지 않는 한 이번에도 또 얼버무릴 게 뻔하다.


“내가 하도 졸라서?”


“네가 언제 졸랐다고 그래.”


“다 내가 먼저 다가간 거잖아.”


“그래서 고마워하고 있어. 네가 대신해 줘서.”


긴 세월 우리 사이에 쌓인 우정이니 정이니 하는 온갖 감정들 때문에 딱히 사랑이라는 감정을 못 느끼다 결혼한 거니 사랑 고백 따위는 기대하지 않지만 나는 좀 더 직접적인 대답을 듣고 싶다. 행간을 스스로 파악하지 않아도 되는 대답으로.


“말 그대로야. 내가 못하는 거 대신해 줘서 고맙다고.”


“왜 만날 못 알아듣게 말하는 거야?”


“그러는 넌 왜 말을 해도 믿질 않는 거야?”


대화는 또 끊겼다.


어느새 비도 그쳤다.


묵묵히 있던 민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좋으니까 한 거야. 다른 이유는 없어.”


더 이상 가지 말라는 듯 차고 냉정한 목소리로 내가 원하는 직접적인 대답을 해주었다.


처음 듣는 대답이라 트집 잡고 싶지는 않지만 귀찮아서 억지로 내뱉은 듯한 말속에 도무지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쯤 되니 나도 오기가 났다.


“좋아서 했다고? 혹시 나이가 찼는데 새로운 사람 만나기 귀찮아서 했어? 아님 안정된 가정을 꾸리고 싶어서? 것도 아님 집안 어른들이 하도 결혼하라고 귀찮게 해서?”


내 질문에 민우가 나를 응시했다.


나를 그윽하게 바라보는 그의 눈은 왠지 모르게 나를 보는 것 같지 않다. 그래서 하는 말조차 진실로 들리지 않는 걸까.


“네가 말한 이유 중 단 하나라도 우리한테 해당하는 게 있어?”


생각해 보니 한 가지도 없다.


애초부터 비혼 주의였던 민우는 미친 듯이 글만 쓰다 화끈하게 죽어버릴 거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고, 집안 반대를 피해 몰래 우리끼리 결혼했으니 어른들 성화 때문도 아니고, 안정된 가정을 꿈꿨다면 나처럼 정서적으로 불안한 사람을 택하진 않았을 것이다.


“한 개도 없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결혼했고 그 많은 아픔을 겪고도 지금 함께 있어. 그럼 남은 건 뭐겠어?"


"......?"


"세기의 사랑!”


또 어물쩍 장난스럽게 빠져나가려 한다.


난 그의 대답에 피식 웃고 말았다. 아직도 저 얼굴과 말솜씨에 지고 사는 내가 나도 참 한심하다.


내가 전의를 상실하고 웃어 버리자 민우가 화제를 냉큼 돌려버렸다.


“너도 욕실을 들여다보던 남자가 듀끌로 씨라고 생각하고 있지?”


“아닌 것 같아.”


“···왜?”


"듀끌로 씨 키로는 우리 창문에 닿을 수가 없어."


"아."


"게다가 그 사람이 한 말도 있고.”


“무슨 말을 했는데?”


“우리 집을 염탐하는 키 큰 동양 남자를 봤대.”


“키 큰··· 동양 남자?”


남편도 꽤나 놀란 눈치다. 혹시 민우도 그 사람이 떠오른 걸까?


이 얘기를 들었을 때 내 머릿속에 스쳤던 사람이 민우의 머릿속에도 떠오른 것 같아 뜨끔했다. 요새 종종 그 남자가 생각나곤 하는데 그때마다 왠지 민우도 그를 떠올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듀끌로 씨한테 모임 때 찍은 단체 사진을 보여줬더니 너랑 영진 씨 중 한 명 같다더라. 하나도 안 닮았는데.”


심각하게 얘기하는데 남편은 또 딴청을 부리기 시작했다.


듀끌로 씨를 믿지 않기 때문에 그 사람 말 따위는 들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나에겐 중요한 문제라 얘기하는 건데···


결국 남편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또 다른 주제로 말을 돌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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