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여자 말고 사람
<연재소설> 땡감이 영그는 시간
학부모 총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에디는 고모 오드리와 체스 게임 중이었다.
오드리는 에디가 집에 혼자 있는 날이면 종종 와서 에디와 놀아주곤 하는데, 저녁 메뉴를 물은 후 올지 말지 결정하는 걸 보면 돌봐주는 건 핑계고 한식을 먹으러 오는 것 같기도 하다.
“그냥 싸우고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진짜 나와버렸네?”
오드리는 거실로 들어온 날 쳐다보지도, 인사를 건네지도 않고 체스판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문을 열었다. 에디가 체스 말을 손에 쥔 채 나와 오드리를 번갈아 보기 시작했다.
“에디, 숙제 먼저 하고 올래?”
“아직 게임 안 끝났는데?”
“숙제가 먼저야. 숙제 다 하면 다시 해. 체스판은 그대로 둘게. 어서.”
내가 채근하자 에디는 오드리에게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빨리하고 와. 기다릴게.”
오드리의 대답에 에디는 하는 수없이 방으로 향했다. 에디의 방문이 닫히자마자 오드리에게 다가갔다.
“얘 듣는 데서 이럴 거야?”
나의 핀잔에 오드리가 나를 뚜하게 바라보며 대답했다.
“따라 할 게 없어서 홧김에 이혼하는 걸 따라 해?”
나보다 두 살 어린 오드리는 결혼과 이혼에 있어서는 나보다 훨씬 경험이 많은, 말하자면 나보다 더 대책 없는 사람이다.
그녀와 나는 한국 댄스팀이 공연하는 극장에서 처음 만났는데, 옆좌석에 앉아있던 그녀가 내게 한국 사람이냐고 물었고 전화번호를 교환하면서 친구가 됐다. 그때 이미 오드리는 작품활동을 활발히 하는 화가였고, 나는 보자르(프랑스 국립 미술학교) 입학을 위한 포트폴리오를 준비하던 시기였는데, 그녀가 나의 포트폴리오 제작에 도움을 주면서 더욱 가까워졌고, 그 계기로 그녀의 오빠인 기욤도 만나게 되었다.
“나 오늘 자고 갈 거야.”
새로 이사한 집의 구조는 괴상하고 공간이 비효율적으로 나뉘어 있다. 거실이 집 크기의 2/3를 차지할 만큼 거대하고, 두 개의 침실은 한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정도로 좁다란 복도 끝에 붙어 있는데 침대와 작은 옷장 하나가 간신히 들어가는 크기다. 말하자면 방에는 그녀의 매트를 깔만한 공간이 없다.
“아직 소파도 도착하지 않았는데 어디서 잔다는 거야?”
“너 침대 트윈이잖아?”
“설마 같이 자자는 건 아니지?”
오드리는 정말로 자고 갈 생각인지 에디가 잠들자마자 와인을 땄다. 나는 장봉(jambon햄류)과 염소 치즈, 호두를 내왔다. 그녀가 호두 깎기로 호두 껍질을 바스락 깨고 알맹이를 꺼내 치즈 위에 올렸다.
“이사하니까 좋아?”
“좋긴.”
“이웃들은 어때?”
“위층에 두 집이 있는데, 한 집은 비어있고 한 집은 부부가 살아. 두 집 다 복층이고.”
“에디가 계단 없는 집에서 처음 살아보는 데 편한 점도 있지만, 다시 계단 있는 집으로 가고 싶다더라.”
“환경이 크게 변해서 낯설겠지. 그건 미안하게 생각해.”
“그러게 왜 대궐 같은 3층 집을 박차고 나와서 이런 좁고 후진 레지던스로 오냐?”
대화가 갑자기 원치 않는 주제로 튀었다. 오드리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가구가 아직 없는 텅 빈 거실을 휘 둘러보았다.
“너 진짜 기욤이랑 헤어지고 이렇게 살 거야?”
“서류 정리만 미룬 거지 이미 헤어졌다니까.”
