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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별 Nov 02. 2023

그렇게 시골 아지매가 되었다

  "우리 한 번 가보자."

  아는 전라도라고는 명절 때마다 고속도로 교통상황으로 들었던 광주, 목포가 전부인데, 가야 하는 곳이 영암이라고? 거긴 지도 어디쯤에나 붙어있는 동네인거지? 인천촌년을 영암촌년으로 바꿔준 우리 남편. 의사, 약사. 판사. 검사. 변호사, 교사, 회계사, 변리사 기타 등등.  이 중 하나면 참 좋으련만.  많고 많은 ‘사’ 자 중 우리 남편은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을 살리는 ‘사’ 자다.  이렇게 나는 남들이 크게 부러워하지 않는 ‘사’ 자 남편을 따라 머나먼 땅, 유배지 같은 곳 영암에 터를 잡았다.

     


   

  대학원 졸업을 앞둔 남편의 거처가 결정되었다. 공주의 한 교회에서 수련목회자로 일해보기로 한 것이다. 가기 전에 부모님께 제대로 된 식사를 대접하고 싶어 인천에 있는 한 호텔 식당에  예약을 했다. 아직 대학원생 신분인 남편과 그 뒷바라지를 하고 있는 나에게는 정말 큰맘 먹지 않고선 갈 수 없는 곳. 그래도 아빠에게 보여드리고 싶었다. 아빠가 걱정하는 것만큼 우리 힘들게 살고 있지 않는다고. 아빠에게 이만한 식사 정도는 대접할 수 있다고. 당신의 귀한 딸 데려다 고생만 시키는 도둑놈 같은 사위, 아빠 마음에 탐탁지 않은 그 사위가 이렇게 근사한 곳에서 식사 대접 할 테니 마음껏 드시라고. 남편도 나도 처음으로 친정식구들 앞에서 어깨 펴고 앉아 우아하고 고상하게 식사를 했다. 이 모든 게 처음이 아닌, 늘상 있는 가족 식사인 척하며. 내가 그날 본 트리는 지금껏 봤던 그 어떤 트리보다 크고 아름다웠고, 생전 처음 먹어본 음식들은 어찌 그리 다 맛있던지. 그날따라 맑음이 카시트 태우는 문제로 노심초사하지도 않았고 정말 모든 것이 완벽했고 행복했다. 이때까지는 몰랐다. 이게 우리의 마지막 만찬일 줄은.     

  

<출처: pixabay>


  징~징~. 집에 도착하자마자 걸려온 전화 한 통. 전라도 영암에 자리가 하나 있는데 그곳에 가볼 생각 있냐는 전화였다. 이미 수련목회자 자리를 구해놓은 상태라고 말씀을 드렸지만 단독목회 자리가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혼란스러웠다. 이미 이사날짜도 잡아놓았고 하루라도 빨리 왔으면 좋겠지만 일단은 수련목 시험 준비에 더 집중하라며 배려해 주셨는데 단독목회라니. 그렇게 알아볼 때는 안 구해지더니만 이제 와서. 지금 선택을 바꾼다면 우리는 배려를 배신으로 바꾸는 개념 없고 이기적인 사람이 된다. 고민 끝에 우리는 잠깐 배신자가 되더라도 더 빠른 방법을 선택하기로 했다. 수련목 자리를 구하는 사람은 많을 테고,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공부이기에 하루라도 빨리 과정을 밟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가야 했으니까. 수련목 시험을 보는 날, 우리는 감리사님을 만나러 영암으로 향했다. 이제는, 되돌릴 수 없었다.      

 좁디좁은 이 바닥, 우리가 옳은 선택을 한 걸까? 가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그러나 그 무거움이 경기도를 지나고, 충청도를 지나고, 전라북도를 지나며, 거리가 멀어질수록 설렘으로 바뀌었다. 결혼 후 시댁에 얹혀살았기에 신혼 같지 않은 신혼을 보냈는데, 이제 우리 세 식구만 살 수 있다. 무엇보다 영암으로 이사하게 된다면 시댁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고, 시어머니의 잔소리를 듣지 않아도 된다. 그래,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그렇게 4시간 반이라는 시간을 달려 도착해서 본 광경은 날 다시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것 같았다.     

 


 소똥 냄새가 진동을 하고 밭을 태우는 매캐한 냄새에 코가 마비될 것 같았다. 논밭의 광경은 삭막했고 모든 것들이 멈춰버린 것 같은 모습이었다.(아마도 겨울이라 더 그랬으리라) 어렸을 적 명절 때마다 갔던 강화 할머니 댁에서 느꼈던 아늑하고 따스한 모습이 아니었다. 시댁이랑 멀어진다고 철없이 좋아했던 내가 어리석게 느껴졌다. ‘아, 여기가 내가 살 곳이구나. 이게 현실이구나.’ 사택에 들어서자마자 냉기가 느껴졌다. 분명 집안인데 밖이랑 다를 것 없는 온도. 교인들의 신상정보들, 이곳에서 생활하기 위해서 알고 있어야 하는 생활 정보들을 알려주시는데 듣는 내내 내 머릿속은 너무 복잡했다. 분명 한국말인데 못 알아듣겠는 건 왜일까? 다시 4시간 반을 쉬지 않고 달려 돌아왔다. 전라도로 향할 때와는 다른  차 안의 공기를 나도, 남편도 느꼈으리라.(무엇보다 당일치기로 전라도를 다녀온다는 건, 생각보다 고된 일이다)      

  남편과 결혼을 결심했을 때 이런 과정을 겪어야 한다는 것쯤은 다 알고 있었고, 할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다. 아빠가 결혼을 반대했을 때, ‘고생 한 번 안 해본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자리일지 생각해 보라’는 말에도 보란 듯이 해내겠다는 굳은 결심을 했던 나였다. 하지만 막상 30년 가까이 살던 곳을 떠나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야 한다는 사실이,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외국으로 나가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몰려오는 외로움이 낯설었다. 며칠 전 호텔식사가 마치 한여름 밤의 꿈같았다. 호텔에서 우아하게 식사하던 내가 한순간 시골 촌구석으로,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곳으로 가야 한다니.     


  그 후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이사업체 알아보기, 버릴 물건 정리 하기. 이사 후 사용할 가전제품 사러 돌아다니기. 시간이 없었기에 가격비교, 성능비교 이딴 건 다 속 편한 소리였다. 아들 사역지가 궁금한 시어머니 물음에 응대하기, 가서 잘해야 한다는 잔소리 듣기, 갑작스러운 결정에 멘붕이 온 아빠의 심기불편한 짜증까지 받아내야 했다. 정말 폭풍우가 휘몰아쳐 오는 것 같았다. 친구들, 지인들과 제대로 된 작별 인사를 할 여유조차 없었다. 아이가 어릴 때 시골에서 흙 밟고 자라는 것도 나쁘지 않지, 좋은 공기 마시며 자연 속에서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아.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려 노력하며 두렵고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그렇게 모든 것이 2주 만에 마무리되었다.  

        


  새벽 5시. 눈발이 거세게 흩날린다. 오라 그럴 때는 그렇게 오지 않던 눈이 함박눈이 되어 펑펑 쏟아진다. 너도 참 눈치가 없구나. 가뜩이나 차만 타면 울어재끼는 맑음이를 4시간 넘게 데리고 가야 한다는 생각에 출발부터 진이 빠지는데 굳이 눈 너까지 보탤 필요가 있었니. 빨간 마티즈에 몸을 구겨 넣고 영암으로 향했다. 그렇게 나는 영암댁이 되었고, 아무것도 모르는 새댁은 12년 차 시골 아지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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