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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모아 Aug 28. 2024

[8화] 진영 이야기 - 염탐꾼의 정체 2

민우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마치 귀신이라도 마주친 것처럼.


“이런 말 들으면 황당하겠지만, 배신감 들었어. 그래서 홧김에 클럽에 갔고, 그렇게 지옥문이 열렸고...”


민우는 말을 잇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근데 그게 이렇게 별 받을 만큼 잘못한 일이야? 다들 실연하면 클럽 가고 소개팅하고 그러지 않나? 왜... 왜 나만...”


민우가 갑자기 헝클어진 내 머리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전혀 예상 못 한 반응이라 어안이 벙벙했다.


그가 요동치는 감정을 그대로 표출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아냐. 아냐. 잘못 아니야. 너 잘못 하나도 없어.”


그러더니 들릴 듯 말 듯 연신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뭐가 미안했던 걸까? 다른 사람을 맘에 두고 술김에 나에게 키스했던 거? 아니면 나에게 헛된 희망을 심어 줬던 거? 그것도 아니면 날 좋아하지 않은 거?


민우의 마음에 큰 파동이 생긴 것 같아 두려웠다. 더는 친구로도 그를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죽게 두지. 그럼 지금쯤 다 끝났을 텐데.”


민우는 내가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병원을 떠났고 열흘간 오지 않았다.


열흘 만에 다시 병원에 온 민우는 퇴원 수속 후 내 짐을 정리했다.


“내내 곁에 있어 줄 거처럼 굴더니 코빼기도 안 비추더라?”


“그러게. 옷이라도 좀 갖다 줄걸. 뭐 챙기고 말고 할 것도 없네.”


민우는 텅 빈 옷장에 남아있던 립밤을 주어 입술에 발랐다.


“열흘 동안 뭐 했어? 바빴어?”


“두고 가는 거 없나 잘 생각해 봐.”


“핸드폰이 없어. 혹시 내 핸드폰 못 봤어?”


민우가 가져간 걸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냥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그가 내 폰을 본 걸 서로 인정하는 순간 다시는 예전처럼 지낼 수 없을 테니까.


“아니. 못 봤는데?”


“정... 말?”


난 모르지.”


그는 표정 하나 안 변하고 능청스레 거짓말했다.


민우도 나와 같은 마음인 걸까? 그날 밤 분명히 간호사에게서 폰을 받아 주머니에 넣는 걸 직접 보았는데도 잘못 본 건가 헷갈릴 정도였다.


“집에 있겠지.”


“병원에서 내 폰으로 언니한테 전화 걸었으니 가져온 건 확실해.”


“아.


민우는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간호사 선생님한테 얘기해 둘게. 찾으면 연락 달라고.”


민우는 짐을 들고 병실 문으로 향했다.


“근데 못 찾을 거 같은데? 벌써 열흘이나 지났잖아.”


나는 그가 내 핸드폰을 어떻게 했는지, 혹시 아직도 놈이 보낸 사진과 영상을 보는 건 아닐까, 잃어버린 건 아닐까 신경 쓰였다.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가면 안 되는데.


불안해하는 나의 시선을 느낀 민우가 나를 바라보았다.


“새로 사자.”


청유형이지만 분명한 명령조였다. 그는 더 이상 토 달지 말라는 투로 단호하게 내 말을 막아섰다. 저렇게 나온다면 내가 어떤 말로 물어도 민우는 내게 사실대로 말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는 운전하는 내내 어디로 가는지 말도 안 하고 전방만 주시했다.


나는 파주에 있는 내 방은 그날 그 모습 그대로  엉망이겠구나, 그걸 또 혼자 치워야겠구나, 그놈이 다시 들이닥치면 어쩌나, 지금이라도 신고하면 늦으려나 등의 걱정을 하고 있었다. 문득 이정표를 보니 차는 파주가 아닌 서울 강북으로 향하고 있었다. 내가 의아해하는 걸 눈치챈 민우가 입을 열었다.


“당분간 우리 집에 있어. 파주에서 짐 뺐어. 네 짐은 우리 집으로 다 옮겼고.”


그동안 이 많은 일을 처리하느라 얼마나 고생했을지. 미안하고 면목 없었지만, 염치없이 든든했다. 혼자가 아니란 느낌.


“너 데려다주고 난 바로 나가야 해. 오늘은 기다리지 마.”


순간 민우가 애써 감추려는 무언가가 있음을 느꼈다.


“여자친구?”


민우는 입을 꾹 다문 채 대답하지 않았다.


