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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모아 Aug 30. 2024

[10화] 민우 이야기 - 사라진 유 선생

<연재소설> 비밀의 부부

“고양이에 관한 책을 쓸까 봐. 그런 거 있잖아. 초보 집사들을 위한 책. 양육 바이블 같은 거지.”


진영이의 지독한 생활력이 또 도졌다. 한동안 잠잠하더니 또다시 돈 되는 일을 찾기 시작했다.


“인터넷 세대에 누가 그런 걸 책으로 보니? 필요할 때 동영상 찾아보지.”


“그럼 유튜브 찍을까?”


“이미 널린 게 고양이 유튜브 아니니?”


내가 이런 결혼생활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결혼해도 소위 딩크족으로 살면서 자유롭게 여행하며 글만  계획이었다. 그런데 내 애들도 아니고, 고양이 때문에 삶이 꼬일 줄이야.


내가 나답지 않게 살기 시작한 게 언제였는지 딱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진영이가 임신했을 즈음이었던 것 같다.


아기가 그렇게 쉽게 생길 줄은 몰랐다. 어머니가 불임으로 고생했었고, 나 역시 많은 여자를 만났지만, 아기가 생긴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로또 당첨만큼 어렵다는 세 쌍둥이가 자연적으로 생기다니. 이 비현실적인 확률이 우리에게 적용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산부인과에서 심장이 셋이나 뛴다고 말하는 의사와 기뻐하는 진영이 사이에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나 고민할 새도 없이 난감한 표정을 지어버렸다. 진영이도 나만큼 놀라긴 했지만, 행복에 복받친 듯, 감동의 눈물을 펑펑 쏟았다.


세 쌍둥이를 갖자마자 그녀는 처음으로 돈 버는 일에서 손을 뗐다.


어려서부터 생활력이 남달랐던 진영이는 고등학생 때부터 쉬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했었고, 대학생 때는 학원에서 국어 강의를 하며 꽤 큰돈을 벌었으며, 회사 다닐 때도 보습학원 논술 채점 등 투잡을 뛰던, 소위 돈맛이 단단히 든 사람이었는데 모든 경제활동을 한순간에 내려놓은 것이다. 오직 아이들을 위해서.


그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떠나버렸다.


쉽게 오더니 쉽게 가버렸다.


기뻐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던 내 탓인 것만 같았다. 아빠 될 자격이 없는 나 때문에 아이들을 몰수당한 것도 같았다.


아이를 원한 적 없는 건 사실이지만 이별은 똑같이 힘들었다. 이런 것이 부성애라는 걸까. 잘 모르겠다.


아이들이 떠나고 넉 달가량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대던 진영이가 갑자기 아이들을 되찾겠다며 나를 들볶기 시작했다.


우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진영이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고, 거듭되는 실패에 그녀는 시험관 시술로 방향을 틀었다.


자연스럽게 생긴 아기도 거부하고 싶던 나에게 인공 시술이라니. 나는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 단 한 번도 원한 적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확실히 말하고 싶었지만 진영이가 간신히 잡고 있는 생명줄을 내 말로 끊어버리게 될 것 같아 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최대한 싫은 내색은 감추고 임신을 위해 해야 하는 모든 인위적인 행위 앞에선 데면데면 구색만 갖추고 뺀질뺀질 도망 다녔다.


나의 불성실한 태도에 불같이 화내던 진영이에게 하느님이 주시는 생명을 이렇게 억지로 가지려 하는 건 그분의 품에서 기어코 아기를 빼앗아라도 오겠다는 심보냐고 물었을 때 그녀의 눈은 분노로 이글거렸다.


진영이는 그날의 분을 못 잊겠는지 내게 제대로 복수했다. 아내의 아픔을 보듬을 줄 모르는 무심한 남편의 비극적인 최후를 다룬 소설로.


어느 날 지방 신문사에서 신춘문예 당선을 알리는 전화가 걸려왔다.


신문에 실린 진영이의 단편소설을 읽어보니 픽션이 아니었다. 갑자기 사라진 아내가 남긴 일기장을 읽는 남자 이야기였는데, 그 남자는 그냥 나였다.


같이 사는데 할 말 있으면 직접 말하지 뭘 번거롭게 신문까지 이용하냐 물었더니 진영이는 해맑게 웃으며 그냥 말하면 니가 듣기나 하니라고 대답했고, 나는, 영리하네, 근데 난 술은 안 마시니 알코올중독으로 저런 추잡한 꼴을 보일리는 없어,라고 받아쳤다.


