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바람이 분다
<연재소설> 땡감이 영그는 시간
바람이 분다.
이곳이 시원한 것도, 쓸쓸한 것도 다 이 바람 때문이다.
멀리 머플러를 휘날리며 모에카가 걸어온다. 9월 초순, 조금만 걸어도 땀이 송송 나는 늦여름에 털이 북실거리는 색동 머플러라니…. 나는 낮게 한숨을 내쉬며 급히 반대 방향으로 발을 옮겼다. 내가 돌아서는 걸 보자마자 그녀가 뛰기 시작했고, 나는 얼마 못 가 모에카에게 잡혔다.
“민! 이럴 거야?”
책망하듯 눈을 흘기는 그녀 앞으로 머플러 자락을 들어 올렸다.
“일부러 이러는 거지?”
이곳 랭스(Reims)는 아시아인이 많지 않은 프랑스 소도시라 동양 여자 둘이 걸어 다니는 것만으로도 이목이 쏠리곤 한다. 튀는 복장이면 더욱 그럴 텐데, 사정상 나는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살아야 하는지라 이런 식의 이벤트는 영 달갑지 않다. 내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 왜 자꾸 생뚱맞은 차림으로 나오는 걸까?
“늦여름에 털 머플러?”
“일본에 사는 조카가 직접 만들어서 보내준 거란 말이야.”
“매일 자기 전에 영상 통화한다는 그 조카?”
“응, 맞아. 그 애.”
모에카가 활짝 웃으며 머플러를 요란하게 흔들었다.
“조카가 남자 애라고 하지 않았어? 게다가 열아홉 살?”
“응!”
성인이 된 남자 조카가 밤마다 이모랑 화상통화 하는 것도 특이한데, 머플러를 손수 한 땀 한 땀 떠서 선물하다니. 그것도 한여름에.
“아니, 색감이...”
밝은 아이보리, 진청록, 연보라, 주황, 검정, 형광 노랑 등 색의 조합을 보니 골탕 먹이려는 의도 분명하다. 게다가 조악하기 이를 데 없는 바느질 상태까지. 나의 불편한 시선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모에카가 불퉁하게 대꾸한다.
“민! 선물은 마음으로 받는 거야!”
“그럼! 그럼! 전적으로 동의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정신 사납게 나풀거리는 머플러를 모에카 목에 한 바퀴 더 감아 덜렁거리지 않도록 꽉 묶어 주었다. 타이트하게 목을 조이는 머플러가 불편했는지 모에카가 나를 노려본다.
“소중한 선물인데 잃어버리면 안 되잖아?”
대롱거리는 부분이 없어진 머플러는 이제 좀 참아 줄 만하다.
*
점심시간, 레스토랑은 이미 만석이다. 여기 어딘가에 샤갈의 그림이 있다고 들었는데 대체 어디 있는 건지, 올 때마다 둘러보지만 여전히 못 찾고 있다. 너무 복잡해서 정신이 하나도 없다. 사람뿐 아니라 빈틈없이 들어찬 골동품 때문에 더 꽉 찬 느낌이 든다.
레스토랑 벽면은 빛바랜 흑백 사진부터 랭스(Reims) 출신 예술가들의 다양한 작품으로 빈틈없이 채워져 있고, 테이블 사이사이 작게나마 허락된 공간에는 조각상과 장식품이 자리하고 있다. 조각상 위에는 또 다른 조형물이 벽에 고정되어 허공까지 채우고 있으니 여백을 느낄만한 공간이 단 한 군데도 없다.
“여기만 오면 정신이 산만해져.”
모에카에게 속삭이자 그녀가 피식 웃으며 내 어깨를 툭 쳤다. 예약자 이름을 말하자 중년의 신사가 우리를 2인석 테이블로 안내해 주었다. 식사하다가 옆 테이블 손님과 팔꿈치가 부딪힐 만큼 테이블 간격이 좁다. 나는 옆 사람에게 닿지 않도록 조심조심 겉옷을 벗어 의자에 걸었다.
“이 레스토랑 주인은 빈 공간을 못 견디는 병이 있을 거야.”
“100년 된 레스토랑이잖아. 무너지기 전에 한 테이블이라도 더 받아야지.”
