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사판 한가운데 있는 컨테이너에서 동요를 부르다
고등학교 때 봉사점수를 채우려 주민센터나 요양원, 돌봄 프로그램 등에서 주말을 보낸 경험, 누구나 한 번씩은 있을 거라 생각한다.
한국뿐만 아니라 국제 학교의 교육 과정에도 봉사 점수가 핵심 요소로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나 역시 인도 생활에 적응함과 동시에 집 주변 봉사활동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인도에는 학생들이 주기적으로 방문할 만한 주민센터나 지역 문화센터 등이 없었다. 대신 학교 측에서 주변의 로컬 초등학교들과 연계를 맺고, 유치원-초등학생쯤 되는 아이들을 우리 학교로 초청해서 영어, 수학, 과학, 댄스 등을 가르쳐 주는 방과 후 활동을 개설해 주고 있었다.
나와 친구들은 영어수업 활동에 다 같이 지원했고, 대여섯 명의 반 친구들과 학습지, 교구를 포함한 다양한 영어 수업 계획을 짜고 직접 가르쳐 보면서 봉사 활동에 재미를 붙였다.
다만 나는 인도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힌디어나 내가 살던 마하라슈트라주의 언어인 마라티를 전혀 할 줄 몰랐기 때문에 수업 내용을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다른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아이들과 힘겹게 소통하면서도 즐겁게 수업할 수 있었던 건 언어 장벽을 넘어서 느껴지는 아이들의 순수함과 귀여움, 그리고 수업을 하는 우리의 정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10학년 1학기가 무난하게 지나갔고, 코로나가 인도에 시끄럽게 상륙하며 학교에 더 이상 나갈 수 없게 되었다. 매일같이 감염자 수가 기하학적으로 늘어나고 사망자들의 소식이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상황에서 대면 수업과 봉사 활동은 전면 중단, 무기한 연기되었다.
곤란했다. 물론 전 세계가 특수한 팬데믹 사태를 겪고 있었기 때문에 봉사 활동에 공백기가 생기는 걸 학교는 문제 삼지 않겠지만, 내 머릿속에는 대입 때 봉사활동 경험을 뭐라고 쓰지?라는 고민이 맴돌았다. 다른 방과 후 활동도 못하는 상황에서 온라인 수업 외에는 집에서 뒹굴거리는 것이 새 일상이 되었는데, 이렇게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Hi! Can you hear me?
우리가 가르치던 학생들은 코로나로 인한 학업 중단을 더 심하게 겪고 있었다. 학생 모두가 좋은 컴퓨터와 인터넷을 보유하고 있는 국제 학교의 사정과는 달리 로컬 학교들은 수업을 아예 못할뿐더러 이 아이들의 부모님들은 경제 활동에 지장을 받아 생활이 더욱 어려워진 경우가 대다수였기에 그 어떤 때보다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아파트 단지에 출입금지를 알리는 경찰 테이프가 붙어있고, 아파트 단지를 주기적으로 경찰이 순찰하는 상황에서 대면 수업을 하는 건 불가능했다. 코로나에 대한 공포간이 극에 달했기 때문에 밖에 나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나와 친구들은 학교의 봉사 활동 담당 선생님과 힘을 모아 여러 방법을 모색했다. 우선 온라인 수업을 시작했다.
봉사 담당 선생님께서 아이들의 부모님들과 연락을 취해 부모님이 공사 현장에 나가 일을 하는 동안, 아이들이 잠시나마 휴대폰으로 영상통화를 걸어, 우리와 수업을 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해 주셨다.
불량한 인터넷 상태 때문에 오디오가 수시로 끊기는 상황에서도 아이들은 휴대폰 하나를 빙 둘러싸고 앉아 밝고 우렁찬 목소리로 우리의 수업을 들어줬다. 잘 들리지?라는 말은 한 시간에 수십 번씩 반복하면서도 온라인 수업을 몇 달간 유지하며 아이들과의 소통을 이어나갔다. 찡하게 고마웠다.