그냥 써본 첫 작품이 한방에 통하니 진영이는 글 쓰는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내가 보기에도 꽤 소질이 있어 보이기도 했지만, 아기를 갖는 데 집중된 신경을 분산시키기 위해서라도 그녀의 집필을 장려할 수밖에 없었다.


단편 몇 편을 끄적대던 진영이는 어느 날 문득 자기는 로맨스에 강한 것 같다며 장르물에 도전하겠다 선언했다.


로맨스 소설이랍시고 써내는 원고는 족족 거절당했다.


당연한 결과였다. 로맨스 소설이 로맨스 소설이 아니었으니까.


두 남녀의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는 한 꼬집 정도 들어가고 지리멸렬한 권태기에 몸부림치다 서로 물어뜯는 이야기를 쓰니 이걸 어떤 편집자가 좋아하느냐 말이다.


하루는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를 보다 버럭 화를 내면서 저렇게 무책임하게 사랑을 묘사하니 사람들이 겁도 없이 결혼하는 거 아니냐며, 아직도 저렇게 비현실적인 글을 쓰는 작가들이 있는 게 놀랍다고 울분을 토했다.


또 하루는 판타지 로맨스 드라마를 보다가 영원한 사랑을 약속한 여주인공이 환생해서 같은 남자를 만나는 장면에서 TV를 꺼버렸다. 갑자기 장르가 호러로 바뀌었다며 작가가 미친 게 분명하다는 말과 함께. 어느 부분이 호러냐 묻자, 간신히 환생했는데 그 인생이 그 인생인 게 호러가 아니면 뭐냐고, 작가가 돌았나, 저걸 로맨스란다, 중얼거렸다.


대놓고 나를 먹이는 작태에 기분이 나빴지만, 내색 않고 로맨스의 정의를 알긴 아냐고 물었다. 그녀는 당당하게, 물론이지. 사랑 이야기잖아, 했고, 주변을 둘러보라는 둥 우리를 보라는 둥 저런 사랑을 단 한 번이라도 본 적 있느냐고 되물었다.


네가 체득해서 정의 내린 로맨스 말고 독자가 원하는 로맨스를 쓰란 말이야 라고 핀잔 주자 진영이는 또 해맑게 웃으며 내 주요 목표 독자는 한 명이거든, 너. 하고 자리를 떠버렸다. 소설 집필이라는 그 지난한 작업을 굳이 날 위해 하고 있다니··· 감개무량했다.






막걸리를 빚었다며 한국 교민 몇몇을 집으로 초대한 희경은 진영이의 어학원 동기이자 친한 동생이다. 하얗고 동그란 얼굴에 볼살이 통통한 희경이 진영을 보며 웃는다.


“햇님 달님 별님이 많이 컸죠? 오래 못 봐서 보고 싶다.”


내 아이들 태명이 이렇게 불려 질지는 상상도 못 했다. 가슴속에 묻어두고 나만 꺼내보려 했는데.


“희경, 무말랭이도 했어? 이걸 언제 다 썰어서, 말려서, 양념까지 했니?”


진영이 손가락으로 무말랭이를 집어 오독오독 씹는다.


“생선전이랑 먹으면 맛있을 것 같아서. 언니 갈 때 좀 드릴게요.”


“듬뿍 싸줘.”


희경의 남편 니콜라가 직접 만든 수제 막걸리를 잔에 따르며 원액이라 독하다고, 물을 섞든 사이다를 섞으라고 말한다. 니콜라는 희경과 결혼하면서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한 내 학생이다.


한국어를 연습하고 싶은 니콜라가 종종 막걸리를 만들어 우리를 초대하지만, 진영이는 니콜라가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하는 건지, 아니면 불어를 연습하고 싶은 건지 그와는 늘 불어로 대화한다.


“진영은 정말 프랑스에서 이십 년쯤 산 사람 같아요. 프랑스 사람이랑 사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2년 만에 이렇게 잘해요?”


턱수염이 수북한 니콜라가 프랑스인 특유의 손 털기 제스처를 하며 놀라움을 표한다.


진영의 불어가 놀랍도록 빠르게 성장한 건 고양이 때문이다.


고양이를 기르기 시작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동물 병원에 가야 했던 우리는 의사소통이 쉽지 않았고, 병원에서 빠르게 쏟아내는 주의사항을 캐치하지 못해 하마터면 한 마리를 잃을 뻔했었다.


