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논리 왕 에디
<연재소설> 땡감이 영그는 시간
<연재소설> 땡감이 영그는 시간
오후 4시 반, 학교 앞은 이미 아이들을 데리러 온 학부모들로 북적거린다. 교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다.
사람들이 제각기 모여 비즈(bise, 뺨에 입을 맞추는 프랑스식 인사) 한 후 담소를 나눈다. 나는 하루 중 이 시간을 제일 싫어한다. 아직도 누구와 비즈를 하고, 누구와 하지 않는 건지 잘 모르겠고, 타인과 뺨을 맞대는 것도 영 어색하다.
내가 비즈의 정확한 룰이 뭐냐고 물었을 때, 기욤은 그런 건 없다며 그냥 좀 기다렸다가 상대가 먼저 다가와서 뺨을 대려 할 때만 응하라고 했었다. 기욤의 조언대로 하니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돼버리는 느낌이다. 이 인사법이 불편하면서도 막상 상대방이 나에게만 비즈를 하지 않으면 맘이 상하고, 눈이 마주친 누군가가 선뜻 다가와서 뺨을 내밀면 어색하면서도 기분 좋아지는 건 왜일까.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을 때 누군가 다가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돌아보니 모에카의 남편이자 나와 에디의 가정의인 필립이다.
“모에카는?”
“오늘 일본 관광객들 오는 날이라 바빠.”
내가 고개를 끄덕일 때 학교 교문이 열리고 아이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이들 속에서 에디를 찾고 있는데 다시 필립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뭐 도울 건 없어?”
“응?”
“가구 조립 같은 거 말이야.”
“아직은 없어.”
“도움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고마워. 사실 그거 기대하고 너희 근처로 이사 왔거든.”
필립이 무언가 더 말하려 했을 때 교문이 열리고 에디가 뛰어나오는 게 보였다. 나는 재빨리 손을 들어 필립에게 인사한 후 에디 쪽으로 몸을 돌렸다. 사람들의 진심 어린 위로와 조언을 아직 온전히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자신이 없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가방을 던져둔 에디가 쿠키를 먹으며 투덜거렸다.
“나는 주말만 좋아. 정말 학교 가기 싫어.”
“왜? 무슨 일 있었어?”
“학교에서 배우는 건 다 멍청해.”
에디는 교장 선생님 권유로 유치원 과정을 짧게 마치고 조금 일찍 초등과정을 시작해서 여덟 살이지만 3학년이다. 다행히 어릴 적부터 친했던 모에카의 아들 나엘과 같은 반이긴 해도, 자기보다 한두 살 많은 애들과 한 반에서 수업 듣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런 말이 어딨어? 다 필요한 것들이야.”
“오늘 과학 시간에 선생님이 인류 최초의 사람이 누구냐길래 내가 손들고 아담과 이브라고 대답했더니 틀렸다는 거야.”
웃음이 나는 걸 간신히 참으며 진지한 표정으로 경청해 주었다. 에디가 논리적으로 따지기 시작하면 나도 가끔 당황할 때가 있는데, 왠지 지금이 그때가 될 것 같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쌀쌀맞게, 에디, 지금은 과학 시간이잖니. 이러면서.”
에디가 단호한 표정을 지은 선생님을 흉내 냈다.
“어제 교리 시간에는 아담과 이브가 최초의 인간이라고 했으면서 오늘은 왜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최초의 인류래? 그럼 아담이 오스트랄로피테쿠스였다는 거야? 뭐야 진짜. 사람 헷갈리게.”
투덜대는 에디를 보며 벌어지려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잘못했다가는 에디의 불평이 나에게로 향할 수 있다.
에디가 다니는 학교는 가톨릭 학교라서 교리 시간이 따로 있다. 내가 종교 교육을 따로 할 자신이 없어서 사립 가톨릭 학교를 선택했는데, 에디가 교리 교육을 받을수록 어려운 질문을 하는 통에 난감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수학이나 지리 등 일반 과목이야 정답이 비교적 정해져 있으니 설명하기 쉽지만,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신다고 했는데 아프리카에도 계신 게 맞나요?”, “하느님은 우리 모두를 사랑한다고 하셨는데 왜 아픈 아이를 구해주지 않나요?”와 같은 질문을 할 때면 말문이 막혀버린다.
