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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모아 Aug 23. 2024

[3화] 진영 이야기 - 윗집 남자의 비밀

<연재소설> 비밀의 부부

희미한 조명을 업고 거대해진 손 그림자가 고양이가 아닌 내 목을 향했다.           


그는 내 목을 움켜쥔 뒤 줄넘기를 두 번 감아 한쪽 끝에는 고양이를, 다른 끝에는 나를 매달은 줄을 어깨에 둘러메고 한꺼번에 위층으로 끌고 갔다.           


목이 졸린 채 끌려가는 내가 발버둥 치는 소리에 남편이 나오진 않을까 기다렸지만, 우리 집 문은 열리지 않았다.           


순식간에 고양이와 나는 윗집 거실 바닥에 내팽개쳐졌고, 나는 줄넘기에 목이 졸려 숨을 쉴 수도, 움직일 힘도 없었다.          


고통 속에 바닥을 나뒹구는 데 검은 실루엣이 내 몸을 덮치더니 목을 더 강하게 조르기 시작했다.           


목을 조르는 남자는 분명히 내가 아는 사람인데... 누구더라... 가슴이 답답해서 죽을 것만 같다.          


“정신 좀 차려봐. 무슨 꿈을 꾸기에 이렇게 땀을 흘려?”          


간신히 눈을 뜨자 뿌연 시야 안으로 수심 가득한 남편의 얼굴이 들어왔다.          


지난밤, 때마침 현관문을 열고 나온 남편 덕에 나는 큰 변을 당하지 않았다. 하지만 집에 들어온 후 복도에서 있었던 일을 남편에게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밤새 쫓기고 숨고 도망치는 악몽을 꾸었다. 긴장하고 잔 탓에 온몸이 쑤시고 머리도 지끈거렸다.          


“오전 강의만 하고 오후 강의는 캔슬해 볼게.”          


남편은 급히 가방을 챙겨 들었다. 내가 깰 때까지 기다린 모양이다.          


“괜히 혼자 나가지 말고 내가 올 때까지 집에 있어.”          


남편은 가방을 들었다 놨다 몇 번을 망설이다 다시 한번 꼼짝 말고 집에 있으라고 당부한 후 집을 나섰다.


         

어젯밤 잠들기 직전까지 곱씹던 의문이 다시 밀려온다.          


듀끌로 씨는 왜 다시 돌아왔을까. 왜 짐도 없는 빈집에서 불도 안 켜고 숨어 지내고 있는 걸까. 대체 이 추운 겨울에 알몸으로 복도를 돌아다닌 이유는 뭘까. 가장 궁금한 건 예전에는 길고양이처럼 풀어놓고 키우던 흰둥이를 줄넘기로 매어 놓은 이유다. 하네스도 아니고 줄넘기로...           


이 모든 ‘왜’에 대한 답을 가진 듀끌로 씨는 지금도 우리 집 천장 위에 있을까. 알몸의 듀끌로 씨가 나를 발견하기 전에 남편이 문 열고 나오지 않았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어쩌면 어제 일을 해명하기 위해 그가 찾아올 수도 있다. 갑자기 섬찟한 기분이 들어 집에 있을 수가 없다. 나는 급히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현관을 여는 순간 건물 입구 유리문 앞에 서 있는 듀끌로 씨와 눈이 마주쳤다. 당황해서 집으로 들어가려다 이 별채 건물에 그와 나, 단둘만 남는 상황은 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침착하게 현관을 잠그고 아파트 입구로 걸어갔다. 듀끌로 씨는 들어오고 나는 나가는 찰나.          


“오랜만입니다.”          


그가 어색하게 인사하며 내 가방을 보았다.          


“외출하세요?”          


나 역시 그의 시선을 피하려 바닥에 시선을 두었다.          


“네.”          


“어젯밤에 드디어 남편분과 첫인사를 나눴는데, 제가 좀···”          


그가 알몸이었던 건 정말 사실이었나 보다. 남편이 날 골탕 먹이려고 거짓말 한 걸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전 이사 가신 줄만 알았어요. 짐도 다 나가고···”          


“아내와 아이들만 갔어요.”          


“네?”          


“3주간 출장 갔다가 오니 떠나고 없더군요. 어디로 갔는지도 모릅니다.”          


“아···”          


예상 밖의 소식에 할 말이 없어졌다. 얼마나 충격받고 상심했을까. 사정을 알고 나니 지난밤 소동도 얼핏 이해된다. 나 같아도 그런 일을 당하면 반쯤 미쳤을 것이다.          


“혹시··· 어디로 간지 아십니까?”          


뚤루즈. 온 거리에 핑크빛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는 낭만적인 곳.          


대답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감이 서질 않았다. 몰래 떠난 사람이 나쁜 건지, 몰래 떠나게 한 사람이 나쁜 건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람의 입장을 택했다.          


“죄송합니다. 저는 잘···”          


“아닙니다. 제가 죄송합니다.”          


