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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모아 Aug 27. 2024

[7화] 진영 이야기 - 염탐꾼의 정체 1

<연재소설> 비밀의 부부

밖으로 뛰어나와 놈이 내려간 비상구 계단에서 차마 내려가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데 지하 주차장 차량 출입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지하 주차장 출차 입구로 달려가 자동문 앞에 팔을 벌리고 비탈을 올라오는 차를 막아섰다. 꿀렁거리며 급정거한 차의 운전자를 보니  옆 동 1층 할머니였다. 그녀는 핸들을 잡은 채 놀란 두 눈을 부릅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할머니는 평소에도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걷는, 그러니까 쏜살같이 비상구 계단을 뛰어 내려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할머니의 차가 지하 주차장을 마저 올라올 수 있도록 길을 내어 주었다.


할머니는 지상으로 다 올라와 차를 잠시 세운 후 운전석 창문을 내리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놀라셨지요? 죄송합니다. 꼭 여쭐 게 있어서 무례를 범했습니다. 수상한 사람이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갔는데 혹시 보셨나요?”


백발의 할머니는 파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저으며 혀를 끌끌 찼다. 그녀가 투덜대며 무슨 말을 웅얼댔는데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할머니의 차가 출발한 후 나는 지하 주차장 출입문과 비상구 계단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서서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남편과 통화한 후에도 한동안 자리를 뜰 수 없었다.


민우는 놈이 이미 왼쪽 윙으로 올라가는 비상구로 도망갔을 거라고 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멀찍이 서서 계속 출차용 자동문과 비상구 계단을 동시에 주시했다.


낮이라 출입하는 차가 없었다.


몇십 분이 지나고 용기 내어 지하 주차장 비상구로 내려갔다. 공연한 호기심이 또 나를 위험에 빠뜨릴 것 같았지만 그냥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하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


계단을 내려가 주차장 안으로 들어가는 비상구 문을 열었다.


주차장 안으로 몇 발자국 옮기기도 전에 센서등이 켜졌고, 양옆으로 수동 여닫이문이 달린 개인 차고가 줄지어 모습을 드러냈다.


차고 중 절반은 문이 닫혀 있고, 절반은 열려 있다.


각 차고문에는 번호가 적혀있는데 우리 차고는 317번이고 반대편 별채인 왼쪽 윙으로 가는 비상구에서 가장 가까운 칸이다.


발소리를 죽이고 천천히 안으로 전진하며 열려 있는 차고 안에 사람이 있는지 조심스레 살펴보았다.


어느덧 제일 안쪽에 도달했다.


아무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왼쪽 윙으로 올라가는 비상구를 열고 밖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가 보았다. 한 번도 사용한 적 없어서 있는 줄도 몰랐던 비상구다.


계단을 다 올라갔을 즈음,


드르륵.


갑자기 지하 주차장 안쪽에서 차고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계단을 오르던 발이 멈추었다.


나는 다시 계단을 내려가 비상구 문틈으로 주차장 안을 들여다보았다.


문 앞 첫 번째 칸. 그러니까 317번 문이 열리고 누군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남편과 내가 처음 만난 건 열 살 때였다.


반에서 제일 작고 조용했던 남자아이와 골목대장 같던 여자아이.


나는 기억이 안 나지만, 내가 민우의 마니토였고, 그에게 조악한 선물과 쪽지를 주곤 했다고 한다.


그 당시 우리 집 사정에 뭘 사서 주긴 힘들었을 테니 집 안 어딘가 굴러다니던 것을 집어 갔을 것이다. 하필 엄청난 부잣집 도련님에게 말이다.


그 얘기를 들었을 때 난 어려서도 참 적극적이었구나, 그렇게 주책스럽게 다 표현했구나 싶어 어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었다.


