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가 남산만 한 여자들을 볼 때마다 눈길을 거둘 수가 없다. 어쩜 그리 사랑스럽고 예쁜지. 안 겪어본 일도 아니고 한 번도, 두 번도 아닌 세 번이나 경험한 일인데도 볼 때마다 부럽다. 그렇다고 또 애를 낳아 키우고 싶은 마음은 병아리 눈곱만큼도 없다. 어휴, 그 일을 또 하라고? 아이를 낳아 제대로 된 인간 하나를 만드는 일이 얼마나 힘든데, 억만금을 준다 해도 못 할 것 같다. ‘저 엄마 된대요.’ 이 한마디를 듣는 모든 사람에게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묘한 말. 그 말을 내뱉은 순간부터 세상의 중심이 되고 축복이란 축복은 모두 그녀의 것이며 아이를 품고 있는 동안에 온 우주의 중심이 되는 아름답고도 감사한 한마디, ‘저 엄마 된대요.’
집 앞에 새로 오픈한 헬스장은 1년 패키지로 끊으면 6개월 더 연장해 준다는 광고지를 수도 없이 뿌려댔다. 상담만 받고 오자는 계획은 안드로메다로 가고 몇 자리 안 남았다는 상담사의 뻔한 멘트에 홀린 우리.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두 손 담겨있던 할부 영수증과 그 뒤에 부끄러운 듯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는 PT수강증. 아, 근육 빵빵 맨의 꼬임에까지 넘어가버렸구나. 내가 태어나 그렇게 운동을 열심히, 고강도로 한 적이 있던가. 이왕 시작한 거 꼭 십일 자 복근을 만들리라, 매끈한 팔뚝을 마주할 것이고 내 다리에 그득그득 붙어있는 셀룰라이트에게 이별을 고하고 말리라는 각오로 정말 열심히 운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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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너무 무리했나? 왜 이렇게 졸리지? 이렇게까지 피곤한 적이 없었는데. 오늘은 너무 달렸나 보다.’ 미친 듯이 잠이 쏟아졌다. ‘배도 살살 아픈 것이 여자의 날이 곧 시작되려나. 이번 달에도 좀 늦네.’ 원체 나의 몸은 불규칙이 규칙인 사람인지라 그달에도 또 늦어지나 보다 했다. 평소보다 아픔이 심한 거 보니 이번 달 생리통도 거하게 맞이해야겠다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데, 뭔가 이상하다. 느낌이 싸하다. 약국에 가서 임테기를 달라고 말하는 내 목소리가 떨린다. 죄를 지은 사람 마냥, 속삭이듯 말하곤 누가 볼까 봐 가슴팍에 숨기고는 두려운 마음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달려왔다. 선명하게 그어진 두 줄. 드라나마 영화에서 보면 기뻐 날뛰고 환호하고 행복해하며 부부가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 콧물 쏙 빠지던데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은 대체 뭘까?
임신 5주. 유산의 위험이 있으니 당분간은 꼼짝 말고 누워있으라는 의사의 말이 왠지 사형선고 같이 느껴졌다. 아 맞다. 우리 결혼 1주년 기념으로 괌여행 예약해 놨는데, 꼼짝도 말라고? 그럼 우리 여행은? 지금의 나라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다녀왔을 여행인데 그때는 의사 선생님의 말을 듣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은 마음에 0.1초의 망설임도 없이 모든 예약을 취소했다. 아가야, 그 돈을 벌기 위해 나는 몇 달을 쌔가 빠지게 일하는데 너는 태어나기도 전에 너의 존재만으로도 몇 백을 쓰는구나. 넌 나중에 큰 인물이 될 거야.
병원 다녀오는 길에 막 외출하려는 시어머니를 만났다. 남편은 어머님께 기쁜 목소리로 새 가족의 소식을 알렸고, 그 순간 흔들리는 시어머니의 눈빛을 난, 읽고 말았다. 입으로는 축하한다고 말씀하셨지만 눈은 이미 동일본대지진만큼 흔들리던 그 동공, 그 눈빛을. 왜 나는 어머님의 입술이 아니라 눈을 먼저 바라보고 있었을까. 아마도 사람의 진심을 전하는 데는 언어적 표현보다 비언어적 표현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당시 남편은 대학원생이었고, 졸업까지는 일 년이라는 시간이 남아있었다. 남편은 신학생 신분으로 파트타임 전도사로 일하고 있었고, 전도사 페이로 비싼 대학원 등록금을 마련하기란 쉽지 않았다. 결혼 후 어머님은 묵은 체증이 내려가듯, 아주 시원하게 아들의 등록금 문제를 우리에게 넘겨주셨고, 결혼해서 일 년 동안 나의 월급에서 50만 원은 매달 꼬박꼬박 남편의 등록금을 위해 만져보지도 못하는 돈이 되었다. 아들의 뒷바라지를 하던 며느리의 임신은 곧 실업자가 된다는 의미라는 걸 시어머니는 아셨으리라. 당시 기간제 교사로 일하고 있었던 며느리의 일자리는 임신과 동시에 두 날개를 펴고 훨훨 날아갈 거라는 걸. 이 파리 목숨보다 못한 계약직 같으니라고.
임테기를 보는 순간 느꼈던 감정이 무엇인지 어머님과의 그 짧은 만남으로 확실해졌다. 남들의 행복이 왜 내 행복이 될 순 없는 걸까. 왜 나는 마음껏 기뻐하지도 못하고 기쁨보다 걱정의 무게에 눌려 있어야 하는 걸까. 너무 억울하고 서러웠다. 십 년도 훨씬 넘게 지났는데도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생각나는 어머님의 눈빛, 말투. 그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세상 가장 착한 효자, 우리 남편. 더위를 잘 타지 않는 나였는데 임신은 체질까지 바꾸는 능력이 있나 보다. 막달쯤 됐을 때가 한 여름이라 그런지 밤잠 설치는 날이 많고 밤을 꼬박 새우는 날도 많았다. 보다 못한 남편이 에어컨 빵빵하게 틀어놓고 잘 수 있는 곳으로 1박 2일 나들이 계획을 세웠고 가서 먹을 음식, 간식들을 잔뜩 사서 신나게 집에 들어왔는데 더운 여름에도 오싹하게 만드는 시어머니의 한 마디. ‘내일이 형님 생일인데 같이 축하해줘야 하지 않겠니.’ 그 한마디에 우리는 고대로 들고나가 환불하고 돌아왔다. 그 모습을 본 시어머니는 나 때문에 그러는거냐며 한소리 하셨는데 아, 스크류바가 사람의 모습으로 태어난다면 저 모습이겠구나 싶었다.
산후조리원에 들어갔을 때도 아이 얼굴 한번 보고 5분도 안 돼서 가셨고, 집에 와서도 아이 기저귀 한 번 갈아준 적 없으셨고, 아주버님 아이를 챙기시느라 늘 우리 아이는 뒷전이었던 그 시절. 아이의 빨랫감으로 지저분한 방을 한심하게 바라보셨던 어머님의 소리 없는 잔소리. 첫 손주라 매일 품고 싶지만 시어머니 눈치 보며 다른 가족 아무도 없는 시간만을 기다렸다 아이를 보러 왔던 친정 아빠. 첫 조카라 마음껏 눈에 넣고 싶은데 그러지 못했던 남동생. 마치 나는 죄인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 후로 이어진 나의 두 번의 임신이 혈기를 이기지 못하는 짐승의 종족 번식이라 여겨질 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