“우기기는.”
“진짜래도.”
“기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던데?”
“......”
“그렇게 이혼하고 싶어?”
“내가 지금 어떤 기분인지 네가 더 잘 알 텐데? 세 번이나 해 봤잖아.”
“뭐 이렇게 아픈 데를 훅 찌르냐?”
“......”
“넌 좋은 것 같아. 얼굴이 활짝 폈어.”
친구가 시누이가 되면 이런 게 불편하다. 그냥 하는 말인데도 시누이가 하는 말로 들리면서 고까워진다.
“기욤은 많이 힘들어하고 있어.”
“그럴 리가. 훨훨 날라고 날개를 풀어줬구먼. 뭐, 그동안도 자유롭게 날아다니긴 했지만.”
“카밀이랑은 아무 사이도 아니래.”
“뭐 그럴 수도. 근데 이제 관심 없어. 그 이유만으로 이혼을 결심한 것도 아니고.”
“그럼?”
“내가 그 집에서 잘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더라고.”
“무슨 말이야? 네가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내가 아는데.”
“바로 그게 힘들었어. 하고 싶은 일은 할 수 없고, 해야 할 일만 해야 했던 시간들. 나는 결혼을 위해 거의 모든 걸 바꾸고 변해야 했는데, 기욤은 자기 나라, 자기 집에서 자유롭게 친구들 만나고, 가족들과 왕래하며 자기 일만 하러 다녔어. 나는... 내 물건이라곤 거의 없는 낯선 그의 집에 우두커니 앉아 이제나저제나 남편을 기다려야 했고 아이를 낳은 후로는 그 외로움이 더 커졌어. 아버님도 어머님도 좋으신 분들이고, 친구인 너도 큰 의지가 되었지만, 내가 결혼해서 에디를 낳은 건 기욤과 함께 가정을 꾸리고 싶었던 거지 나 혼자 가정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아니잖아.”
“......”
“기욤이 묻더라. 자기의 성공이 행복하지 않냐고.”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오드리가 마른 입술을 달싹거리다 와인을 훅 들이켰다.
“맞아. 난 별로 행복하지 않았어. 그의 성공이 감사하고 기쁘긴 한데, 개인적으로는 그리 행복하지 않았어.”
“감사하긴 한데 행복하진 않다?”
“어떻게 그게 가능할 수 있을까, 너도 궁금하지? 나도 결혼하고 나서야 느낀 감정이야. 결혼으로 허락된 모든 것에 감사하지만 대리 만족만 해야 하는 삶은 공허하다는 거.”
“기욤이랑은 이런 얘기해 봤어?”
“응. 근데 이해하기 힘든가 봐. 자기는 뭐 밖에서 일하는 게 마냥 행복하기만 한 것 같냐고, 자기도 요새 엎어진 프로젝트 때문에 스텝이 꼬여서 난감하대. 나는 그 말이 무지 부럽더라. 달리는 차에서 방향 좀 바꾸는 게 뭐가 어려워? 고물이 되어 멈춰버린 차에 시동 거는 게 어렵지.”
그럼 나는 왜 움직이지 못하는 고물차가 되었을까.
웬만한 이유로는 멈추지 않고 달리는 기욤을 보며, 그처럼 열심히 사는 사람에겐 반드시 커다란 열매가 있을 거라고 확신하고 존경했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가 멈추지 않고 달릴 수 있는 건 내 덕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해받지 않고 거침없이 나아가도록 물심양면 배려해 준 건 나였으니까. 안정된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일상적으로 해야 하는, 필수적이지만 쉽게 폄하되는 온갖 소모적인 일들, 말하자면 숨 돌릴 틈 없이 돌아오는 삼시 세끼랄지 청소랄지 하는 가사와 아이 목욕이나 산책 등의 육아, 그리고 생활과 관련된 모든 행정 업무와 가족 대소사 등 그가 없는 시간 속에 해 온 모든 일이 내 시간을 채우고, 나를 바꾸고, 종국에는 나의 꿈까지 묻어버렸다.