그날 이후 진영이는 불어에 미친 듯이 올인했다. 말 그대로 "미친 듯이". 그녀는 눈 떠 있는 순간에는 단 1분도 쉬지 않고 불어를 틀어놓고 듣고 외우고 연습했다. 세뇌될 정도로 한 음원을 반복해서 듣다가 나도 외울 지경이 되면 다른 음원으로 갈아타는 방식이었다.


일하는 데 적잖이 방해되어 블루투스 이어폰을 선물해 줘도 충전하는 게 번거롭다며 사용하지 않았고, 하는 수 없이 내가 귀마개를 끼고 글을 써야 했다.


안전하고 복지제도가 정립된 선진국이면서, 글의 영감을 받기도 좋은 환경에, 언어 장벽도 높아 시험관 시술을 쉽게 할 수 없는 곳을 찾아 이곳으로 왔는데, 2년 만에 그녀는 그 장벽을 훌쩍 뛰어넘어버렸다.


발음이 후지기는 해도 웬만한 프랑스인보다 문법적으로 더 정확한 어휘를 사용하며 원어민들과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게 되면서, 그녀의 능력은 나에게 새로운 근심거리를 선사했다.


다시 시술해 보자고 할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차라리 그랬다면 지금보다는 덜 힘들었을 것 같다. 그녀는 자신의 불어 능력으로 프랑스 정부를 향해, 아니 세계를 향해 대단히 말도 안 되는 싸움을 계획 중이다. 반려동물 입양 제도 확립을 위한 국민청원 캠페인.


처음에는 당연히 농담인 줄 알았다.


CAF(가족수당 기금)에 가서 애 셋을 등록하라는 둥, 우리 아이들은 왜 건강보험 적용이 안 되냐며 보험회사를 바꾸자는 등의 얘기를 할 때면 고양이 덕분에 아픔을 잊고 엄마 역할하며 즐겁구나, 행복하구나, 그래서 농담도 저렇게 실감 나게 하는구나, 마음이 흐뭇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착각의 정도가 심해져서 고양이를 자기 자식으로 인정해 주지 않는 사람들에게 버럭 화를 내거나, 부당한 차별을 당하는 양 억울해하며 덤비기 시작했다. 장난으로 시작한 것이 병이 된 것이다.

나는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난감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 부분에서는 정상적인 대화가 전혀 안 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진영이가 샤워하는 욕실 안을 훔쳐봤던 날도 그랬다. 그녀가 고양이들을 CAF에 등록해 보자는 말을 한 순간, 우리는 무찔러야 할 공공의 적인 정신 나간 변태를 잊고 서로를 향해 눈살을 찌푸리며 싸우게 된 것이다.


초인적인 능력을 보통 사람들이 가늠하기 힘든 방향으로 발산하는 여자와 사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여러 번 얘기했지만, 노예제도 폐지나 여성 참정권 보장은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라는 평등권을 기반으로 한 것이고, 이건 규칙과 법을 지킬 수 있는 국민, 즉 인간이라는 범위 안에서만 성립되는 거라고.”


“모든 생명은 평등하게 가치가 있어. 그러니까 인간뿐 아니라 다른 모든 동물도 평등하게 존중받아야 하는데 사람들은 애완동물이라 부르던 걸 반려동물이라는 부르는 방식으로 표현만 바꿨을 뿐 여전히 생명에 대한 존중은 부족해. 같이 살기로 했으면 가족으로서 책임감을 느껴야 하는데, 키우다 힘들어지면 아무한테나 되팔아 버리고, 심지어는 학대하고 유기하고··· 이런 부조리를 없애려면 강력한 법이 필요해.”


“너 어제 침구류 소독해서 진드기 박멸했잖아. 모든 생명이 다 평등하게 존중되어야 한다면 진드기도 죽이면 안 되지. 모기도 죽이면 안 되고.”


“그건 해충이잖아.”


“‘모든 생명’이란 명제에서 왜 해충은 제외되어야 하는 거야? 인간에게 피해를 주면 생명 자체가 갑자기 존엄성을 잃게 돼? 그렇다면 애초부터 모든 생명이라는 커다란 명제 아래 평등을 운운해선 안 되지.”


“똑똑한 놈. 재수 없어.”


“너는 지금 나 한 명도 설득하지 못하고 있어. 그런데 캠페인은 무슨 캠페인이냐?”