에디에게 이런 질문을 받으면 나는 독실한 신자를 찾아가 답을 구하거나, 생전 안 읽던 종교 서적을 뒤적이게 된다. 이런 걸 배우라고 교리 시간이 있는 학교를 선택한 건데. 어쩌면 이 학교를 선택한 건 내가 아니라 그분의 계획일 수도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랬다 저랬다 바뀌는 내용을 우리가 배워야 해?”
“헷갈려서 답답했구나?”
“대체 어떤 게 맞는 거야? 아담과 이브야 아니면 오스트랄로피테쿠스야?”
“......”
“아담과 이브가 정말 있기는 했었어? 선악과를 따 먹어서 우리가 태어난 것도 다 지어낸 얘기지? 나는 이제 성경에서 하는 말을 하나도 믿을 수가 없어.”
심각한 표정으로 눈을 말똥거리는 에디에게 뭐라고 말해줘야 하나 난감했다. 나 역시 그 난제에 대해 아직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정답이 뭔지, 어떻게 말해야 네가 이해할 수 있을지, 아니 내 생각이 맞기는 한 건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의문이 생길지라도 의심하지 않는 것으로 하느님을 향한 내 마음을 증명해. 그것만이 내가 받고, 누리고 있는 것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하거든.”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진정으로 사랑하면 의심이 드는 순간에 더 크게 믿는 거. 그게 사랑의 도리고, 의리라는 거지. 꼭 그래야 한다는 게 아니고, 그냥 나는 그렇다는 거야.”
에디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아직은 내 말을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어쩌면 나는 에디가 내 아들이라는 이유로 내가 선택한 신앙과 신념을 강요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더 말한다면 지나친 설득이 될 거고, 그렇게 강요된 신앙이야말로 별 의미 없다는 걸 잘 알기에 설명을 멈추기로 했다. 조금 천천히 받아들이더라도 스스로 느끼고 마음을 열 수 있도록.
다행히 에디는 이 문제에 대해 더는 질문하지 않았다. 모든 의문이 풀릴 때까지 질문을 멈추지 않는 아이인데 웬일일까 조금 의아했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었다. 이 이상 더 해줄 말이 없기 때문이다.
저녁을 차리는 내내 에디는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금요일 방과 후에 TV를 보지 않고 방에 조용히 있는 일은 드문데 이상한 일이었다. 내 생각보다 아담과 이브가 심각한 문제였나, 얘가 왜 갑자기 종교 문제에 심취해서 이러나, 여덟 살 남자아이에게 창조론과 진화론이 이렇게 중요한 문제인가 의아해하며 에디 방으로 향했다.
에디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침대에 누워있었다.
“오늘 학교에서 다른 일도 있었어?”
내가 들어가자 에디가 벽 쪽으로 돌아누워 버렸다. 가만 보니 아담과 이브 때문이 아니라 나에게 맘이 상한 것 같다. 어떤 트집을 잡으려고 이렇게 공을 들이나 싶어 그냥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이럴 때는 외면이 상책이다.
“저녁 먹으러 가자.”
“안 먹어.”
“밥은 먹고 싶다고 먹고 안 먹고 싶다고 안 먹는 게 아니라고 했지? 엄마는 지금 저녁을 차릴 거고, 치울 시간 되면 치울 거야. 물론 네가 나중에 먹고 싶어 져도 다시 차려주진 않을 거고.”
나는 쌩하니 돌아서 방을 나왔다. 몇 분 뒤 에디가 방에서 터덜터덜 나와 식탁에 앉았다. 제일 좋아하는 메뉴인 오므라이스를 보고도 시큰둥했다. 나도 말없이 밥만 먹었다.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음이 틀림없다. 알지만 스스로 말할 때까지 묻지 않았다. 에디는 물으면 물을수록 입을 꾹 다물어 버리는 청개구리 같은 녀석이니까.