천장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투과한 빛이 실내를 아늑하게 채운다. 다채로운 색을 입은 빛이 레스토랑 여기저기에 내려앉는다. 지난번에 왔을 때 보다 채도가 낮은 것 같다. 색유리에 걸러진 햇빛이 점잖아진 이유가 가라앉은 내 기분 탓인지, 흐린 날씨 탓인지 잘 모르겠다.
“이사한 집은 어때? 맘에 들어?”
“응. 좋아. 아직 가구가 안 채워져서 불편하지만.”
“주방이 다 짜인 집을 골라서 다행이야.”
“그러게.”
“페인트 냄새는 다 빠졌어?”
“아직 좀 남았지.”
웨이트리스가 다가와 오늘의 메뉴를 빠르게 읽어주었다. 모에카는 블랑켓 드 보(송아지 크림소스 요리)를, 나는 콩피 드 카나르(소금에 절여 낮은 온도로 익힌 오리 다리 요리)를 주문했다.
“오늘 크림소스 상태가 아주 말도 못 해요(terrible)!”
웨이트리스가 다소 과장된 제스처와 함께 ‘terrible’이란 단어를 두어 번 반복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기욤이 떠올랐다. 나에게 처음으로 음식을 만들어 주면서 했던 말.
“망조라는 거야?”
내가 되묻자 기욤은 의아한 표정으로 다시 ‘terrible’이란 단어를 또박또박 말했었다.
“죽여준다니까?”
“테러블(terrible)이라며?”
“아! 불어에서 ‘terrible’은 두 가지 뜻으로 쓰여. 엄청나게 좋을 때랑 끔찍하게 나쁠 때, 두 상황에 다 쓸 수 있어.”
황당해하는 날 보며 밝게 웃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데…. 그는 정말 ‘terrible’이란 단어에 딱 맞는 사람이다.
나는 남편과 별거 중이다. 엄마와 언니에게는 이혼했다고 말했지만. 그렇게 말한 이유는 합칠 가능성이 전혀 없는, 말하자면 이혼의 과정일 뿐인 이 별거를 재결합을 위한 숙려기간으로 착각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아무 일도 없었다잖아. 기욤을 못 믿는 거야?”
‘아무 일이라...’
모에카의 말에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몰라, 포크로 하얀 접시 위의 오리 다리만 쿡쿡 찔렀다.
“이렇게 이사까지 해버리고. 나중에 어쩌려고 그래?”
“......”
처음엔 나도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새로운 공간에서 이삿짐을 풀고 있었다. 이별. 아주 오랫동안 생각하고 나름 계획했었는데, 막상 저지르고 보니 충동적으로 감행한 객쩍은 호기였던 것 같다. 이렇게 다 인정하면서도 돌아갈 마음은 전혀 없다는 것, 그게 문제다.
“이혼은 중대한 문제야. 에디에게서 아빠를 빼앗는 거라고.”
“이혼해도 아빠는 아빠지. 둘 사이에 변하는 건 없어.”
오히려 더 나아질 수도 있다. 만나는 시간이 정해져 있으면 그 시간은 오로지 에디 몫이 될 테니까.
“도장 찍기 전에 다시 잘 생각해 봐.”
이혼 서류에 도장 찍는 걸 미룬 이유는 아들 에디 때문이다. 자식 때문에 서류 정리를 보류한다는 말은 너무 뻔한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정말 그뿐이다. 나는 에디가 성인이 될 때까지 프랑스에 머물러야 하는데, 소득이 불안정한 상황에 이혼까지 하면 거주증 갱신이 힘들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영락없이 에디를 두고 혼자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수도 있는데… 절대로 안 될 일이다.
“좋았던 시간, 행복했던 순간을 생각해 봐.”
“기억이 잘 안 나.”
모에카가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결혼은 나 혼자 한 것 같아. 결혼 후 내 삶은 송두리째 변해버렸는데, 기욤은 결혼 전이나 결혼 후나 변한 거 없이 살고 있거든. 하던 일 계속하며 유명해지고, 새로운 일 하며 바빠지고, 그러면서 더 성공하고, 그럴수록 출장은 더 잦아지고, 점점 집에 들어오는 날도 줄어들고.”
