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노트 - 공간의 힘
1. 내가 있는 공간
한해의 마지막 12월에 접어들었습니다. 올해 초에 쓰기 시작한 마스크를 연말까지 쓸 줄을 몰랐는데, 해마다 조금씩 들썩이던 크리스마스 분위기 대신 집에서 조용히 올해를 마무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평일에도 재택근무를 하면서 정말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어요. ‘집콕 라이프’라고 하죠. 집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 특히 혼자 사람은 집 안에서 보내야 하는 날이 계속되다 보니 사람과 만나는 대신 통화를 많이 하게 되고, 집 안을 자주 살피게 됩니다. 집에서 근무할 땐 나름 안방과 거실은 휴식공간과 근무공간으로 분리해서 사용하려고도 노력하고요.
여러분의 공간은 어떤 곳인가요?
지난달에 이사를 하면서 공간에 대해 여러모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방을 알아보려 다니면서 공간의 의미, 느낌이 크다는 걸 느낍니다. 우리가 사는 장소를 선택하는 데에는 방의 크기나 지어진 지 오래됐는지 아닌지 하는 것들도 있지만 집의 분위기라는 것도 크거든요. 이곳저곳을 다니다 보면 단순하게 ‘따뜻한 느낌이 드는 집’과 ‘차가운 느낌이 드는 집’ 정도로 나눌 수 있을 거 같아요. 딱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왠지 아늑하고 머물고 싶은 곳이 있잖아요. 물론 내 조건에도 맞으면서 분위기까지 좋은 공간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아서 이사를 결정하기는 어려운 문제이죠.
‘장소가 달라지면 나쁜 쪽이든 좋은 쪽이든 사람도 달라진다’ 알랭 드 보통이 쓴 ‘행복의 건축’에 나오는 표현인데요, 이 책을 읽고 처음으로 공간. 장소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생각해 본 계기였습니다. 인간이 건축의 모양과 인테리어를 통해 공간의 색을 입히면, 역으로 공간이 우리의 정서(감정과 느낌)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전제로 이어지는 글인데요. 특히 도시는 자연이 배제되어 있잖아요. 자연을 대신하고 있는 건축의 형태가 인간의 정서에 어떻게 관여하는지에 대해 여러 사례를 통해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2. 공간의 역할
여행을 아주 간단하게 보면 새로운 공간으로의 이동과 머무름이죠. 여행이 중요한 이유는 좋은 장소가 우리에게 좋은 영향을 주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오늘은 공간의 의미와 역할에 대한 단어에 대해 생각을 나눠볼까 해요.
첫 번째는 치유의 공간, 케렌시아입니다.
케렌시아는 투우 경기장에서 소가 투우사와의 결전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쉬는 곳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스페인어로 피난처, 안식처라는 뜻의 케렌시아는 스트레스를 풀고 안정을 취할 수 있는 장소라는 의미로 쓰이는데요, 각자 자신만의 치유의 장소가 있으신가요?
저는 케렌시아 하면 어릴 때 살던 고향, 방학마다 가던 할머니 집 시골, 남해 바다, 제주도가 떠오릅니다. 크게 특별한 장소라기보다는 떠올리면 기본 좋은 추억이 있고, 또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을 느낄 자연이 있는 곳이 치유의 장소인 것 같아요.
그리고 멀리 가지 않더라도 지금 동네에도 하루 일과를 마치고 편한 신발을 신고 쓰윽 한 바퀴 산책하면서 편안함과 안정감을 느낍니다. 이년 전쯤 여기로 이사를 왔는데요. 가장 큰 이유는 산책하기 좋아서입니다. 저녁 9시가 넘으면 대부분의 상점들이 문을 닫아 도시의 소란스러움에서 살짝 멀어지고, 골목이 많아서 자동차보다는 걸어 다니는 사람이 다니기 편한 곳입니다. 건물이 낮아 낮에는 화창한 하늘에 흰 구름이, 저녁에는 핑크 빛으로 물드는 장면이 눈에 한가득 들어옵니다. 인왕산 쪽으로 바라보는 노을이 지는 모습도 참 편안하고요. 한여름의 뜨거움이 지난가을이면 저녁 산책길에 풀벌레 우는 소리로 들을 수 있습니다. 내 방에서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기분 좋게 말랑말랑해지는 기분입니다.