“십 분 뒤에 치울 거야. 그때까지 다 못 먹어도 할 수 없어.”
내가 식사를 다 마칠 때까지 에디는 오므라이스를 반도 못 먹었다. 한마디 더 하려다 그냥 빈 그릇을 들고 개수대로 향하는데 에디가 입을 열었다.
“그럼 엄마는 아빠를 진심으로 사랑한 건 아니네?”
순간 멈칫해서 돌아보니 에디가 숟가락으로 오므라이스의 달걀옷을 잘게 자르고 있었다. 눈에 잔뜩 힘을 준 채로. 한 번은 넘어야 할 산이란 건 알지만 이렇게 빨리 넘어야 할지는 몰랐다.
“진정으로 사랑하면 의심 드는 순간에도 믿음을 보여야 한다며? 하느님한테는 되면서 아빠한테는 왜 안 되는 거야?”
‘의심이 아니라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야.’
머릿속에 맴도는 이 말을 차마 내놓지 못했다. 나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상처받은 아들에게 더 큰 상처를 줄 수는 없으니까.
“사랑에는 여러 종류가 있어. 자식에 대한 사랑, 배우자에 대한 사랑, 친구에 대한 사랑 등, 생각보다 많은 종류가 있는데, 종류가 다른 사랑을 놓고 어느 것이 더 크냐, 왜 다르냐 그렇게 간단하게 비교해서 평가할 수는 없어.”
“과학 시간에 배우는 거랑 교리 시간에 배우는 게 다른 것처럼?”
그게 맞는 비유 인지 확신이 서지 않아 나는 그냥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럼 이제 아빠를 사랑하지 않아?”
“내가 어떤 말을 해도 네 맘에 들지 않을 거야. 근데 나랑 아빠 사이의 감정 때문에 너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변할 리는 없어.”
“내 질문은 그게 아니잖아.”
“......”
나도 내 맘을 잘 모르겠다. 사랑이 식은 건지, 마음이 변한 건지, 아니면 그냥 화가 난 건지.
“엄마 아빠가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게 너무 슬퍼.”
“나도 그래.”
“엄마도 슬프다고?”
“응. 어쩌면 누구보다 더.”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나도 모르게 너무 솔직해 버렸다. 내 대답에 에디의 표정이 변하지는 않았지만, 내 아픔을 느낀 듯 갑자기 내게서 시선을 거두고 열심히 오므라이스를 먹기 시작했다.
“그만 먹어도 돼. 아까 사 온 디저트 줄까?”
“이거 다 먹고.”
맛있게 먹는 척하고 있지만 억지로 먹는 티가 났다. 나는 디저트로 산 에클레르를 에디 그릇 옆에 놓았다.
“엄마 오므라이스랑 네 오므라이스가 바뀐 것 같아. 양이 너무 많네. 그만 먹어.”
에디는 마지막으로 한 숟가락 가득 떠서 입에 넣고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
9월 중순, 새 학년 새 학기가 되면 학년별로 학부모 총회가 열리는 데 나는 이 모임이 무척 부담스럽다.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 가면 불어가 더 어눌해지는 탓도 있고, 어쩐지 물에 둥둥 뜬 기름처럼 나만 겉도는 것도 같고, 기욤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들의 질문에 능청스레 거짓말을 할 수도, 그렇다고 헤어지는 중이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모에카가 같이 왔다면 이 부담이 반으로 줄어들 텐데, 그녀는 오지 않았다. 같이 가자고 애원해 봤지만, 그녀는 가기 불편하면 자기처럼 안 가면 되지 않냐고 대답했다. 모에카는 학부모 회의를 하등 쓸모없는 요식 행위-선생님과 학부모가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는 걸 과시하고, 서로를 염탐하는 자리-라 생각했고, 그 이유로 딱 한 번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회의에 참석한 적이 없다. 남들 일에는 열과 성을 다하면서 왜 아들인 나엘 일에는 저렇게 무관심할까 의아하면서도, 일단 결정하면 주변에서 뭐라 하든 밀고 나가는 그녀의 근성이 일면 부럽기도 하다.