민우는 4학년이 되기 전 봄방학 때 대구로 전학 갔고, 나도 그 이듬해 외할머니 병간호차 할머니가 계시는 청주로 전학 가면서 우리는 헤어졌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다시 예전에 살던 집으로 돌아오게 되면서 민우를 다시 만났는데 그는 훤칠하고 잘생긴 소년이 되어있었고, 나는 지독한 가정불화로 성격이 내성적으로 변해 있었다.


그를 다시 만났을 때, 이 박민우가 그 박민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미운 오리 새끼가 눈부신 백조로 역변했기 때문인데, 그 당시 너무 놀라서 대구 물이 그리 좋은가, 나도 대구에서 3년만 살다 왔으면 좋겠다 하고 생각했었다.


전학 온 후 늘 외톨이였던 내게 킹카 민우가 다가와 주었고, 나는 예전의 밝았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다.


어쩌다 대학도 같은 학교, 같은 과로 진학하게 되어 계속 가깝게 지내며 서로의 연애를 응원하고 이별의 아픔을 위로하다, 이십 대 후반의 어느 겨울밤, 친구 사이를 접고 애인이 되기로 결정했다.


아니, 그건 순전히 나의 결정이었고 그는 어쩔 수 없이 따랐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인물값 하며 숱한 여자와 연애하던 민우는 그 무렵 새로운 만남에 지쳐있었고, 아무런 노력 안 해도 되는 연애도 나쁘지 않다랄 지, 사랑을 고백하는 이십 년 지기 절친을 단박에 거절할 수는 다랄 지, 징그럽게 못돼 처먹은 놈만 만나 고생하던 여사친이 가엽다랄 지 등의 복잡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민우와 사귀게 된 후 어린 시절 내가 불쌍해 보여서 동정심으로 친구 한 거냐고 물었을 때 그는 특유의 냉소적인 말투로 자기가 다른 사람을 그렇게 생각할 만한 주제였냐고 되물었다.


나는 별 대답 없이 웃고 말았지만, 그는 충분히 그럴 만한 주제였고, 그건 나뿐 아니라 우리 학교의 모든 아이들도 그렇게 기억할 것임을 확신한다.


남자들 사이에서도 키 크고 잘생긴 애들은 안 건드리나? 이상하게도 민우는 질풍노도의 남학생들의 치열한 서열 다툼에서 늘 열외였고, 그렇다고 조용히 구석에만 있는 학생도 아니었다. 얌전한 모범생과 주먹으로 학교를 평정하려는 문제아 사이 어딘가 혼자만의 공간에 있다가 이쪽에 가서도 어울리고 저쪽에 가서도 말이 통하는 사람. 특별히 친하게 지내는 친구도 없고, 특별히 움받지도 않는, 혼자 임을 즐기지만 섞여서도 지낼 줄 아는 요상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나를 만나면서 인생의 쓴맛을 보기 시작했고, 결혼 후에는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을 만큼 나락으로 떨어져 버렸다.


가끔은 어디까지 견뎌낼 수 있는지, 스스로 시험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참아왔기에 이제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고 싶을 수도 있다. 할 만큼 했으니 나를 이쯤에서 떠나야겠다고 결정했을 도...


317호 주차 칸에서 나와 우리 집으로 올라가는 비상구를 향해 걷는 사람은 민우였다. 거의 30년 지기 친구이자 8년 차 남편인데, 그의 뒷모습이 무척이나 낯설다.


나는 모른 척해야 하나, 당장 다가가 어찌 된 영문이냐 따져야 하나 판단이 서지 않았다.


궁금한 것이 많아 무엇부터 물어야 할지 모르겠는 공황 상태.


그저 말없이 그의 뒤를 쫓았다. 나를 발견하면 무슨 말이든 먼저 하지 않을까? 변명이든, 설명이든, 다른 그 어떤 것이든.


내 발걸음 소리에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뒤를 밟는 사람이 나임을 안 듯하다.


그가 나를 발견했을 때는 내가 이미 그를 앞서 걸어가는 상황이었다. 잠시 멈춰 섰던 남편이 다시 내 뒤를 따라 걸었다.