“엄청나게 유명한 요리사잖아. 바쁜 게 당연하지.”
그럼 나는 어디까지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함께 꾸리기로 약속한 가정을 언제까지 나 혼자 지키며, 아들을 돌보며, 싱글맘처럼 지내야 하는 걸까.
“결혼한 사실을 잊고 전 애인까지 만나고.”
“아무 일 없었다잖아.”
“대체 그 ‘아무 일’은 뭘 말하는 거야?”
모에카는 알면서 뭘 묻냐는 식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네가 말한 그 ‘일’이 잠자리를 말하는 거라면 ‘아무 일 없었다’라는 건 ‘아직은 안 했다’라는 뜻이야. 어떤 이유로든 나 모르게 전 애인을 만났다는 건 마음에 여지가 생겼다는 거고, 전 애인뿐 아니라 그 누구라도 이제 그 자리에 들어갈 수 있으며, 그만큼 우리의 이별은 시간문제일 뿐 정해진 미래라는 거지. 내가 묵인하고 살지 않는 한.”
그런데 난 묵인하고 살 맘이 없다.
“배신감 들고, 화나지. 아는데...”
“이혼을 결심한 건 그 일 때문만은 아니야.”
“그럼?”
결혼 후에 맞닥뜨린 외로움과 혼란스러움의 크기가 시간이 지나도 줄어들기는커녕 불어나고 있다는 것.
“말하자면 그런 거야. 크루즈 여행을 간다고 생각하고 출발한 여행인데 환상적인 바다 풍광을 즐긴 건 단 며칠이고 금세 그 바다가 그 바다 같은 지루함이 이어지다, 폭풍우를 만나 어디로 휩쓸리는지도 모르게 쓸려서 무인도에 툭 던져진 느낌.
“...... 다 그렇지. 국제결혼 한 사람들이 느끼는 그 감정.”
“너도 그래?”
나의 물음에 모에카는 코만 찡긋거리고 입을 다물었다. 인정하는 순간 터져버리는 폭탄을 안고 있는 사람처럼.
나는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왔을까? 가족도, 친구도, 하던 일까지 모두 내팽개치고 이 땅을 선택했던 그 꿈과 열정은 어디로 가고 목표도 계획도 없는 사람처럼 살고 있나. 정말 그만큼 기욤을 사랑했을까.
나는 요새 밤마다 그 시절 나를 찾아다니는 꿈을 꾼다. 간신히 찾은 과거의 나에게 무슨 생각이었냐고, 어떤 다짐이었냐고 다그쳐 묻는데,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만큼이나 대책 없이 아무 말도 못 하고 멍하니 서 있곤 한다.
“그래서 정말 이혼한다고?”
사실 우리의 사랑이 영원할 거라 믿으며 결혼한 건 아니었다. ‘다름’이 주는 신선함으로 시작된 사랑은 시간이 흐를수록 생기를 잃을 수밖에 없고, 문화와 언어, 식성의 차이로 생기는 피로감은 점점 누적되어 함께하는 시간이 곤욕스러운 지경에 이르는 걸 자주 보았기 때문이다. 결혼한다 해도 새로운 관계에 열린 자세를 유지하자-서로에게 지쳐 다른 사람을 원한다면 미련 없이 놓아주자-고 기욤에게 제안했던 것도 나였다. 물론 결혼과 출산을 지나 나이가 지긋해지면서 새로운 인연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가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만큼이나 판타지 같다는 걸 깨달았지만.
“당장은 못 해. 10년짜리 거주증 받자마자 할 거야.”
기욤의 배우자가 아니라면 나는 프랑스에 살 자격을 잃을 수도 있다. 기욤 없이는 난 정말 아무것도 아닌 존재, 여기에 살 수도 없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 어쩌다 이렇게 미미한 존재가 되어버렸나 스스로도 놀랍고 한심하지만 버텨야 한다. 내 맘대로 하는 건 집을 나온 것까지만이다. 에디를 위해서라도 더 이상의 후회를 만들면 안 된다.
“그런데 왜 벌써 집을 나왔어?”