여하튼 나의 간곡한 설득에도 모에카는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고, 덕분에 나는 어색한 미소와 진지한 표정을 수시로 갈아 끼우며 3시간을 홀로 버티고 있다.
옆에 앉은 학부형이 책상 속을 뒤지더니 소형 화이트보드를 꺼내 마커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들에게 남기는 그림 편지인 모양인데... 그렇다면 이 여자가 에디를 징글맞게 괴롭히는 가스파의 엄마일 것이다. 만나면 뭐라고 따질지 밤마다 연습했었는데 막상 마주하니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결국, 나는 연습해 둔 대사는 한 마디도 꺼내지도 못하고 앞만 보고 앉아있다. 지금은 회의 중이니 참는 거다, 이 자리에서 할 얘기가 아니라 안 하는 거다, 스스로 합리화하면서.
밤 9시 반, 총회가 끝나자마자 불에 덴 듯 벌떡 일어나 교실을 빠져나왔다. 나를 제외한 학부모들은 교실에 남아 친한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거나 담임 선생님께 몰려갔다. 대체 무슨 할 얘기가 더 남았을까? 세 시간이나 진행된 회의 후에 아직 궁금한 게 남은 게 신기하다, 궁금한 게 없는 내가 더 이상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이곳은 내가 스며들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밝고 왁자한 교실을 빠져나오자 어둠이 더 짙게 다가왔다.
홀로 깜깜한 학교 안뜰을 가로지르니 등줄기가 서늘했다. 서둘러 교문을 나서 골목길에 접어들었는데,
뚜벅뚜벅.
밤길에 누군가 내 뒤를 따라 걷는 게 느껴졌다. 집이 가까워서 그냥 걸어왔는데 아무리 가까워도 밤길은 예상보다 스산했고, 모에카가 괴한에게 납치될 뻔했던 일까지 떠오르며 오싹해졌다. 차를 가지고 올 걸 후회하며 불 켜진 담배 가게 앞에 발을 멈추었다. 뒤따르는 남자가 지나간 후 갈 생각이었다. 윈도우 안에 진열된 전자 담배를 보는 척하는데, 남자는 내 옆을 지나려다 멈추더니 내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에디 어머니시죠?”
“네?”
“저는 루이 아빠예요.”
“아, 네. 안녕하세요.”
남자는 키가 크고 훤칠한 체격에 안경을 쓴 말쑥한 신사였다. 에디 주변에 루이라는 이름의 친구가 많아서 어떤 루이를 말하는 건가, 잠시 머릿속을 뒤지고 있는데, 내 맘을 알아차렸는지 남자가 말을 이었다.
“저희 같은 레지던스에 사는 것 같아요. 에디랑 건물에서 나오시는 걸 종종 뵀거든요.”
같은 레지던스에 사는 에디 친구 루이가 누군지 여전히 모르겠다.
“제가 이사 온 지 얼마 안 돼서 레지던스에 누가 사는지 잘 몰라요.”
“K 아시죠?”
“K요? 아! 네, 알죠.”
K는 우리 건물 맞은편에 사는 여자로 얼마 전에 모에카를 통해 한번 만나 인사를 나눴었다. 랭스로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외롭다고 하기에 에디와 루이를 데리고 작은 놀이터에서 플레이 데이트도 했었다.
K는 이탈리아에서 유학할 때 독일로 여행 갔다가 프랑스 남자를 만났고, 결혼해서 쭉 독일에서 살다 최근에 남편을 따라 프랑스로 오게 됐다고 했었다. 그렇다면 이 남자가 K의 남편이라는 건데.... 플레이 데이트하던 날 K에게 받은 인상이 워낙 충격적이어서 이렇게 멀끔한 남자가 K의 남편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이탈리아에서는 무슨 공부를 하셨어요?”