사실 기욤의 엔진도 종종 멈추기는 했다. 하지만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적절한 수리와 교육을 거쳐 부족한 면을 메꾸고 나면 다시 문제없이 출발하곤 했다.
반대로 나는 게으름에 갇혀 버렸다. 지루한 일상에 물들어 나태해진 나는, 당최 어떻게 나의 엔진을 고쳐야 할지 이제는 모르겠다. 과거의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기억을 뒤져보아도 답이 없다. 시간이 흘러 고장 난 부품을 대체할 부품이 더는 없는 것처럼. 나는 망가진 엔진 앞에서 어디로 가야 하나, 어디로 갈 수 있을까, 낯선 지도를 노려보며 서 있다. 출발을 위한 준비는 안 된 채 어디로 갈지만 고민하는 멍청이처럼.
오드리는 벌겋게 충혈되어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를 나무라고 있지만, 그녀도 나의 이별이 아프다는 걸 나는 잘 안다.
“그래도 우리는 계속 보는 거지?”
오드리가 두 손으로 내 뺨을 잡고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내가 너 없이 어떻게 살아?”
눈물이 날 것 같아 그녀의 손을 떼어내고 고개를 돌렸다.
“그럼 이제 멈춰버린 차에 시동을 어떻게 걸 거야?”
“다시 그림을 시작하려고. 이제 값비싼 카펫이나 가구에 물감이 묻을까 봐 걱정할 필요도 없고, 물감 냄새 때문에 짜증 내는 사람도 없을 테니까.”
오드리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그림을 다시 시작한다고?”
“너처럼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게 아니라 성공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내가 좀 자주 와야겠군?”
그때 갑자기 벨 소리가 들렸다. 10시가 넘은 늦은 밤,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왠지 모를 불안감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요새 심장이 고장 난 듯 작은 일에도 심하게 두근거리는 게 아무래도 이상하다.
“누구지?”
현관문을 열자마자 알코올 냄새가 외부 공기와 함께 밀려 들어왔다. 문 앞에는 오드리와 똑같은 눈매의 남자가 서 있었다. 나보다 더 놀란 오드리가 동그래진 눈으로 기욤을 올려보았다. 오드리를 흘끗 본 기욤이 헝클어진 연갈색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잠깐 들어가도 돼?”
나는 대답 없이 문을 활짝 열어 그가 들어올 수 있도록 길을 내주었다. 기욤이 집 안으로 들어오면서 오드리에게 나지막이 말을 건넸다.
“둘이 있고 싶은데.”
오드리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현관 앞에 걸어둔 재킷에 손을 뻗었다.
“민, 내일 전화해.”
오드리 뒤로 문이 닫히자마자 견딜 수 없이 무거운 정적이 시작되었다. 어색하고 불편한 침묵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그냥 거실로 발을 옮겼다. 기욤도 내 뒤를 따라 거실로 들어왔다.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그는 참담한 표정으로 집을 둘러보고 있을 것이다.
갑자기 집안 공기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나는 테라스 쪽 통창을 조금 열었다. 찬 밤바람이 안으로 쏠려 들어오며 커튼이 휘날렸다.
“에디는 자?”
발그레한 입술이 느릿느릿 움직이는 걸 보니 그는 많이 취했다.
“응.”
“집 꼴이….”
거실 바닥에는 조립하다 만 가구 부품과 팔레트 등 화구(畫具)까지 널브러져 있었다. 선반만 완성했어도 이렇게 난리 통은 아니었을 거라고 변명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이 집이 아니라 내가 거슬리는 걸 테니까.
눈을 가늘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던 기욤이 나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좋아?”
자꾸 내게 좋냐고 묻는데 이 상황에서 내가 좋을 게 뭐가 있다고 이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다. 생각이란 걸 하고 질문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이 한심한 상황을 비꼬고 싶은 건지.
“뭐가?”
“하고 싶은 대로 해서 좋냐고.”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이 사납다.
“잘 모르겠어. 서서히 알게 되겠지.”