발음이 어눌한 동양인으로 살면서 꽤 잦은 빈도로 차별받고 사소한 문제도 해결하기 힘들 때가 여전히 많은데 그녀는 이 말도 안 되는 제도를 꼭 도입해서 반려동물들이 쉽게 버려지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고,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도 당당하게 부모로 인정받는 사회로 만들겠다고 한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노고도 자식 키우는 노고에 못지않다면서.


고양이들 키우는 게 그렇게 힘들고, 남들에게 인정받아야 할 만큼 생색낼 일이라면 키우지 말라고 했다가 이혼당할 뻔했다.


화장실에서 나온 미선 선배가 거실을 가로질러 침실로 들어간다. 집주인도 아니면서 침실로 들어간 이유는 침실 안에 있는 욕실을 쓰기 위해서였다.


미선 선배는 나와 진영이의 대학 선배이기도 하고, 한국에서 함께 근무했던 오랜 직장 선배이기도 하다. 지금은 내가 일하는 한국어 학당의 유럽 지부 총 관리자겸 헤드 강사다. 우리는 어학원 소속이긴 하지만, 어학원에서 하는 수업보다 프랑스 소재 대학에서 열리는 한국어 강의에 시간강사로 출강하는 빈도가 더 잦다.


식탁으로 돌아온 선배가 병아리콩을 갈아 만든 콩전과 대구의 일종인 메흘뤼(merlu)로 만든 생선전, 장봉(Jambon, 햄)을 넣은 김치전, 호박 꽃전이 놓인 채반을 내려보며 한마디 했다.


“이 좁은 집에 변기랑 세면대 거리는 구만리네. 볼일 본 후, 손 한번 씻으려면 방 두 개를 건너가야 하는 게 말이 되나?”


프랑스 집은 대개 변기가 있는 화장실과 세안 및 샤워를 할 수 있는 욕실이 분리되어 있다.


그 많은 화제 중 왜 화장실이 소재가 된 건지. 욕실 변태 사건 이후로 지나치게 예민해진 진영이 때문에 골이 아픈 터라 대화 소재를 돌려야 했다. 나는 채반에 가지런히 누워있는 호박꽃전을 젓가락으로 집었다.


“호박꽃도 먹는구나. 처음 알았어.”


“불편하지? 우리 프랑스 어학원에도 이상한 1인용 화장실이 있어.”


나의 말은 아무도 안 듣는 것 같다.


“보통 거울은 세면대 위에 있잖아? 근데 그 화장실은 세면대 위에 그림이 걸려있고, 거울은 변기 위에 붙어 있는 거야. 직접 보면 정말 생뚱맞고 이상해.”


진영이가 말해서 나도 이미 그 화장실을 안다. 진영이는 예술을 좋아하는 프랑스인들의 스타일이라는 둥, 거울보다 그림이 더 중요해서 그럴 거라는 둥 추측했었다. 내 생각에는 넋 놓고 작업하던 인부가 실수로 거울을 잘못 붙였고, 떼어내려면 비싼 거울을 깨야 하니 그냥 거울을 걸기로 한 곳에 그림을 건 것 같은데.


“여기 프랑스는 화장실 문화가 좀 유별난 것 같아. 베르사유궁에도 화장실이 없었다며?”


“없는 건 아니었어요. 두 개의 공중화장실이 있었는데, 수천 명에서 만 명 가까이 상주하는 곳에 두 개뿐이라 유명무실한 거였죠.”


“그럼 볼일은 어떻게 봤지?”


“궁 안에 노상 방뇨도 하고 큰일도 보고. 귀족들은 요강을 갖다 주는 하인이 따로 있었대요.”


“하이고야.”


진영은 욕실 안을 들여다보던 놈이 생각났는지 갑자기 얼굴이 벌게져서는 샤워기가 달린 욕조 위로 커다란 창문이 있는 우리 욕실의 불합리한 구조에 대해, 창문 크기에 비해 형편없이 작은 욕조에 대해, 그 이유로 샤워를 할 때마다 창문에 몸이 닿고 밖에서 누군가 볼까 봐 신경 써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열을 올렸다. 그러면서도 안을 들여다보던 놈이 있었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간유리 아니야?”


“닿을 정도로 가까이 있으면 간유리라도 다 보여.”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새로운 정보를 흡수하는 동안 나는 막걸리를 들이켰다. 니콜라 말대로 원액이라 꽤나 독했다. 나는 사이다를 섞으며 니콜라에게 이번 막걸리가 지난번보다 더 맛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정말요? 누룩을 바꿨는데 이게 더 나은가요?”