케렌시아가 가까운 곳에 자주 갈 수 있는 게 가장 좋겠죠. 그래서 여행지만큼 평소 어떤 곳에서 지내고 싶은지를 살피는 것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두 번째는 휴식 그 이상, 마음껏 꿈꾸는 창조적 놀이공간을 지칭하는 슈필라움입니다.
김정운 작가가 여수에서 쓴 에세이 <바닷가 마을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에 나오는 단어인데요, 독일어로 ‘놀이’와 ‘공간’이 합쳐진 슈필라움은 우리말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율의 공간’으로 소개되었습니다.
‘진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갖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작가의 말이 가슴에 와 닿는데요, 실제로 작가는 여수의 작은 섬에서 화실 겸 작업실을 만들어서 글도 쓰고 그림을 그리면서 살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온갖 새로운 가능성을 꿈꿀 수 있는 공간을 가져라’는 조언은 낭만적으로 들립니다. 그러려면 여유 공간과 시간, 두 가지가 다 필요한데 9 to 6 직장인은 일단 주말 휴일 정도의 시간이 있을 거고 공간은 따로 만들기도 쉽지 않죠.
그래도 나를 위한 슈필라움을 찾는다면 경치 좋은 바닷가는 아니지만 퇴근 후 들르는 집 앞의 카페가 아닐까 합니다. 직장에서의 누구, 사회의 역할이 아니라 개인의 나로서 순수하게 여러 가능성을 꿈꿀 수 있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침대의 안락함을 뒤로하고 책 한 권, 노트 한 권 들고 진짜 나의 관심사를 탐구하는 곳이라면 그곳이 우리의 슈필라움이 되지 않을까요.
관련해서 생각나는 시(時)가 있습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하루 종일 일한 후> (찰스 레즈니코프/미국 시인)
생활비를 벌기 위해 하루 종일 일한 후 나는 지쳤다.
이제 나의 일을 해야 할 날이
하루 더 사라졌구나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천천히, 천천히 나의 힘이 되돌아왔다.
그래, 밀물은 하루에 두 번 차오르지.
생활비를 버는 일도 물론 아주 중요하지만, 하루 종일 모니터 앞을 지키는 삶에서 충분함을 느끼는 못할 때, 어쩌면 ‘휴식’보다 더 필요한 것은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는 ‘추진력’ 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집에 돌아와 가방을 던져놓고 요가 수업을 가고, 땀 흘리며 운동을 하고, 마음속 뭉뚱그려진 생각을 글로 끄적거리며 적극적으로 내가 진정으로 즐길 수 있는 일에 몰두하는 시간을 늘려가는 것... 내 삶을 위해서 스스로 주는 과제가 필요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작은 불꽃이나마 두 눈을 반짝이며 열정을 갖고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이렇게 스스로 질문을 던질 여유가 있는 때가 요즘처럼 혼자 있는 시간이 아닐까 합니다. 나의 취향과 개성에 대해 알아보고 조금씩 내가 사랑하는 것들로 공간과 시간을 채워 나가다가 보면 우리의 일상이 슈필라움이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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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겨울은 체온보다 마음이 추운 겨울입니다. 멀리 떠나는 여행 대신 가볍게 몸을 움직이는 산책, 따뜻한 차에 책 한 권, 아니면 나만의 취미활동을 하면서 기분을 환기시킬 수 있는 활동이라면 그것이 코로나 시대의 작은 여행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여러분의 케렌시아, 슈필라움은 어떤 곳인지 한번 떠올려 보셔도 좋을 것 같고요.
☞ 네이버 오디오클립 연재중 <집콕 라이프, 공간의 의미를 생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