기욤이 두 주먹을 식탁에 대고 고개를 수그린다. 그가 입에서 내뱉은 한숨이 밤공기보다 더 차가울 것 같다. 바람에 커튼이 펄럭거려서 창문을 닫았다. 사위가 조용해지며 그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그가 닿을 듯 다가와 서 있었다.
“나 좀 믿어주면 안 될까?”
아직도 기욤은 그가 전 여자 친구 카밀을 만난 일에 대해 내가 과민하게 군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건 그냥 기폭제였을 뿐, 우리 문제는 이미 오래전부터 차고 넘쳤고, 더는 참을 수 없을 만큼 곪아 있었음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그가 다가온 만큼 알코올 냄새도 강하게 코를 찔렀다.
“많이 취한 것 같아. 맨 정신에 얘기하는 게 좋겠어.”
내가 등을 돌리자 기욤이 뒤에서 나를 끌어안았다. 그의 팔뚝이 가슴을 강하게 압박했다.
“나한테 여자는 너 하나야.”
그의 뜨거운 숨결이 귓불에 닿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라 전기가 오른 듯 온몸이 경직되어 버렸다. 내가 흔들리는 걸 눈치챈 기욤이 나를 끌어안고 키스를 퍼부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또 그의 어깨에 갇혀버릴 것이다. 나는 들숨을 머금은 채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나를 여자로 보지 말아 줘.”
이 말을 내뱉자 날 꽉 안은 기욤의 팔이 느슨해졌다. 그의 품에서 풀려난 나는 그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심하게 상처받은 눈빛이 나를 비난하고 있다.
“무슨 뜻이야?”
“......”
“설명해 줘.”
“아내, 여자, 엄마로 보지 말고 사람으로 봐줘. 하고 싶은 일이 있는, 너랑 똑같은 사람.”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던 말.
“나한테 더는 여자로 보이고 싶지 않다는 거야?”
충혈된 눈에 힘을 주니 실핏줄이 터질 듯 부풀어 올라 눈동자가 더 파래 보였다.
“우선은 그래.”
“우선은?”
“응. 남자와 여자가 아니라 그냥 사람으로 먼저 이해받고 싶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감도 못 잡는 걸 보니 언제나처럼 우리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네 탓이 아니야. 내 탓이야. 에디를 낳은 후 학업을 중단한 것도, 다시 복학하지 않은 것도 다 내 결정이었으니까.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원해서 한 결정이라기보다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거야. 나까지 아이를 두고 나갈 수는 없었어. 에디가 바쁜 아빠 엄마 밑에서 외롭게 자라게 하고 싶진 않았거든. 최선을 다해 살았는데 돌아보니 내가 없어진 느낌이야. 나는 이제 내가 누군지, 뭘 원하는지 모르겠어. 그런데 정확한 건, 더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거야. 바닥을 찍을 만큼 소모되고 나니 너를 보는 시선까지 달라지더라. 너를 원망하는 내가 싫어. 너의 행동 하나, 말 한마디에 상처받을 준비하는 내가 싫어. 내가 변해야 해서 나온 거야.”
“그럼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나를 위해 네가 할 일은 하나야. 에디하고 함께하는 시간을 늘려줘. 어린 시절 우리 아빠는 이랬어,라는 추억을 마음에 간직할 수 있도록. 내가 에디에게 해줄 수 있는 건 반쪽뿐이야. 게다가 나는 이제 조금 바빠질 거야. 그동안 넌 부지런히 경력을 쌓았으니 이제 그 정도는 조절할 수 있을 거라 믿어. 바쁜 거 알아. 하지만 이제는 아빠로서도 노력해 줘. 우리가 함께 낳은 아이잖아.”
“나는 지금 좀 혼란스러워. 네가 이 정도로 하고 싶은 일이 있는 줄은 몰랐어.”
큰 키의 기욤이 갑자기 성큼 다가서니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내가 얼마나 힘들게 프랑스에 왔는지, 무슨 이유로 왔는지, 누구보다 잘 알잖아.”