집을 나가겠다 했을 때 기욤은 내 마음이 풀릴 때까지 자기가 다른 곳에서 지내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원래도 낯설었고, 지금은 더욱 낯설어져 버린 그의 집에 머물며 그를 기다리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이렇게 열악한 환경으로 이사하게 되어 에디에게는 미안하지만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 집에서 새롭게 시작하기는 힘들지.”
빵에 리예뜨(rillettes:고기로 만든 페이스트)를 발라 건네자 모에카는 질색하며 손사래를 쳤다.
“리예뜨는 너무 기름지고 느끼해.”
그녀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빵을 조금 잘라 입에 넣었다. 날씬한 몸매는 아무에게나 허락되는 게 아니라는 걸 몸소 보여주듯. 살이 안 찌려면 살찌는 음식을 태생적으로 싫어하던가, 아니면 먹은 만큼 몸을 움직이던가, 그것도 아니면 먹어도 안 찌는 체질로 태어나야 한다는 것. 모에카는 이 세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사람이고, 나는 그 무엇에도 해당하지 않아 늘 노력해야 하는 사람이다. 지지리 운도 없는 나로서는 이걸 먹으면 안 되는 데 하면서도 기름과 살코기가 1:2 비율인 리예뜨를 빵에 듬뿍 발라 입에 넣고 있다. 잘 먹어야 제대로 된 수가 떠오를 거라 위안하면서. 집까지 뛰어가야지 결심하면서.
상아색 크림소스에 버무려진 송아지 고기가 탐스럽다. 나는 내 앞에 놓인 오리 다리를 자르면서도 모에카의 송아지 고기를 눈독 들이고 있다.
“느끼한 거 싫다며?”
“크림소스는 다르지.”
누구나 모순적인 면이 있지만, 모에카는 그냥 완전무결한 모순덩어리라 봐도 무방하다. 내 기준으로 뭐 하나 쉽게 이해되는 면이 없다. 극우주의 성향을 내게 들킬 정도로 자국에 대한 비틀린 애국심이 강한 사람이 일본에서 사는 건 극도로 꺼린 달지, 사람들의 시선을 과하게 의식하면서 패션은 지나치게 과감 하달 지, 독실한 가톨릭 신자임을 자부하면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 전 세계 미신을 다 믿는 달지, 하는 등.
“그럼 이제 너희 레스토랑에는 안 나가는 거야?”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모에카에게 물으려던 참이었다.
“혹시 우리 어머님이 뭐라고 하셔?”
내 물음에 모에카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아꼈다.
기욤 어머니는 프랑스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결혼 전까지 일본에 살다 결혼 후 프랑스로 건너왔지만, 아직도 프랑스인이라기보다는 일본인에 가까운 분이다. 지금도 이곳 랭스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의 가장 중심에서 일본과 관련된 모든 행사에 참여하시고, 동포들을 위해 냉동 생선이나 훈제 생선, 어묵을 한꺼번에 주문하여 격주 목요일마다 배분하는 등의 소소한 일도 맡아하신다.
기욤이 일하는 레스토랑은 프랑스인 아버님과 일본계 프랑스인 어머님이 함께 운영하는 레스토랑으로 프랑스 요리에 일식을 접목한 퓨전 요리로 유명하다. 아버님과 어머님 모두 유명한 요리사여서 이미 소문난 레스토랑이었는데, 기욤이 TV에 나오기 시작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이제 기욤은 레스토랑에서 요리하는 시간보다 전 세계를 다니며 이국적인 재료로 새로운 요리를 선보이는 TV 프로그램이나 유튜브 방송을 찍는 시간이 더 많아졌고, 기욤의 인기 덕에 레스토랑의 인기도 수직으로 상승하여 ‘랭스에 가면 꼭 들러야 할 곳’이 되어버렸다. 그 덕에 많은 해외 여행객들이 레스토랑을 찾으면서 영어로 응대해야 할 일도 많아졌고, 얼결에 나까지 레스토랑 일을 돕고 있었다.
