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옷이 없으면 급히 한 두벌 사지. 아무리 부인이 짐을 다 들고 떠났어도, 그 이튿날도 아니고 어쩔 수 없이 알몸으로 있었을 거라 가정하긴 어렵지 않나?”
일주일 전 일에 아직도 사로잡혀 있는 내가 답답했는지 남편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럴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겠지. 가족들한테 배신당한 거잖아. 옷 살 정신 상태가 아니었을 거야.”
“뭘 자꾸 추측해? 그냥 지나간 하나의 해프닝이고, 우리 일도 아닌걸.”
“사실 이해하려면 이해 못 할 것도 없잖아. 그렇지 않아?”
“이해를 왜 해?”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단호하게 대꾸했다.
“그렇게 이상하고 나쁜 사람이라면 2년간 나를 도와줬을 리가 없어.”
이 말이 남편의 심기를 건드렸나 보다.
“그냥 피하면 될 걸 넌 왜 이렇게 그 남자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걸까?”
“뭐?”
“대체 넌 언제쯤 정신 차릴까?”
“······?”
“아직도 남자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은 네가··· 나는 좀 신기해.”
그의 시선이 내 왼손 약지의 화상 흉터로 향했다.
남편 말의 의도를 알아 버린 나는 손을 슬그머니 테이블 아래로 감추었다.
살면서 저지른 수많은 과오 중 가장 잊고 싶은 사건마다 모조리 목격한 민우와 결혼한 것을 또 한 번 후회하면서.
어쩌자고 그 모든 일을 아는 남자를 좋아해서 결혼까지 한 걸까.
한 번도 내색하지 않기에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잊고 싶지만 잊을 수 없는 건 그도 나와 같을 것이다.
나의 마음을 읽은 남편이 피식 웃으면서 장난스레 눈을 흘겼다.
“질투 난다고.”
나는 달리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그냥 웃고 말았다.
“딴 사람 이해하려고 애쓰지 말고 그냥 나만 열심히 이해해 줘.”
흰 셔츠 위에 회색 니트를 입고 말끔하게 머리까지 손질한 그가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와인잔을 들었다.
오랜만에 보는 댄디한 모습.
나이는 나만 먹는 것 같아 억울하다.
듀끌로 씨의 알몸 쇼 덕분에 우리는 화해하게 되었고, 고급 정찬을 먹으러 레스토랑에 왔다. 출판사에서 계약금을 받은 남편이 한 달 전에 예약해 둔 미슐랭 별 세 개 레스토랑이다. 예약을 취소하려다 극적인 화해로 아슬아슬하게 올 수 있었다.
“우릴 도와준 고마운 사람인 건 아는데 그래도 앞으로는 좀 멀리해야 할 것 같아. 이제 너도 불어가 능숙하니 그 사람 도움이 필요하진 않잖아.”
바로 그 포인트가 내가 괴로운 이유다.
왜 하필 지금 이 시점이냐 말이다.
내가 언어 소통이 되어 그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게 된 지금, 반대로 그는 인생에서 가장 힘든 순간일 수도 있는 이 시기에 그를 외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날 괴롭게 한다.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여러 생각들로 듀끌로 씨를 외면하고 있지만, 이용 가치가 없어져서 멀리하는 건 아닌데, 이유야 어찌 되었든 딱 그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개인적인 공간에서 하는 그의 사적인 습관을 내가 옳다 옳지 못하다 평할 수는 없지만 내 기준으로 이상해 보이는 행동을 하는 걸 안 후에는 아무래도 예전처럼 그를 편히 대할 수가 없다.
“그날 이후 위층에서 아무 소리도 안 나는 게 이미 떠난 것 같아.”
“그랬을 수도.”
민우는 잔을 휘휘 흔들어 가라앉은 와인 향을 불러냈다.
“그런데 정말 그때 듀끌로 씨를 처음 본 거야?”
“오다가다 멀찍이 마주치긴 했었겠지. 그런데 직접 인사를 나눈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
프랑스에 온 뒤 남편은 강의가 있는 날에만 잠시 외출했다가, 집에 있을 때는 방에서 두문불출 글만 쓴다. 강의가 없는 시기에는 어김없이 소설 출간이랄지 출판 관계자 미팅 등으로 한국에 장기간 체류하거나, 집필을 목적으로 훌쩍 여행을 떠나버리곤 하니 그는 연중 절반은 집에 없는 셈이다.
물론 나에게 늘 같이 가자고 제안하지만, 애 셋을 데리고 여행하는 건 보통 번거로운 일이 아니라 나는 그냥 아이들과 집에 남는다.
“놀랍다. 2년간 그렇게 여러 번 신세 졌는데 너랑은 인사한 적도 없었다니.”
나는 미슐랭 별 세 개짜리 음식이 담긴 접시 옆으로 포크와 나이프를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손대기 아까운 예술 작품이다.
“정말 안 먹을 거야?”
남편이 큰맘 먹고 예약한 후 한 달 내내 고대하던 음식이 눈앞에 있다. 몇 십만 원을 통으로 날릴 수는 없으니 한 입 정도는 먹어야 하는데...