“그런데 넌 그만뒀고...”
“다 접을 만큼 널 사랑했으니까!”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날 퍼부을 만큼, 그렇게 어리석게.
갑자기 눈물이 솟았다. 서러웠던 것도 같다. 노래 가사 ‘더 많이 사랑한 죄’가 떠올라 울컥했던 것도 같다. 여하튼 나조차도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물이었고 기욤 역시 뜬금없는 눈물 바람에 당황한 듯 보였다.
“이제 나를 돌아보고 싶어.”
나는 대책 없이 용감했다. 국제결혼이 이렇게 삶을 송두리째 바꿀지 몰랐다. 아니, 자만했다. 아이를 낳아도 노력하면 어디서든 곧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고, 그마저도 내가 하고 싶은 일과는 거리가 멀었다. 게다가 한 번 끊겨버린 호흡을 다시 정상으로 되돌리긴 쉽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한 선택이었음에도 나와 에디를 위해 기욤은 뭐를 양보했나, 자꾸 곱씹으며 억울해했다.
“너의 아픔이 나에겐 잘 와닿지 않아. 카밀이 결정적 이유가 아니라면 도대체 뭐가 불만인 건가, 내가 바쁘게 일한 게 이혼 사유라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나도 억울해.”
나의 구구한 설명에도 그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국제결혼의 가장 큰 장점이다. 모국어가 달라서 말이 안 통하는 거라고 자위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의 억울함이 충분히 이해되기도 했기에 더는 반박하지 않았다.
“넌 정말 어려운 여자야. 그냥 에디 키우면서 내 카드로 마음껏 쇼핑하고, 내가 이번 달은 왜 이렇게 돈을 많이 썼냐 잔소리하면 토라지는 그런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왜 늘 그렇게 힘들게 사냐고 묻는 엄마가 떠올랐다. 무슨 대단한 삶을 살고 싶어서 그렇게 생고생을 하냐는 말. 나는 엄마의 물음에도, 기욤의 푸념에도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더는 가슴 가득 공허함을 품은 채 사는 것이 불가능해서, 아니 달리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몰라서 이렇게 사는 건데.
“너를 돌아볼 시간이 필요한 것 같으니 기다릴게.”
기욤이 한숨 쉬며 돌아섰다.
“기다리지 마.”
단호한 내 대답에 그가 나를 쏘아보았다. 자극하려 한 말이 아니었는데 단단히 화가 난 표정이다.
“기약 있는 일이 아니잖아.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아. 네가 기다리면 난 맘이 급해져. 원하는 사람, 자유롭게 만나. 그게 카밀이든 누구든.”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나는 그냥 기욤에게 더는 실망하고 싶지 않아 이쯤에서 포기하고 싶을 뿐이다. 그는 여전히 젊고, 매력적이며 성공한 남자다. 그를 향한 유혹은 내가 그의 곁에 있을 때도 늘 도사리고 있었고, 자리를 비운 지금은 더욱 노골적일 것이다. 나 스스로가 무척 작게 느껴지는 지금, 도전해 오는 여자들을 의연히 대처할 자신도, 꿋꿋하게 버텨낼 자신도 없다. 처음 사랑을 시작할 때는 비슷했던 두 사람이 시간이 갈수록 차이 나기 시작했다. 나 자신이 끝없이 초라하게 느껴지는 이 관계를 이제 그만 포기하고 싶다.
“정말 끝을 보자는 거야?”
기욤의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다. 어쩌면 이혼의 책임은 모조리 나에게 있는지도 모른다. 어디서 어떻게 왜 시작됐는지 모를 이 자격지심 때문에.
“......”
“네가 이렇게 이기적인 엄마인 줄 몰랐어.”
이 말이 왜 안 나오나 했다. 나 역시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고, 나의 이기심에 스스로 놀라는 중이지만 기욤의 입에서 이런 비난이 나오는 건 언짢다. 그러면서도 미안했다. 남들보다 예민해서 모든 일을 어렵게 받아들이고 심각하게 반응하는 나를 이해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네 마음이 그렇다면 별수 없지.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없어.”
