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지방에 있는 본가에 내려가 며칠을 보냈다.
언제나 그렇듯 엄마의 보금자리는 따뜻했고 정성 가득한 집밥을 두 그릇씩 비우며 몸과 마음을 채울 수 있어 좋았다. 서울보다 훨씬 한적하기도 하고 어린 시절을 자라온 고향이라 그런지 버스 터미널이나 기차역에 내리면 나도 모르게 긴장이 풀리면서 한결 느긋해진 마음이 든다.
하루 저녁은 서로 밀린 일상을 공유하며 반가운 시간을 보내지만 다음날부터 문제는 시작된다. 이번에 마주한 엄마의 잔소리는 ‘체중’. 사실 최근에 3킬로가량이 찐 것은 나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나를 한 바퀴 휙 둘러본 엄마는 “요즘 살 좀 쪘다~”는 말을 시작으로 대화의 마지막은 기-승-전-운동해라 로 귀결되었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엄마 집은 남의 집이고, 과도한 관심은 받는 일은 제법 피곤한 일이라는 것을… 고향집에 내려가는 일은 편할 수는 있지만, 휴식과는 거리가 멀다.
쉼표 찍기. 휴식 여행
내가 생각하는 휴식의 조건에 대하여-
생활에서 벗어나 머리 좀 식힐 겸 휴식 여행을 떠날 때가 있다. 특별히 쉼이 필요해서 떠났던 여행은 제주도와 마카오였다.
# 푸른 빛깔의 위로, 제주도
‘하, 이대로는 안 되겠다’
도저히 숨 막혀서 질려버릴 것 같아서 떠났던 곳은 9월의 제주도였다. 제주공항 출구 게이트를 나서자마자 보이는 야자수를 마주한 순간부터 행복했다. 그 장소에서 멀리 떨어졌다는 사실만으로 숨이 쉬어졌던 기억이 있다.
제주도에 갈 때는 항상 좋은 동행이 있었다. 여동생과 처음으로 단 둘이서 떠난 여행이었고, 중학교 단짝과의 우정 여행이었고, 제주 곳곳을 다닌 친구가 엄선한 100프로 성공 여행이기도 했다. 지금도 그때 찍었던 사진을 열어보면 입꼬리가 올라갈 만큼 기분 좋은 이유는 내 표정 때문이다. 아무 걸림 없이 활짝 웃는 얼굴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 같다. 제주 자연만큼이나 무공해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하늘과 바다색이 에메랄드처럼 빛나는 제주의 푸른 색감이 참 좋다. 세화의 고운 모래 깔린 해변, 우도의 아담한 해안가 도로(땅콩 버거도 필수!), 공천포 한적한 분위기와 상상력을 자극하는 태평양 바다, 비자림 아침의 습기 머금은 상쾌함… 잠깐 사이 기억나는 것만 해도 이 정도이니 어느 계절이든 가서 느긋하게 바닷가에 앉아 한가득 기분 좋음을 눈에 담을 수 있는 최적의 휴식지이다.
# 화려함에 머물다, 마카오
몇 주 동안 주말까지 회사 업무가 이어질 때, 바쁜 틈을 뚫고 떠난 곳은 마카오이다. 갑자기 주말근무가 잡혀서 티켓을 취소하려다가 모처럼 친구와 맞춘 시간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 밤도깨비로 날아갔다. 출국하는 날, 토요일 주말근무에 막걸리 두 잔을 배에 채워 비행기에 올랐다.
연일 오르내리는 홍콩 시위와 갑자기 잡힌 근무로 반토막난 일정... 웬만하면 다음을 기약하며 마음을 접었을 테지만 그럼에도 이 여행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대학을 진학하며 각각 서울과 부산에서 살고 있는 친구와 나는 한국에서 보기가 힘들어 아예 외국여행 겸 만나기로 한 것이다.
자연스럽고 스스럼없는 대화가 이어지는 시간_ 버스를 기다리고, 거리를 걷고, 식당에 앉아 음식을 먹으면서 나누는 이야기들은 가볍게 털어놓지만 평소에 꺼내놓기 힘든, 가슴속 저 밑에 있는 것 들었다.
지금 바꾸고 싶은 것들에 대하여, 길을 잃은 듯한 막막함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고 싶은 삶에 대하여
당장 해가 바뀌면 시도해 볼 것들에 대하여, 지나간 사람에 대하여...그리고 여유 있는 여행의 감사함에 대한 거침없는 날것의 마음들.
이런 시간이 얼마나 감사한지. 이 여행을 통해 무언가 상황이 마법처럼 풀리지는 않겠지만 아무런 가림막 없이 편하게 대화할 수 있음에 위로가 되는 시간이었다. 이런 게 바로 여행의 마법이 아닐까. 삶에서 마주치는 파도의 풍파를 잠재울 수 없어도 그 높낮이를 인정하고 담담히 마주하게 만드는 고요한 위로의 시간. 힘듦을 이야기할 상대가 있음으로 해서 문제는 조금이나마 가벼워지고, 경청이라는 위로를 얻는다.
마카오 하면 호캉스! 코타이 지역의 호텔이 모여있는 쉐라톤에 숙소를 잡았다. 5성급 숙소는 처음이었는데 친절도는 물론이고 넓은 화장실과 도톰한 수건 등 사소한 디테일이 편했다. 잠자리가 바뀌면 보통 불편한데 여기서는 금방 적응해서 여독이 별로 없었다. 5성급 호텔은 처음인지라 신기했다. 기존에 다녔던 호텔들과 비교하면 뭐가 크게 다를까? 살펴보면 사실 크게 다른 건 없었다.
조금 더 넓은 화장실, 조금 더 뽀송한 수건과 가운, 조금 더 친절한 직원, 조금 더 신경 쓴 인테리어...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사소한 것들이 모여 큰 차이를 만든다. 매 순간 정성을 들여 살아야지-
호텔이 인접해 있어서 투어도 가능한데 명품 매장이 즐비해 있어서 아이쇼핑하는 재미도 있고 온종일 호사를 누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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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하는 휴식의 조건
- 일과의 단절. 연결되지 않을 권리. 내가 정하는 스케줄/ 시간
일단 쉴 땐 쉬어야 하니까. 휴가에서 일이 걸리면 몸을 떨어져도 마음을 붙들려 있다.
- 일상의 장소 벗어나기/ 공간
공간은 기억의 저장소와 같다. 공간에는 습관이 배어있다. 집은 생활의 공간이지 집중의 공간이 아니다. 카페에서 독서가 공부가 잘 되는 것도 그렇지 않을까. 일상의 반경을 떠나 새로운 곳에 머물 때, 새로운 만남과 생각이 떠오르기 쉽다.
- 나와의 연결
내 생각을 들여다볼 시간적 심리적 여유가 중요하다. 꼭 혼자가 아니라도 친구와 함께 할 때 속에 있는 이야기를 꺼내면서 정리할 수 있다. 앞에 두 조건도 이를 위한 전제조건이다.
시간과 공간이 자유로운 때, 일상에서도 이런 휴식을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오늘처럼 이렇게 저녁에 일기를 쓴다거나, 영화나 책에 몰입하다 보면 그것이 실마리가 되어서 이런저런 내면의 이야기가 풀려나갈 때, 주말에 별다른 일정 없이 한가로이 발길 닿는 대로 걸을 때…
매번 여행을 떠날 수 없으니 일상에서 쉼과 휴식 같은 여백을 만들어두면 좋겠다.
☞ 네이버 오디오클립 연재중 <휴식을 찾아 떠난 제주도와 마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