반으로 커팅된 주먹만 한 화과자 모양의 빵 속에는 팥 앙금 대신 초록빛 시금치와 빨간 토마토, 살구빛 푸아그라, 핑크빛 비둘기 고기, 그리고 다시 초록 시금치가 가지런히 층을 이루고 있다.
핏기가 남아 있는 비둘기 고기 앞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나를 보고 남편이 입을 열었다.
“괜히 고문하는 꼴이 됐네.”
“비둘기를 먹는다는 것도 처음 알았는데, 덜 익혀 먹기도 한다니 좀 충격적이긴 해.”
“파리에 있는 중국 뷔페식당에는 박쥐 고기도 나오는걸.”
“내가 거기 갈 일은 없겠어.”
“오리 가슴살 스테이크(le magret de carnard)도 미디엄으로 먹었잖아.”
하얀 플레이트를 적시고도 모자라 포크로 누를 때마다 스며 나오는 붉은 혈이 오리 기름에 동글동글 미끄러지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래, 피가 흐르는 오리도 먹었는데 뭐.
얇은 빵 껍질 속에 푸아그라 이불을 덮고 얌전히 누워있는 비둘기 고기를 작은 크기로 썰었다.
어금니 사이에서 뭉개진 살코기 속에서 비릿한 피 맛이 올라왔다. 아무래도 이건 더 먹기 힘들겠다.
“피클도 없고··· 이 난감함을 뭐로 해결하라고.”
“와인을 곁들여봐. 말하자면 향수를 뿌리는 거지. 고기의 풍미가 살도록 와인 향을 바르는 거야.”
남편은 고기를 씹으며 와인을 한 모금 머금었다.
피를 닮은 와인을 살코기 속에 짓이겨 넣으려는 듯. 와인과 함께 육질을 씹으면 숨어있던 고기의 향이 새어 나온다며...
갑자기 양날이 시퍼런 면도칼을 손에 쥔 기분이다.
아주 오래전에 느꼈던 그 느낌.
왜 이런 섬찟함이 드는지.
나도 잔을 들어 와인을 한 모금 마셨지만, 그의 말이 와닿지는 않았다.
아이들이 번뜩 떠올랐다.
분명 이 음식을 좋아할 것 같다.
셋이 먹기는 턱없이 부족하겠지만 그래도 버리는 것보다 맛이라도 보도록 가져가는 게 나을 것이다.
웨이터를 부르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남편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귀까지 빨개져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하지 마.”
“뭘?”
“지금 하려는 거 하지 말라고.”
“내가 뭘 하려는데?”
“포장해 가는 거 하지 말라고.”
“······ 왜 하지 마?”
“분명히 말했다.”
남편의 표정은 비장하리만치 단호했다. 남은 음식 포장해 가려다 이혼당할 판이다.
“왜 그러는데?”
그는 뭐 때문에 화가 났는지 눈까지 벌게져서 나를 노려보았다.
“몰라서 물어? 나는 너 하나 살리자고 여기까지 와서 이러고 사는데, 넌 대체··· 내가 안중에나 있기는 하니?”
또 저 소리.
나 때문에 남편이 많은 것을 포기한 건 잘 알고 있다. 늘 몹시 고맙고 미안하기도 하다.
하지만 요새 자꾸 저 얘기를 하면서 내 숨통을 조이는 건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
“그래, 고마워. 늘 미안해하고도 있어. 외톨이였던 내 옆에서 오랜 시간 친구로 남아준 것도 고맙고, 언감생심 연애하자 했을 때 받아 준 것도, 결혼해 달라고 했을 때 흔쾌히 승낙한 것도, 미쳐가는 나를 포기하지 않은 것도 고마워. 근데 네가 이럴 때마다 난 정말 무기력해져. 하등 쓸모없는 사람처럼 느껴지거든. 너한테 걸림돌밖에 안 된다는 거잖아. 넌 늘 나에게 베푸는데, 난 아무것도 해 줄 게 없는 사람인 것 같다고.”
“그래서 네가 필요한 사람한테 끌리는 거야?”
“뭐?”
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민우를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내가 뭘 더 해야 우리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거니?”
그는 이내 무릎에 놓았던 냅킨을 의자에 던지고는 자리를 떠나버렸다.
웬만한 일에는 화도 안 내고 늘 차분했던 사람인데 얼마 전부터 저렇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안 그러다가 저러니까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닌가 걱정된다. 파킨슨병 같은 뇌 질환의 초기 증상이 감정 조절을 못 하는 거라던데······
그게 아니라면 결혼한 지 8년쯤 지나 권태기가 온 건가?
지금으로선 권태기가 가장 현실적인 원인일 것 같다. 그렇다면 나한테도 권태기가 왔으면 좋겠다. 서로 지긋지긋해져 버린 상황이라면 덜 서러울 테니까.
남편이 자리를 떠나고 잠시 멍해 있다가 그를 찾으러 나갔다. 리셉션 직원이 나를 보자 누구를 찾는지 아는 듯 입구 쪽을 가리켰다. 손짓한 곳으로 가보니 놀랍게도 남편이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간혹 담배를 사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긴 해도 절대 피우진 않았는데...