사실 나는 막걸리를 몹시 싫어해서 막걸리 맛을 구분하지 못한다. 내 말을 듣고 미선 선배가 한 잔 가득 들이켰다.


“정말이네. 니콜라, 이제 막걸리 장사해도 되겠어?”


나는 사이다를 더 넣으려고 뻗었던 손을 다시 거둬들였다.


“영진 씨도 있었으면 좋았을걸. 무슨 사연이 있길래 그렇게 갑자기 그만두고 사라졌냐.”


“미선 언니, 아직도 영진 씨랑 연락 안 돼요?”


“응. 이메일에 답도 없다. 핸드폰은 이미 없는 번호라 하고.”


까무잡잡한 피부에 이목구비가 또렷한 선배의 미간이 구겨졌다.


“진영 언니는 연락해 봤어요?”


희경이 대답을 기다리며 곁눈으로 진영이를 살핀다. 미선 선배도 괜스레 생선전을 뒤적이며 귀를 쫑긋 세운다.


“나랑은 안 친했는데 뭐.”


사람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나에게 향했으나 모든 질문에 다 답할 의무는 없기에 나는 그냥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막걸리를 마셨다. 원래도 술을 안 좋아하지만 오늘은 더욱 마시기 거북하다.


“벌써 3개월째죠? 박 작가님이 힘들겠어요. 영진 씨 수업까지 떠맡는 바람에.”


영진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어느 날 갑자기 ‘유영진’이라 불러 달라던 그의 요구에 사람들은 착실히 응해주고 있지만 나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다.


여행 가이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만난 여행객 중 점쟁이인지 작명가인지가 친생부모를 찾기 위해서는 이름을 바꿔야 한다고(그의 본명인 ‘배달’이란 이름 때문에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살게 되었고, 부모도 못 찾는 거라고) 했다고 한다. 그 말을 믿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개명을 결심했고 영진이란 이름을 골랐다는데···.


유배달. 우유배달. 개명이 필요해 보이긴 하지만 영진이란 이름은 뭔가 찝찝했다.


진영··· 영진···


그는 왜 하필 영진이냐 묻던 나에게 아까 내가 한 것처럼 어깨를 으쓱거린 후 자리를 떠났다. 그날부터 나는 그를 유 선생이라 불렀다.


“근데 어학원 학생 중에 진영 씨를 본 사람이 있더라고.”


“진영 씨라니? 영진 씨겠지.”


“아. 맞다. 영진 씨. 이름 너무 헷갈려.”


미선 선배가 손으로 이마를 감싸 쥐었다.


“나도 진영이 언니한테 영진 언니라 부르고 영진 씨한테 진영 씨라고 부르고. 헷갈려 요새.”


“그럼 나처럼 유 선생이라 불러.”


적의 없이 툭 던진 말인데 분위기가 묘하게 싸늘해지며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모아졌다. 보아하니 나만 그 이름이 불편했던 게 아닌 것 같다.


초반에는 유독 진영이를 경계하고 차갑게 굴던 유배달이 언제부턴가 진영이를 바라보는 눈빛이 애틋해지면서 모임 때마다 곁눈질로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고 있으니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모습을 못 봤을 리 없고, 당연히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유배달이 굳이 영진이란 이름을 고른 이유를 추측했을 것이다. 기왕 이리된 거 듣기 싫은 저 이름을 사장해 버릴 참이다.


“헷갈린다며? 유 선생··· 깔끔하잖아?”


미선 선배가 가벼운 손놀림으로 내 어깨를 툭 쳤다.


“에이, 그건 너무 사무적이다.”


유배달이 언제부터 우리랑 그리 친했었냐 받아치려는데 눈치 빠른 희경이 내 입을 앞질렀다.


“진영 언니, 영진 씨 유기 동물 보호 센터에도 안 나와요?”


아까 주방에서 희경과 니꼴라가 쑥덕대던 말이 뇌리를 맴돈다.


에이, 설마. 박 작가 같은 남편 두고 한눈팔까···


희경은 진영이를 떠보기 위해 유배달의 안부를 물었고 나를 포함한 모두가 진영의 표정 변화에 집중했다.


우리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한 진영은 매우 솔직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언뜻 보기에도 꽤나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는 막걸리 원액을 컵 가득 부어 한숨에 마셔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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