그러고 싶지 않은데 자꾸 듀끌로 씨의 나신이 다양한 버전으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간유리 뒤 하얀 엉덩이와 껌뻑이는 두 눈까지도.          


“그럼 빈 집에서 지내시는 건가요?”          


“그런 셈이죠. 버리려 했던 매트리스만 하나 남기고 갔네요. 제 옷이랑 물건들은 왜 다 가져갔는지··· 골라내는 것도 귀찮았나 봅니다.”          


“···상심이 크시겠어요.”          


“네. 많이 힘드네요.”          


“전 윗집에 누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집에 아무것도 없어서 와인 바를 하는 친구가 가게 문을 닫을 때까지 그곳에 있다가 새벽녘에 들어와 잠만 자고 있어요.”          


“아 그렇군요.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빌려 드릴게요.”          


매트리스밖에 없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빌려준다는 말은 별 도움이 안 될 걸 알면서도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선뜻 언제든 우리 집으로 오라고 할 수는 없다. 나체로 집 밖을 돌아다니는 남자를 내 집에 들이는 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의 기이한 행동을 정황상 이해할 수는 있지만 수용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이제 저도 곧 집을 비워줘야 합니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네요.”          


이 무거운 고민에 나는 어떤 말로 위로해야 하나. 그냥 나처럼 전화 한 통 걸면 해결되는 문제를 묻는다면 쉬웠으련만.           


나는 그에게 딱히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어 난감했다. 그동안 도움받은 걸 생각하면 이러면 안 되는데. 어색한 침묵이 시작되었다.          


“혹시 바쁘시지 않으면 커피 한잔 함께 하실 수 있으세요?”          


갑작스러운 그의 요청에 무척 당황스러웠다.          


“지금···요?”          


“네.”          


오랜 시간 고마운 사람이었으니 거절할 수만은 없지만 단둘이 있는 건 여전히 꺼려진다. 나는 남편이 있는 시간에 그를 초대하는 대안을 생각해 냈다.          


“제가 먼저 청했어야 하는 데 죄송해요. 혹시 오늘 저녁 식사를 함께하는 건 어떠세요? 그간 신세를 많이 졌는데 한 번도 초대 못 한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거든요.”          


그는 예상외로 난색을 내비쳤다. 그도 그럴 것이 알몸으로 첫인사를 나눈 사람과 한 식탁에서 식사하는 건 편한 일이 아닐 것이다.          


“초대는 감사합니다만 저는 지금 따뜻한 차 한잔이면 됩니다.”          


“아. 네···”          


나 역시 난처한 내색을 내보였다.           


내가 망설이자 그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괜히 곤란하게 만들었군요. 맘 쓰지 마세요. 그럼. 이만.”          


그가 위층으로 향하는 나선 계단으로 발을 돌렸다. 하는 수 없이 나는 그의 청을 받아들였다.          


“집이 어수선하긴 한데 잠시 들어오실래요?”          


나를 돌아보는 듀끌로 씨의 얼굴이 환해졌다.          


“오늘 당신을 만나지 않았으면 저는 무슨 일을 저질렀을지도 몰라요. 정말 우울했거든요.”          


그가 계단을 내려왔다.           


나는 우리 집 현관 쪽으로 향하며 가방에서 열쇠를 꺼냈다.           


듀끌로 씨가 다시 입을 열었다.          


“참. 일전에 당신 집을 기웃거리는 키 큰 동양 남자를 봤어요. 창문 안을 살피고, 테라스 쪽을 유심히 들여다보더라고요.”          


열쇠 돌리던 손을 멈추었다.           


심장 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한다.          


“뭐라고요?”          


“처음엔 지나가던 행인이 한번 들여다보는 건 줄 알았는데. 몇 번이나 반복해서 그러길래 말씀드리는 거예요.”          


“몇... 번?”          


“네. 한 번은 멀리 서서 그냥 집 주변만 살피다가 그다음에는 테라스 울타리까지 와서 안을 들여다보더라고요. 아주 유심히.”          


“키 큰 동양인이었다고요?”          


“네. 키가 아주 크고 날씬하고 눈썹이 짙었어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갑자기 어학원을 그만둔 남편의 동료 강사가 떠올랐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듀끌로 씨에게 사진을 보여주었다. 한국 사람들 모임에서 찍은 단체 사진이었다.          


“혹시 이 중에 닮은 사람이 있나요?”          


듀끌로 씨는 미간을 오므리며 사진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세상에. 제 눈에는 다 비슷해 보이네요. 근데 첫 느낌으로는 이 사람이랑 이 사람 중 한 명 같은데···”          


듀끌로 씨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사람은 공교롭게도 내 남편과 9월 초 개강을 앞두고 갑자기 퇴사해 버린 남편의 직장 동료였다. 키가 큰 점을 빼면 전혀 닮은 구석이 없는 두 사람이었다.           