놀이터 벤치에 앉아 에디와 루이가 줄넘기하는 모습을 지켜보다 어색한 침묵을 채워보려 K에게 먼저 질문했다.
“노래를 배웠어요. 공연도 하고.”
이탈리아에서 노래를 배웠다면 성악일 것 같은데, 검은 옷에 검은 눈화장을 하고, 왼쪽 눈썹과 아랫입술, 그리고 혀 한가운데 피어싱을 한 그녀의 외모는 성악과 어울리지 않았다.
“아직도 공연하세요?”
나는 그녀가 성악과 연결되어 있나 알고 싶어서 에둘러 질문했다.
“네, 가끔 해요. 예전만큼 자주는 못 하지만.”
아직도 공연한다면 성악 공연은 아닐 거 같은데, 그럼 헤비메탈 쪽인가? 헤비메탈을 하러 이탈리아로 유학 가는 사람도 있나 등의 의문이 머리를 꽉 채웠다. 무슨 종류의 음악을 했었냐고 물으려는데 K가 한숨을 푹 내쉬며 화제를 바꾸었다.
“랭스는 너무 따분해요. 도대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좀 답답하긴 하죠.”
그녀의 말에 대충 맞장구치긴 했지만 사실 나는 답답하지 않다. 다운타운은 적당히 활기차고 주거지는 한적한 이곳이 나에겐 딱 맞기 때문이다.
“답답할 때는 뭘 하세요?”
“글쎄요. 뭐 딱히...”
“랭스에서 1년을 살았는데 생각보다 더 갑갑해요. 공연하려면 파리로 가야 하고.”
랭스에서도 공연을 많이 하는데, 왜 파리에 가야만 한다는 건지 이해되지 않았지만, 그만큼 기회가 적다는 얘기일 테니 깊이 묻지는 않았다. 언어의 장벽 때문에 뭔가를 깊게 파고들어 질문하는 것도, 상대의 말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도 다 큰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때 아이들이 싸우기 시작했고, 나와 K는 아이들이 소리 지르며 밀치는 현장으로 달려갔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루이가 내 줄넘기를 하수구에 빠뜨렸어!”
스틸그레이팅으로 된 배수구 덮개 아래로 에디의 줄넘기가 보였다. 한국에서 사 온 줄넘기로 에디가 특히 아끼는 물건이다. 손잡이가 커서 억지로 발로 밟아 쑤셔 넣지 않으면 틈새로 들어갈 리가 없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우는 에디에게 다음에 한국에 가면 다시 사자고 말하고 있는데, K가 갑자기 루이의 팔을 우악스럽게 잡고 놀이터 가장자리 나무 수풀 쪽으로 끌고 갔다. 좀 타이르겠거니 하고 있었는데, 루이의 울음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돌아보니 K가 루이의 속옷까지 벗긴 채 맨 엉덩이를 손으로 때리고 있었다. 당장 달려가서 말리고 싶었지만, 엉덩이가 다 드러난 채로 맞고 있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루이에겐 더 상처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에디의 눈만 가리고 있었다. 에디보다 두 살이나 어리긴 해도 여섯 살인데 공공장소에서 팬티까지 벗기고 때리다니,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못 본 척해주는 게 서로에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잠시 망설였지만 명백한 학대를 보고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어서 K에게 다가갔다. 다행히 상황이 거의 정리된 듯 루이는 바지를 입은 상태였다.
“K 씨, 잠깐 얘기 좀...”
내가 말을 꺼내자마자, K가 말을 가로챘다.
“저희 먼저 가볼게요.”
“네?”
에디와 나는 충격이 할퀴고 간 자리에 오도카니 서서 방금 있었던 일이 정말 실재한 일인지, 아니면 잠시 뭐에 홀렸던 건지 어리둥절했다.