집에 들어와서도 아무 일 없는 듯 행동하는 그를 보고 있자니 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어디서부터 그였을까?


듀끌로 씨가 말한 사람, 그러니까 멀찍이 서서 집을 지켜보고 창 안을 들여다보던 사람이 민우였을까, 혹시 욕실 안을 들여다보던 사람도?


얼마 전 쓰레기통에서 발견했던 그의 메모가 떠오른다.


우연히 메모를 봤을 때 기분이 좋지 않았다. 원래도 그의 글에는 우리의 대화나 상황들이 종종 등장하곤 했지만, 이번에는 실제 상황을 그대로 옮겨 놓았기 때문에 더욱 불편했다.


남편의 머릿속을 거쳐 나온 나의 모습을 마주하는 건 정말이지 수치스럽다.


픽션이라 할 만한 부분은 집안을 몰래 훔쳐보던 사람이 남편이라는 점, 신경 쇠약에 걸린 부인을 정신 병동에 입원시키기 위해서 불안감을 조성했다는 점이었다. 아니, 이 부분이야말로 논픽션이지 않을까?


시간을 더 끈다면 남편은 빠져나갈 퇴로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다. 더 이상 기다리는 건 위험하다.


“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네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을지.”


남편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는 노트북의 전원이 켜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무엇을 어떻게 물어야 할지 모른 채 그의 옆에 우뚝 서 있었다. 더 이상 내 앞에 있는 이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겠다. 지금 이 낯선 모습. 과거에도 한 번 본 적이 있다.


그때는 민우가 담배를 끊기로 약속한 뒤 처음으로 담배를 입이 문 날이었다.


남편이 될 민우에게만은 절대 보여선 안 되는 모습을 보여버린 시기였는데, 그 당시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고, 민우가 남편이 될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한 적 없었으며, 그가 아니면 마땅히 갈 곳도, 기댈 곳도 없는 처량한 신세였다.


홧김에 잠시 만났던 남자와 헤어진 후 미치광이처럼 나를 괴롭히던 그놈 때문에 죽으려던 때였고, 만난 시간보다 열 배 더 긴 시간 동안 죽음의 공포를 느끼며 도망가 숨어 살기를 반복하던 때였다.


아빠라도 찾아가 볼까, 찾아간들 아빠가 나를 만나 주기나 할까, 주먹 쓰는 아빠가 창피해서 천륜을 끊었는데 이제 와 염치없이 아빠 주먹에 기대려 하는 내가 한심했고, 다시 눈앞에 나타나면 죽여버릴 거라고 패악을 부렸던 나에게 아빠가 뭘 해 줄 리가 없다, 절망하던 때이기도 했다.


미치광이를 도저히 떼어낼 방법이 없어서 차라리 내가 죽어서 저놈 인생을 끝장내 버리자 계획하고 놈에게 달려들었고 죽기를 기다렸는데 눈을 떠보니 또 병원이었다. 병원에서 연락한 사람은 언니였다는데 달려온 건 민우였다.


나는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의 모습을 보고 놀라 눈을 감아버렸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2년간 민우를 멀리했는데 결국 그 꼴을 보이게 된 것이다.


헐레벌떡 뛰어 들어온 민우 뒤로 간호사 한 명이 따라 들어왔고, 민우에게 내 핸드폰을 건네며 상황설명을 해주었다. 할 수만 있다면 일어나 핸드폰을 뺏고 싶었다. 그 안에는 그놈이 날 협박하려고 보낸 사진과 영상들, 말하자면 남에게, 특히 민우에게 결코 보이고 싶지 않은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간호사는 곧 경찰이 도착할 거라고 말하고는 병실을 나갔다.


민우는 침대맡에 서서 한동안 나를 내려다보더니 환자복을 들쳐 내 몸의 상처를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얼굴, 어깨, 배, 다리, 손··· 그는 담배 화상이 심한 내 왼손을 특히 유심히 보았다.