완전히 다르게 생긴 둘을 헷갈려하면서 고르니 그의 말에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본 것이 아니라 그가 한 일이 아닐까 하는 의심···          


자정이 넘은 밤 알몸으로 공동 구역을 나다닌 것과 고양이 목에 줄넘기를 매어 놓은 것, 그리고 가족들이 이 남자만 두고 야반도주한 것 등, 뭐 하나 정상적인 일이 없지 않은가? 혹시 의심을 피하려고 먼저 선수 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 듀끌로 씨가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던졌다.          


“앞으로 볼레(Volet)를 잘 내리셔야겠어요.”          


“네?”          


“샤워할 때 말이에요.”                  


볼레. 샤워. 그는 나의 반응을 보고자 우리 둘만 아는 그날의 시그널을 넌지시 던지는 것이 분명하다. 핏속에 숨어있던 수천 개의 날카로운 바늘이 정수리 끝에서 발뒤꿈치로 흘러내리는 느낌이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 입가에 스민 조소.  지금 내 앞의 그는 더 이상 내가 알던 듀끌로 씨가 아니다.       

          

나는 열쇠 구멍에서 열쇠를 빼 다시 가방에 넣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안될 것 같아요.”          


싸늘해진 내 태도에 듀끌로 씨의 얼굴도 굳어졌다. 경멸에 찬 내 시선에 무척 당황한 눈치다.          


“제가 무슨 실수라도 했나요?”          


“그런 식의 충고는 유쾌하지 않습니다.”          


“아. 네. 제가 실례를 했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나는 악수를 청하는 듀끌로 씨의 손을 외면하고 아파트 건물을 급히 빠져나왔다.           


등 뒤로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숨이 차서 더는 뛸 수 없을 때까지 마구 달렸다.           


걷다가 뛰기를 반복하다 다리가 완전히 풀려 쓰러지듯 바닥에 주저앉았을 때 나는 이 도시를 가로지르는 벨(Vesle) 강 앞에 있었다.          





강 앞에 주저앉아 흐르는 물만 바라본 지 서너 시간이 흘렀다.           


듀끌로 씨의 말을 내내 곱씹고 있다.           


아까는 그가 견딜 수 없이 무섭고 끔찍했는데, 돌이켜 생각할수록 내가 너무 성급하게 판단하고 오해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키가 얼추 나와 비슷한 듀끌로 씨는 신장이 170센티미터가 안 될 테니 우리 욕실 벽에 까치발로 서도 창에 닿을 수 없다. 욕실 창이 있는 벽면에는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 있어서 키가 180센티가 넘는 사람만 욕실 창에 닿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너무 과민했다. 촉각을 세우고 의심거리만 찾다 보니 그냥 한 말을 크게 오해하고 과하게 반응한 것 같다.          


부슬부슬 겨울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바지가 흘러내려 엉덩이가 반쯤 노출된 남자가 낚싯줄을 드리우고 있다. 이 날씨에 뭐가 잡히긴 하는지, 바지는 왜 추켜올리지 않는지 궁금하다. 남자가 낚시하는 옆, 커다란 고목에는 낚시해도 되는 요일과 하면 안 되는 요일이 적혀있다. 푯말 상 오늘은 분명 낚시를 하면 안 되는 날이다.          


겨울비가 내리는 추운 날인데 반바지 레깅스 차림으로 조깅하는 사람들도 보인다. 카누를 타는 사람, 비를 맞으며 반려견과 산책하는 사람, 비닐 커버도 없이 유모차를 끌고 가는 젊은 엄마···       

   

나는 눈에 보이는 사소한 것들 하나하나를 내 기준으로 평가하고 있다.           


정상이다. 비정상이다. 보통이다. 정신이 나갔다.           


순전히 내 기준이고, 지나치게 엄격한 나만의 잣대다.           


어쩌다 이리도 많은 벽을 쌓게 되었을까.           


바지가 흘러내릴 수도 있고, 비를 맞으면서 조깅할 수도 있고, 아기가 비에 조금 젖는 것 따위는 크게 신경 쓰지 않을 수도 있는 건데.          


듀끌로 씨 역시 모든 짐을 싸서 떠나버린 가족들 때문에 여분의 옷이 없어서 알몸이었던 걸 수도 있고, 그냥 한밤중 혼자 있는 집에서 나체로 있는 것이 편해서 그랬을 수도 있고, 늦은 밤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문을 열었는데 고양이가 밖으로 나가서 급하게 따라 나오느라 옷을 못 챙겨 입었을 수도 있고... 이해하려면 이해 못 할 상황이 아니다.          


나에게 내내 친절했던 사람을 성급하게 평가하고 무례하게 대했다는 생각이 들자 새로운 의문이 생긴다.      

     

듀끌로 씨가 진실을 말한 거라면 우리 집을 염탐하는 사람이 정말 있다는 건가.           


우리 집 주변을 맴도는 키 큰 동양 남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왜 우리 집을 염탐하는 걸까.      


불안감이 다시 엄습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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