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켜켜이 쌓인다

by 화정

내게 일 년 중 발걸음이 가장 가벼운 달은 6월이다.

평일 저녁 운동을 마치고 동네를 한 바퀴 느릿느릿 걸으며 계절의 정취를 느껴본다. 담벼락의 새빨간 장미가 저물고 초록이 짙어지기 시작하는 봄과 여름의 중간 즈음, 작은 꽃송이와 들풀이 바람에 살랑거린다. 이름은 모르지만 눈에 익은 소담한 풀을 보니 어릴 적 기억이 밀려온다.




방학마다 연례행사로 한 시간 거리의 시골 할머니 댁에서 열흘씩 머물렀다. 대청마루가 있는 기와집에 푸세식도 아닌 밑으로 툭- 떨어지는 야외 화장실이 딸린 옛날 집이다. 평생 쌀농사를 짓고 밭을 일구는 농부로 살아오신 할머니는 사계절 내내 바쁘셨다. 한 시간 거리의 도시에 사는 우리 가족은 주말이면 시골로 내려갔다. 손 하나도 귀하다는 농사일이기에 어린 나도 어른들을 따라 나가 아침부터 해 질 녘까지 고구마도 캐고, 고추도 따고, 짐을 나르며 잔심부름을 했다.


시골에 가면 온종일 흙을 밟고 다닌다. 흙에는 도시의 시멘트에서 볼 수 없는 온갖 생명이 산다. 어른들 옆에서 손을 돕다가 힘이 들면 동생들과 드넓은 이랑 고랑을 뛰어다녔고, 땅에 사는 잡초며 곤충들을 보면서 긴 하루를 흘려보냈다. 해가 쨍쨍한 날 밀짚모자에 장갑을 끼고 덜덜거리는 경운기를 타던 기억, 대나무를 잘라 주렁주렁 달린 홍시를 따던 기억, 막내 고모 시집간다고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돼지를 잡던 날의 기억, 꽃밭에 날아든 호랑나비를 덥석 잡았던 기억. 들녘에 핀 꽃들을 꺾어 꽃다발을 만든 기억... 소소하고 풍성한 시골에서의 추억들이다.


엊그제 저녁 산책길, 도시 한가운데에서 무심코 피어있는 개망초 꽃송이를 본 순간 어릴 적 보았던 시골 전경이 한순간에 머릿속으로 찾아왔다. 흰 꽃잎 가운데 노란 꽃술이 있는 개망초 혹은 계란초라 불리는 들풀은 이맘때 흔하게 볼 수 있다. 당시에는 특별할 게 없던 날이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 저장되어 있었나 보다. 어쩌면 내가 마주한 삶의 순간들이 하나하나 기억 속에 남는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있는 공간의 장면이 사진처럼 찍혀서 나이테처럼 저장된다. 무의식의 어딘가에 남겨져 있다가 작은 힌트를 만나는 순간 의식의 수면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삶은 간단하게 생각하면 평범한 일상의 묶음이다. 종이를 한 장 한 장 묶으면 한 권의 책이 되는 것처럼 하루가 모여 오늘의 인생이 된다. 기분 좋은 일을 매일 하다 보면 행복도 일상과 함께 풍성하게 켜켜이 쌓일 것이다.



주말이면 종종 집 근처 도서관으로 간다. 한낮의 뜨거움이 한 풀 꺾이고 적당한 그늘이 내려앉을 때 건물 앞마당의 도서관 벤치에 앉아 책 한 권 꺼내 본다. 주변은 바람소리, 놀러 나온 아이들의 경쾌한 웃음소리가 들린다. 도시에서 듣기 좋은 소음을 배경 삼아한 구절 읽고 나서 고개들 들어 쉰다. 바람, 해, 하늘, 나무, 참새... 찰나의 순간 고요함 속에서 전체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온몸으로 계절을 느끼며 지금 이대로 좋다는 생각에 입 꼬리가 올라간다. 더 많이 성취하는 욕심이 아니라 마음을 비우는 여백에서 마음 깊이 충만함을 느낄 수 있다. 한 생각에 몰두하는 데서 빠져나와 오로지 ‘지금’을 보낼 수 있게 한다.


시골에서 자주 뛰어다녔던 경험 때문인지 자연을 보면 마음이 평온해진다.

걷기 좋은 계절에는 자주 걷고, 다니기 힘든 계절은 실내에서 창밖을 자주 내다본다. 별일 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 하루가 지난다. 몇 년 후가 지나 문득 올해의 봄이 떠오를 때, 오늘 보았던 개망초를 보았던 것처럼 즐거웠던 장면들이 많이 숨겨져 있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