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동네는 저녁 8시가 되면 간판 불이 꺼지는 작은 동네다.
건물이 낮고 골목길이 많아 한가로이 산책하기 좋다. 평일 하루 일과를 마치면 가로등 불빛 아래 고즈넉한 길을 따라 걸으면서 오늘 일과를 정리한다. 온몸에 힘을 빼고 긴장과 스트레스를 내려놓는 하루의 끝. 컴퓨터 모니터에 집중했던 눈도 휴식이 필요하기에 천천히 주변에 시선을 던진다. 작은 동네의 장점은 곳곳에 화단이 있어 계절마다 풍경이 달라져 산책이 심심하지 않다는 것. 주택가 낮은 담장 너머로 삐져나온 나뭇가지에서 새 잎이 돋아나고 낙엽이 떨어질 때까지 계절의 변화를 볼 수 있다. 이맘때, 여름의 정점이 지나고 가을이 오면 풀벌레 소리가 저녁 밤공기를 채운다. 지금처럼 선선하고 하늘이 높은 가을에는 시간이 가는 게 아까울 정도로 그냥 좋기도 하다. 음악 없이도 괜찮은 밤이다.
상점이 일찍 문을 닫으니 거리에는 지나가는 사람도 줄고 차들도 거의 없다. 가끔 마을버스 한 대 지나가는 소리만 크게 들린다. 요즈음 사회적 거리 두기로 외식이 어려워지고 배달이 많아져서 오토바이가 제법 늘었다. 주위가 워낙 조용하다 보니 부르릉~하고 지나가는 엔진 소리가 고개를 돌리게 한다. 주택가에 있으면 자동차 한 대, 오토바이 한 대 지나가는 소리가 이렇게 크다는 걸 새삼 알게 된다. 평소에는 왜 몰랐을까? 4차선 도로변만 나가도 쌩쌩 지나는 차 소리에 옆 사람이 말하는 소리도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시끄러운데 말이다. 그러고 보면 소음이 없는 게 아니라 익숙해진 탓이다. 소음으로 가득 찬 공간에 있으면 귀가 무감각해진다.
종종 출퇴근을 하는 일이 전투와 같다고 느낄 때가 있다.
아침에 거울을 보며 화장을 하고 다소 불편한 복장과 신발을 신으면서 마음을 다잡게 된다. 솔직하고 자유분방한 본래의 모습은 한쪽에 넣어두고, 사회인이라는 가면과 전투복을 입고 컴퓨터 앞에 앉아 일과를 시작한다. 타닥타닥 자판기 두드리는 소리로 시작되는 사무실의 아침. 각자의 이름 대신 직함으로 서로를 부르면서 필요한 만큼의 감정을 표현하고 적당한 미소로 대화를 마무리한다. 일상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 매일 비슷한 얼굴로 회의를 하고, 사무적인 대화를 하고, 업무를 하면서 스스로도 내 감각에 대해 무뎌지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사회생활은 모두에게 감정노동을 요구한다.
인적 드문 저녁, 밤 산책은 조용히 감각을 일깨운다.
일단 편안 옷과 운동화를 갈아 신고 길을 나선다. 걸음은 느긋하게 하고 몸에 힘을 뺀다. 전투태세처럼 긴장한 기분을 조금씩 벗겨낸다. 가만히 걸음에 집중하다 보면 주변의 작은 소리도 들리고, 거리의 소소한 변화도 눈에 들어온다. 온종일 내 주의를 잡고 있던 핸드폰도 내려놓고 나면 고요한 골목길에서 비로소 온전하게 나와 마주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일과 중에는 너무 많은 잡음에 가려 있던 감정들도 올라오기 시작한다. 사방이 조용할 때 바깥 소음이 잘 들리는 것처럼, 주변의 번잡함이 줄어들면 내면에 소리에 집중할 수 있다. 밤 산책은 감정을 조절하고 긴장했던 하루 일과를 끝내고, 혼자 마음을 가다듬는 의식이다.
‘이번 주까지는 보고서를 마무리해야지’
‘추가로 검토할 내용이 남았는데 이제 좀 지친다’
‘며칠 동안은 모니터 좀 안 보고 싶다...’
어떤 날은 계속 일 걱정이 이어질 때가 있다. 내일 할 일과 이번 주에 끝내야 할 것들이 머릿속을 꽉 채우면 정신건강을 위해 일부러 그만 생각한다. 어차피 일이란 하루 이틀 만에 끝나는 게 아닌데, 걱정한다고 해결될 것도 아닌데 나도 모르게 붙들고 있는 것이다. ‘
https://www.youtube.com/watch?v=uvy9T_coMYw
“내 몸의 실체는 신체이고, 내 존재의 실체는 감정과 느낌입니다. 감정은 내 내면을 드러내는 신호와 같습니다.”
유튜브 정혜신 박사님의 강연 ‘나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라는 제목의 영상은 감정의 중요성에 대해 알려 주었다. 감정은 날씨와 같이 변덕스럽고 종잡을 수 없어서 이리저리 흔들리는데 그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하다는 말이 위로가 되었다. 힘들거나 지친 마음이 일어날 때 ‘그래, 나 지금 힘들 만 해’라고 인정하는 경우는 잘 없다. ‘이 정도는 누구나 겪는 거야. 이겨 내야지’ 하는 이성이 먼저 개입한다. 가장 먼저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인지하고 들어주는 게 순서이다. 힘들다는 감정을 무시한 채 생각으로 해결하려고만 하면 그때 마음에 병에 생긴다.
솔직한 감정을 마주하기 위해 혼자 산책하는 시간은 갖는다. 짧게는 오늘 있었던 대화가, 멀게는 놓쳐버린 기회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때의 생각들과 내면의 감정을 들여다보면서 ‘그랬구나.’하고 짚어 간다. 나조차 미처 다독이지 못한 감정들의 응어리가 조금씩 풀어지는 기분이다. 간단했다. 내 감정과 느낌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치유는 시작되었다. 그래서 먼저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들어주려 한다.
걷다가 문득 석양 지는 하늘과 나무를 보면서 멍 때리면서 내 삶의 끝을 생각해 보기도 한다.
인생의 마지막을 맞이할 때 후회하지 않으려면 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
아등바등 바쁘게 달려왔는데 제대로 가고 있는 걸까?
유한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덜 화내고 더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고독은 성장의 힘이라고 한다. 내 경우 혼자 있을 때 문득문득 떠오르는 질문 속에서 현재의 나를 성찰해보기도 한다. 밖은 고요하지만 내면은 한없이 활발해지는 저녁의 골목길. 때로는 답답하고 무기력한 감정도 마주하지만 스스로에게는 솔직한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