놀랍게도 내 핸드폰을 뒤져보는 민우의 얼굴에는 감정의 동요가 전혀 없었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래 보였다. 놀라움도 분노도 한숨도. 이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생판 남도 충격받고 분노할 법한 데 오랜 친구가 죽도록 맞아 병원에 실려 왔고, 핸드폰 속 사진을 보면 어떤 종류의 폭행과 협박을 당했는지 뻔한데 말이다.


육신이 완전한 공황 상태였던 나는 예상치 못한 그의 태도에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얼마 후 그는 말없이 내 핸드폰을 자기 호주머니에 넣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한동안 창밖을 내다보며 석고상처럼 서 있던 민우가 몸을 돌린 건 내가 일부러 몸을 뒤척여 소리를 냈을 때였다.


그는 나를 빤히 보더니, 진통제가 더 필요하냐고 물으며 침대로 다가왔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민우는 침상 옆 의자에 앉아 무릎에 팔을 괸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눈을 감고 있는 것 같았다.


“가.”


내가 입을 열자 민우는 말없이 담요를 내 목 언저리까지 끌어당겨 덮어주었다.


“제발 가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가달라고 했지만 나는 그가 필요했다.


“걱정 마. 있어 달래도 갈 거니까.”


톡 쏘는 그의 말에 눈을 감아버렸다.


“진작 말했어야지.”


“......”


“동기 모임도 안 나오고, 연락도 뜸했던 이유가 이거야?”


“......”


“남자한테 미쳐있다는 소문이 파다하긴 했는데. 정말일 줄이야.”


“......”


“곧 경찰이 올 거야. 어떻게 된 건지 잘 정리해서...”


“집에 강도가 들었어.”


“뭐?”


“철거를 앞둔 곳이라 CCTV는커녕 세입자들도 거의 이사 나가서 본 사람도 없을 거야. 나도... 범인 얼굴 못 봤어.”


내 말에 한숨 쉬며 마른세수하던 민우가 벌게진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야. 김진영. 거짓말을 할 거면 좀 성의껏 지어내.”


“뭘 안다고 거짓말이래?”


“신고하기 싫어서 그래?”


“강도 얼굴도 못 봤고, 목격자도 없어서 경찰이 와도 해결되는 건 없을 거야. 이게 팩트야.”


“이 마당에 그 새끼 감싸려는 거야?”


정말로 다 알아버렸구나, 심장이 쿵 떨어졌다.


“응. 맞아.”


“그딴 놈한테 미련이 남았다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 고개를 돌려버렸다.


“돌았어?”


“......”


“혹시 겁나서 그래? 만약 그런 거라면 신고해서 제대로...”


“안 해봤겠어? 실형 살고 나오자마자 다시 찾아와서 이렇게 한 거야. 이게 몇 번째인지 알아?”


“몇 번째라니? 선영이 누나는 전혀 모르는 눈치던데?”


“언니는 워킹 홀리데이로 계속 호주에 있다가 얼마 전에 귀국했어.”


“그럼 더욱 신고를...”


민우가 핸드폰을 꺼내 번호를 누르기 시작했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쥔 그의 손을 잡았다.


“사형받게 할 수 있어?”


“뭐?”


“이렇게 3년째야. 처벌이 강해질수록 더 지독해졌고.”


“나 입대할 때쯤 만난 거야? 그래서 날 피했던 거고?”


“널 피했던 건 너 때문이었고.”


“나 때문이라니?”


“너 입대 전에 준영인지 뭔지, 어떤 여자 때문에 술을 떡이 되게 마시고 날 찾아왔었어. 내내 괴로워하더니 취해서 나한테 헛짓까지 하더라? 난 술김에 한 실수가 아닐 수도 있다고 기대했었어. 그러다 우연히 동기들이 하는 얘기를 들었어. 니가 입대하는 날 여자친구랑 같이 있을 거니까 아무도 배웅 오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고.”


민우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마치 귀신이라도 마주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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