서운한 동시에 안도되었다. 차라리 잘 되었다.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했지만 불행했다.


“난 언니 집으로 갈게. 짐은···”


“너 형부 싫잖아.”


“며칠만 신세 지고 바로 방 구해서 나올 거야.”


“원룸이라던데? 네가 괜찮다고 형부도 괜찮을까?”


“형부는 무슨 얼어 죽을.”


“누나도 아기 낳은 지 얼마 안 돼서 정신없을 테고.”


“내가 아기 봐주고 살림도 돕고 하면 돼.”


“그 팔로?”


민우가 깁스한 내 팔을 내려다보았다.


“짐은 좀 맡아줘. 곧 찾아갈게.”


“그냥 우리 집에 있어.”


“여자친구가 좋아할 리 없어.”


“내가 알아서 해.”


“불편해.”


“이 마당에 맘까지 편하길 바라는 거야?”


화를 꾹 누른 낮은 목소리.


그는 병원에서 나와 처음으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갑자기 얼굴 군데군데 남은 멍이 수치스러웠다.


“미안해.”


“······”


“내 맘 편하려고 우리 집에 있으라는 거야.”


“할 만큼 했어. 그러니까 이제 신경 안 써도 돼.”


“너라면 그럴 수 있어?”


집 앞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말이 없었다.


주차 후 민우가 문을 열어 주었지만 나는 내릴 수 없었다. 아무래도 민우네 집에 머무는 건 둘 모두에게 위험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나만 생각하며 안도했지만, 막상 도착하니 민우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보조석 문을 열고 내가 내리기를 기다리던 민우가 몸을 숙여 내 안전벨트를 풀었다. 나는 벨트가 벗겨지지 않도록 손으로 꼭 쥐었다.


“곧 찾아와서 난동 부릴 거야.”


“······ 내려.”


“너도 다칠 거야.”


“내리라고.”


민우가 내 팔을 잡았다. 두려움에 바들바들 떠는 걸 알게 된 민우가 다시 운전석으로 돌아왔다.


“앞으로 그 깡패 새끼 때문에 걱정할 일은 없을 거야.”


민우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만지작거렸다.


“얼마나 악랄한 지 네가 몰라서 그래.”


내 말에 민우는 누구를 향한 비웃음인지 모를 냉소를 머금고는 담배에 불을 댕겼다.


“걱정 마. 이제 못 와.”


민우의 말대로 그놈은 두 번 다시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민우가 흘렸던 냉소는 어떤 의미였을까.


비열해 보였던 그 웃음과 내 손을 잡아 주는 따뜻함. 그 사이 어디쯤이 그의 본모습일까.


그날 섬찟하게 낯선 그의 모습, 나는 지금 그 앞에 다시 서 있다.


“지하 주차장에 주차하고 비상구 계단을 올라가는 데 물소리가 들렸어. 볼레가 덜 닫힌 틈으로 어릿어릿 네 실루엣이 보였고. 창에 가까이 다가가서 봤어. 얼마나 잘 보이는지 확인해야 했거든. 그때 네가 사라졌고, 나도 그냥 집으로 들어왔어. 마침 네가 욕실에서 나와 호들갑스럽게 어떤 미친놈이 안을 들여다봤다기에 장난기가 돋았어. 그래서 확인해 보자 했을 때도 모르는 척 밖으로 나간 거야. 생각보다 인형이 선명하게 보이긴 했어. 하지만 네가 샤워하는 모습은 못 봤어. 정말 들여다보자마자 네가 사라져 버렸거든.”


“왜 사실대로 말 안 했어?”


“장난이었다니까. 네가 그렇게 신경 쓸 줄은 몰랐어. 나중엔 뒤늦게 말해봐야 널 안심시키기 위해서 둘러댄다고 생각할 거 같았고.”


“지금 하는 말이 더 안 믿기는걸?”


“죄의식과 피해 의식을 동시에 가진 사람이랑 사는 게 어떤지 알아? 무슨 말을 해도 안 믿고, 의심을 하다 하다 스스로가 만든 망상으로 들어가 버리는 사람이랑 사는 게 얼마나 조심스러운지 아느냐고.”


나랑 사는 일이 얼마나 고된지 아느냐는 그의 하소연은 꽤나 충격적이어서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럼 오늘은 왜 베란다 안을 지켜본 거야?”


“점점 이상해지는 네가 걱정되니까.”


“도망은? 주차장에 숨어서 거짓말한 거는? 그것도 나를 위해서 한 일이라 할 거야?”