민우는 담배를 끊기로 나와 약속한 이후로 무섭게 그 약속을 지켰고, 약속 후 담배를 태운 건 고작 한두 번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고 3초, 엄마 장례식장에서 서럽게 우는 나에게 민우는 자기가 뭘 해주면 좋겠냐 물었었다. 나만 괴롭게 사는 것이 억울했던 때였고, 누구든 같이 괴로우면 덜 힘들 것 같아 담배를 끊으라고 했었다.
황당해하며 나를 바라보던 민우에게 정말 딱 죽을 것 같을 때는 피워도 된다고 첨언했다.
그는 즉시 담뱃갑을 주머니에서 꺼내 우그러뜨렸고, 숨이 넘어갈 것 같을 때만 피우겠다고 말하더니 담배를 휴지통에 버렸다. 그날 이후 그는 정말 담배를 태우지 않았다. 단 몇 번을 제외하고는···
아무리 화가 나도 나를 두고 가버릴 사람이 아니란 걸 알기에 자리로 돌아와 그를 기다렸다.
한참이 지나 자리로 돌아온 남편은 말없이 다음 코스인 치즈 플레이트를 숙제하듯 먹고, 그다음 코스인 디저트도 성실히 먹고, 커피까지 마셨다.
나도 안 넘어가는 치즈를 열심히 먹고, 지금까지 제공된 음식보다 더 많은 양의 디저트도 최대한 성실히 꾸역꾸역 목구멍으로 넘겼다. 내가 괴로운 만큼 그가 행복해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내가 예전의 불행에서 조금 벗어난 만큼 그는 조금 더 불행해진 것처럼.
언제부턴가 우리의 행복은 제로썸 게임이 되어버렸다.
남편이 레스토랑 입구에서 발레파킹(valetparking)한 차를 기다리고 있다. 깡마른 어깨에 걸쳐진 재킷이, 그의 뒷모습이 애잔하다.
구부정하게 서 있는 그의 뒤로 달려가 허리를 안았다. 등 뒤로 달려드는 내 힘에 휘청이던 남편이 허리에 감긴 내 손을 겹쳐 잡았다. 놀란 듯 뒤돌아보는 그를 볼 수가 없다.
“미안해.”
남편이 내 손등을 말없이 꽉 잡았다.
주차 요원이 차에서 내려 우리에게 다가와 차 열쇠를 건넸다.
민우가 열쇠를 받고는 허리에서 내 손을 풀었다.
“집에 가자.”
그는 말없이 운전했고, 슬퍼 보였다.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잔잔한 인공 운하에 커다란 배 대 여섯 척이 정박해 있었다.
“정말 이번에도 한국에 같이 안 갈 거야?”
그의 질문에 숨이 턱 막힌다.
“······”
“같이 가자.”
“······”
한 명이 입을 열면 한 명이 입을 닫는 대화.
“같이 가. 레지던스 알아볼게.”
“비행시간이 너무 길어서 애들이 힘들 거야.”
“정말 나는 안중에도 없는 거야?”
“내키지 않아.”
“이미 예약했어. 같이 가.”
프랑스에 올 때도 자기 맘대로 결정하고 통보하더니 여기 와서도 내내 이런 식이다. 이걸 해봐라, 저걸 해봐라. 그건 합리적이지 않으니, 차라리 이렇게 해라.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강요하는 그를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내게 뒤늦은 사춘기가 온 건가? 어쩜 이리 순식간에 감정이 돌아설 수 있는지. 그를 애잔해하던 십여 분 전 일이 십 년 전처럼 느껴진다. 이런 것이 결혼의 마력인 건지 아니면 우리 부부의 문제인 건지.
냉랭한 분위기 속에 아파트 주차 바리케이드 앞에 도착했다. 무슨 일인지 우리 집이 있는 별채 앞에 커다란 앰뷸런스 한 대와 경찰차 두 대가 서 있고, 여섯 명의 경찰과 하얀 부직포로 만든 우주복을 입은 사람들도 세 명이나 있었다.
순간 내가 가스 불을 안 끄고 나왔나, 우리 집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걱정이 되어 차에서 급히 내렸다. 들것을 든 두 명의 남자가 아파트 입구에서 나오고 있었다.
들것 위에는 크고 길쭉한 진회색 가방이 놓여 있었다. TV에서 종종 봤지만 실제로 본 적은 없었던 사람 크기의 가방···
앰뷸런스 옆으로 우리 레지던스를 관리하는 시립 부동산 담당자 마담 레스프리가 서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저는 여기 RDC에 사는 사람인데 건물에 무슨 일이 있는 건가요?”
“RDC에 사신다면 윗집 듀끌로 씨를 잘 아시겠네요.”
“네. 그분에게 무슨 일이 있나요?”
마담 레스프리는 불안한 듯 손을 덜덜 떨었다. 빨리 대답해 주지 않는 그녀가 답답하다.
옆에서 부산하게 지나다니는 경찰들과 하얀 올인원을 입고 걸어 다니는 사람들도 거슬린다. 아주 크고 중대한 일이 벌어진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