기욤은 빠른 걸음으로 거실을 가로질러 현관을 빠져나갔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눈이 너무 부어서 잘 떠지지 않았다. 이 몰골로 K의 집에 어떻게 가나 고민되었다. 에디도 내 얼굴을 보자마자 걱정 어린 눈으로 엄마 울었어, 무슨 일 있어, 어디 아파 등의 질문을 해댔다. 하필 등굣길에 모에카까지 만났는데, 난처한 나와 달리 에디는 나엘을 보자마자 신나서 방방 뛰며 학교로 뛰어가 버렸다. 모에카에게 부은 얼굴을 들키지 않으려고 나도 덩달아 뛰었다.
아이들이 교문을 통과한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모에카가 내 얼굴을 요리조리 살피며 킬킬 웃기 시작했다.
“왜 웃어?”
“이제야 현실감 있네.”
“뭐가?”
“울고불고해야 정상이지.”
모에카가 내 얼굴을 다시 쳐다보며 피식 웃었다.
“너는 내 이혼이 재밌지?”
“무슨 소리야? 사람 뭐로 보고.”
“그럼 왜 자꾸 놀려?”
“너희는 안 헤어질 거야. 더 오래, 더 잘 살려고 지금 이러는 거니까.”
“뭔 소리야?”
“어차피 부부면 누구나 넘어야 하는 산이라고나 할까?”
“얼씨구?”
“98세인 우리 할머니가 하신 말씀이 생각나네. 이런 고비들이 모여서 진정한 부부를 만드는 거라고 하셨지. 너희는 진정한 부부가 되고 있는 중이야.”
“그건 화해하고 다시 돈독해졌을 때나 할 수 있는 얘기지.”
“아니. 부부는 말이야 서로 죽여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 비로소 진정한 부부가 된다고 하셨어.”
“뭐?”
생각지도 못한 반전에 웃음이 터져버렸다. 내가 황당해하며 웃음을 내뿜자 모에카는, 우린 아직 멀었어, 앞으로 좀 더 증오해 보자, 그래야 빨리 진정한 커플이 될 거 아니니, 등의 실없는 농담을 했다.
“나 좀 봐봐. 많이 부었어?”
내가 부어서 잘 떠지지 않는 눈을 크게 치뜨자 모에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에디 없었으면 너인지 못 알아봤을 거야.”
“큰일 났네.”
“왜?”
“K가 오늘 아침에 차 마시러 오라고 했거든. 너도 같이 갈래?”
모에카는 깜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나는 됐어. 절대 싫어.”
“왜?”
“지난번에 나엘이랑 루이랑 플레이 데이트를 했었는데, 나엘이 루이 장난감을 실수로 망가뜨렸거든? 그랬더니 K가 여기저기 피어싱한 그 무서운 얼굴로 나엘 멱살을 쥐고 마구 흔드는 거야. 왜 그랬냐고 소리 지르면서. 미친 줄 알았다니까. 자기 아들도 아니고 남의 아들을 그렇게 막 대하는 사람이 어딨어? 필립한테 말했더니 다시는 상종하지 말라고 난리 났었어.”
나는 너무 놀라 입이 딱 벌어졌다.
“뭐야, 그렇게 무서운 여자를 나한테 소개해 준 거야?”
“고통은 함께 나눠야지.”
모에카는 약 올리듯 눈을 찡긋하며 건널목을 건너가 버렸다.
야외에서 아들의 팬티를 벗기고 때리는 것도 모자라, 아들 친구의 멱살을 서슴없이 틀어쥐는 무시무시한 여자랑 굳이 친해질 필요가 있을까, 그냥 아프다 하고 가지 말까 고민하다 약속을 갑자기 취소하는 게 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생각과 함께 그녀를 조금 더 알아보고 싶다는 얄팍한 호기심도 생겼다.
나는 결국 빵집에서 케이크를 하나 사 들고 K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