“응. 정확해.”


“뭐?”


“대체 테라스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었던 거야?”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설마 그걸 다 봤다는 말인가?


“왜 대답을 못 해?”


그의 시선이 나를 외면한 채 노트북 화면에 고정되어 있다.


“너 먼저 대답해. 왜 거짓말했어?”


“못 본 척해주려고. 어쩌면 테라스에서 하던 그 일,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겠다 싶었거든.”


나는 또다시 할 말을 잃었다. 그의 말이 어느 정도 맞기 때문이다. 쓸데없는 호기심에 해 본 일이긴 하지만 막상 누군가 지켜본 사람이 있었다니 조금 당황스럽긴 하다. 하필 그게 민우였다는 사실도.


나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어떤 식으로 얘기해야 덜 이상해 보일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별 의미 없이 한 일이야.”


나의 대답에 남편은 화를 삭이려는 듯 눈을 감았다 뜨더니 원고를 펼쳤다.


“말하다 말고 뭐 하는 거야?”


“말할 의지가 없는 사람하고 무슨 말을 해?”


“알아. 이상해 보였을 거야. 근데 이유가 있어서 한 일이야.”


“그랬겠지.”


“이유는··· 지금 말하기 싫어.”


“그러시던가.”


더 이상 관심 없다는 듯 건성으로 툭.


아까 테라스에서 했던 내 행동이 기이해 보일 수는 있어도 경악할 만한 행동은 아니다. 왜 그랬는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할 수 있지만, 지금은 그 얘기로 논점을 흐리고 싶지 않다. 그가 문제의 본질을 흐린 후 빠져나가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


“나를 정신병으로 몰아서 병원에라도 보내려는 수작이야?”


“병원이라니?”


남편은 내 말의 의도를 모르는 척했다.


“새로운 소설 시놉시스를 보란 듯 펼쳐 버린 것도 혹시 네 계획의 일부니? 왜? 내가 곱게 헤어져 줄 것 같지 않았어?”


남편은 기가 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젠 소설이랑 현실도 구분 못 해?”


“그게 소설이야? 네가 한 말이 그대로 다 그 시놉시스에 있고, 몽땅 우리 현실인데?”


“빌어먹을!”


남편은 또 손에 들고 있던 원고를 바닥에 집어던졌다. 던지고 화내는 게 이미 습관이 되어 버린 듯하다. 이젠 이런 모습이 두렵지도, 화가 나지도 않는다는 사실이 더 절망스럽다.


“너야말로 대체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출판사랑 약속한 기일이 코앞이야. 뭐든 우선은 넘겨야 한다고! 일기라도 쥐여줘야 할 판인데, 지금 그걸 가지고 이 난리인 거야? 이번에도 아무것도 못 넘기면 계약금 도로 뱉어내야 해! 그렇게 되면 우린 뭐 먹고사냐? 집세 내고 보험료 내고 나면 차비도 안 나와. 글 써서 받는 돈 끊기면 정말 난감한 상황이라고! 네가 망상 속에 사는 동안 나는 얼마나 서럽고 속이 타들어 가는지 알아? 이제 제발 말도 안 되는 생각과 계획은 접고 우리 현실적으로 좀 살자!”


“왜 자꾸 망상이라는 거야? 왜 내가 하는 생각과 계획은 다 말도 안 된다는 거야?”


남편은 고개를 돌려 집을 훑다가 내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우리가 부부이긴 해? 같이 여행한 게 언제였는지, 둘이 웃으며 밥 먹은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나.”


“당연히 애들 중심이 될 수밖에 없지!”


“그놈의 애들! 애들! 애들! 정말 미칠 것만 같아!”


그는 나와 아이들을 그의 삶에서 솎아내려는 게 분명하다.


“선택해. 내가 한국 다녀온 후에도 이 모습 그대로라면 우리는 끝나는 거야.”


남편은 방으로 들어가 가방을 싸기 시작했다.


그의 마지막 말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나는 과호흡증에 걸린 사람처럼 한동안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가 없던 내 인생은 너무 오래전이라 생각조차 나지 않는데 앞으로 여생을 민우 없이 살 수 있을까.


나는 친구였던 그를 졸라 연애를 시작했던 과거의 선택을 또다시 후회했다. 그가 아니었다면 나는 감히 결혼이란 건 생각조차 못 했을 것이고, 결혼을 안 했다면 우리가 이렇게 되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의 한국 일정이 어떻게 되더라···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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