루이 손을 잡고 쌩 돌아서 가버리는 K의 뒷모습을 보며, 저 여자는 왜 훈육이 필요한 순간에 화풀이만 하고, 줄넘기를 잃어버려 속상한 에디의 마음은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리는 걸까 불쾌했고, 나는 왜 따져야 할 순간만 되면 말 한마디 못 하고 아, 네, 그렇군요, 이 단어만 되뇌는 건가 한심했다.
정신을 가다듬고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충격의 후폭풍이 꿈속까지 연결되어 그날 밤새 뒤척였었다.
말쑥한 남자가 다시 말을 걸었다.
“루이랑 에디가 집 앞 놀이터에서 놀았다죠?”
“네. 맞아요.”
“그날 제 아내랑 에디 어머님이 가까워졌다고 들었습니다.”
“맞아요. K랑... 얘기를 나눴죠.”
달갑지 않은 K에 대해 어떤 말을 해야 하나 난감해하고 있는데 남자는 환한 미소로 내 마음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랭스에서 계속 지내시는 거 괜찮으세요?”
“무슨 말씀이신지….”
혹시 기욤과 헤어진 후에도 같은 도시에 사는 게 안 불편하냐는 질문인지, 아님 전반적인 타국 생활의 고충을 묻는 건지 헷갈렸다.
“K는 랭스에 온 후 부쩍 외로워하고 있거든요. 먼 타국에서 사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닌데, 이런 소도시에서 사는 것도 처음이라 더 힘든가 봐요. 할 일도 없고.”
“여기가 좀 그렇긴 하죠.”
“에디 어머니도 비슷한 입장이니 랭스에서 지내시는 게 어떠신지 궁금해서요.”
“다행히 전 따분함을 좀 즐기는 편입니다.”
내 대답에 남자의 눈이 동그래지며 대화의 맥이 싹둑 끊겼다. 어색한 침묵이 시작됐을 때 남자가 다시 말을 이었다.
“K는 에디 어머니와의 만남이 무척 즐거웠다고 했어요.”
“... 정말요?”
대체 어느 순간이 즐거웠던 걸까? 혼이 쏙 빠져서 안절부절못하는 내 꼴에 일상의 따분함이 날아간 걸까?
뒤따르는 그림자가 괴한이 아닌 걸 알았으니 상점 앞에 서 있을 필요가 없었다. 우리는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으며 함께 집으로 향했다.
레지던스 주차장에 다다랐을 때, 크고 작은 그림자가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자세히 보니 K와 루이였다. 나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리고 그녀를 마주했지만, K는 얼굴 한가득 진심에서 우러나온 미소를 머금고 나를 바라보았다.
“학부모 회의는 어떠셨어요?”
그녀가 말하자 아랫입술에 달린 커다란 피어싱이 가로등에 반짝거렸다.
“뭐 매번 비슷한 얘기지요.”
나는 대답을 대충 얼버무리며 작별 인사를 건넨 후 서둘러 집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저기 내일 오전에 시간 되세요?”
“내일 오전에요?”
“네, 괜찮으시면 저희 집에서 차 한잔하실래요?”
K는 정말 내가 불편하지 않은 건가? 내가 꽁한 건지 그녀가 쿨한 건지 잘 모르겠다. 나는 아주 잠시 망설이다 흔쾌히 제안을 수락했다. 내 맘이 어떻든 우선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럼 애들 학교 보내고 9시에 오실래요?”
“네, 그럴게요.”
“그럼 내일 봬요.”
“초대 감사합니다. 저도 집이 좀 정리되면 초대할게요.”
그냥 돌아서면 될 걸 나는 또 쓸데없이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내뱉었다. 요새 새로운 사람을 만나 대화하는 것이 부쩍 서툴어지면서 헤어지는 순간만 되면 자꾸 이상한 제안을 하곤 한다.
커피 약속을 수락하자마자 K와의 어색한 시간을 잘 견뎌낼 수 있을까 고민되기 시작했다. 어디 무인도라도 들어가야 하나, 사람들 만나는 게 왜 이렇게 점점 힘들어지나, 혼자 조용히 숨어 있을 수 있는 작은 동굴 하나가 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