나는 원래 미술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영어학을 전공했다. 기왕 공부한 거 제대로 해 보고 싶어서 통역 대학원에 가려 했지만, 입학은 쉽지 않았고, 기약 없이 공부하는 것을 못마땅해하던 부모님의 반대로 결국 포기하고 취업했었다. 그렇게 집과 회사를 오가며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도 오늘 같을 날을 살다가,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시도도 안 해 보고 죽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훌쩍 프랑스로 왔고, 어찌어찌 미대에 들어가 나보다 한참 어린 학생들과 학점 경쟁에 코피 흘리며, 충동적인 결정을 무모하게 강행한 것을 후회하던 어느 날 기욤을 만났다. 상황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귀신에 홀린 듯 사랑에 빠졌고, 졸업도 내팽개치고 결혼해 버렸다.
이렇게 내 인생의 중요한 일들은 모두 순간적인 기분에 좌우되어 후다닥 결정되었고, 나름 깊이 있게 고민했던 적은 아이러니하게도 부모님의 반대로 결정이 유보되었을 때뿐이다. 이제 내가 뭘 하고 싶다고 말하면 다들 저러다 말겠거니 하며 귓등으로도 안 듣는데, 무척 억울하지만, 자업자득이란 걸 알기에 서운한 티도 못 내고 있다.
“요새 레스토랑에 외국 손님이 정말 많이 오나 봐.”
내 눈치를 살피던 모에카가 슬며시 레스토랑 얘기를 다시 꺼냈다.
“나 없어도 별문제 없어.”
“우리 고객이 될 수도 있는데 놓치는 거잖아.”
모에카는 일본인을 대상으로 여행 사업을 하다가 요새는 다른 나라의 여행객도 받으면서, 한국어나 영어가 필요할 때면 내게 일을 맡긴다. 미술을 못 하게 했던 아빠를 원망했지만 사실 지금까지 어디 가도 밥 굶지 않고 살 수 있는 건 영어를 전공한 덕분이니 아빠가 옳았던 걸 수도 있겠다.
“내일 10시에 파리에서 한국 분들 오면 기차역에서 바로 에페르네(Épernay)로 가야 해. 샴페인 하우스는 예약해 뒀어.”
나는 접시 옆에 놓인 샴페인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작은 기포가 바닥에서 줄지어 올라오고 있다.
“다들 정말 맛있어서 마시는 걸까?”
모에카의 붉은 입술이 노란빛 샴페인에 닿는다.
“사실 관광객들한테 맛을 설명할 때 반은 지어내. 과일 향이 강하다. 끝 맛에 너트 향이 돈다. 초콜릿 향이 포도 향을 감싼다. 나도 이해할 수 없는 내 말을 듣고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여. 정말로 동조하는 표정으로 말이지. 그 동조는 허영일까 예의일까?”
“정말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지. 듣다 보면 그런 거 같을 때 있잖아.”
모에카가 샴페인 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이 샴페인은 딸기와 오렌지의 풍성한 과일 아로마가 훌륭하네. 끝 맛에서 느껴지는 시트러스 향도 매력적이고.”
나는 다시 샴페인 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그렇게 들으니 또 그런 것도 같다.
“응. 근데 마지막에 찰나처럼 스치는 향이 이색적이네. 전문가가 아니면 쉽게 느낄 수 없는 아주 미약한 향인데 굉장히 특이해. 그치?”
모에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샴페인을 홀짝인다.
“어? 진짜 좀 신기한 향이 나는데?”
“너도 느꼈어? 정말?”
“마카다미아 향 같은 너트향에 민트향이 살짝 도는 걸 말하는 거지?”
“그거 말고 좀 더... 특징적인 향이 있어.”
모에카가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잔을 들었다.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열흘 신은 양말을 담근 물에 딸기잼과 디종 머스터드를 섞은 향이랄까.”
나의 대답에 모에카가 가늘게 눈을 흘긴다.
“하여간 못됐어.”
“너야말로 장난해? 이 술에서 딸기 향, 오렌지 향, 시트러스 향, 마카다미아 향, 민트 향을 다 느꼈다고?”
에디가 커서 내가 이 도시를 떠나게 될 즈음이면 나도 샴페인 맛에 도사가 되어 책에서 설명하는 저 향들을 다 느낄 수 있으려나.
나는 샴페인 잔을 들어 살짝 트월링을 한 후 다시 맛을 음미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