시간이 지나 마스크를 철저히 쓴다면 슬슬 외출을 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드는 때가 왔다. 서서히 바깥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늘었고, 병원에 가서 제때 약을 먹는다면 치사율이 줄어들어 공포감도 서서히 내려왔다.
두어 달 해오던 온라인 봉사 수업은 이때쯤 시들해져 갔다. 하루 종일 화상으로 학교 수업을 듣는 것도 힘든데 방과 후 활동마저 잘 들리지도 않는 전화로 한다는 건 너무나 지루했다. 아이들도 갈수록 집중하기 힘들어했고, 매 수업마다 사기는 더 떨어져 갔다.
이대로 우리의 영어 교육 봉사는 막을 내리는 듯했다.
엄마는 보육교사 자격증 보유자이자, 한국에서 유치원 선생님으로 일하셨다. 엄마는 내 상황을 보시고는 학교 선생님께 집 주변에 사는 아이들이 있다면 나 혼자라도 직접 찾아가서 가르쳐 보라고 제안하셨다.
그때 우리 집과 약 15분 정도 거리에 Doorstep이라는 사회단체가 간이 학교를 차렸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봉사 담당 선생님께서 내 얘기를 듣고 소개해 주신 것이다. 선생님께서는 혼자서 직접 아이들을 찾아가겠다는 내 열정을 높이 평가하셨다.
적극적으로 Doorstep 관계자와 말을 맞춘 결과, 나는 선생님의 동행 하에 동요 파일이 담겨 있는 노트북, 개구리 종이접기 세트, 종이 몇 장과 중고 크레파스를 들고 학교를 찾아갔다.
덜덜거리는 릭샤의 떨림이 내 마음속 울림을 대변하는 듯했다. 혼자 언어적 장벽을 극복하고 처음 보는 학교 선생님들과 아이들을 같이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니 시험 칠 때와는 또 다른 긴장감이 몰려왔다.
릭샤는 별 볼일 없어 보이는 공사장 앞에 섰다. 아파트로 보이는 건물이 3층쯤 올라가 있고, 먼지 가득한 길바닥에 시멘트 통들과 중장비 몇 대들 이 줄지어 서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여느 건문 공사장과 다를 바 없었다. 선생님은 건물이 임시 관리사무소 곁으로 나 있는 샛길을 따라 날 안내했다.
구불거리는 콘크리트 숲의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머리 위로 가끔 건물 사이를 잇는 금속 비계가 인도의 뜨거운 태양 아래 번쩍였고 공사장 중앙에 다다를수록 그곳에서 판자와 컨테이너로 임시 거처를 마련해 사는 사람들의 집이 보였다.
이윽고 아이들의 타닥거리는 맨발 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들 뒤에는 붉은 사리를 입고 낡은 회색 컨테이너 밖으로 몸을 반만 내놓은 채 우리를 기다리는 Doorstep 학교 선생님이 서 계셨다. 미소와 함께.
천장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섰다. 바닥에는 얇은 플라스틱 실들을 엷어 만들어진 듯한 매트가 깔려 있어 그 밑 콘크리트의 찬기가 발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그 시원함에 감사했다.
둥그렇게 자리를 잡고 앉아 곰 세 마리를 부르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얼굴들에 쭈뼛거림도 잠시, 우리는 그 해맑은 선율에 토요일 오후를 맡겼다.
코로나면 어떻고, 작고 어두컴컴한 컨테이너 안이면 어떤가. 우리의 표정은 전구 대신 천장의 구멍에 꽂혀 있는 물병보도 밝게 빛났다.
엄마는 유치원 선생님으로의 경력을 살려 날 도왔다. 집에서 엄마와 같이 적당한 난이도의 동요 부르는 걸 연습하고, 율동도 직접 만들어 아이들의 참여를 유도했다. 노래에 등장하는 동물들을 종이로 접어보고 여러 게임도 만들어 진행했다.
엄마와 나의 합작으로 이루어진 참여형 수업은 큰 인기를 끌었다. 내가 하는 수업에 대한 좋은 소문이 퍼지면서 졸업할 때 즈음에는 같이하고 싶어 하는 친구들이 생겨 코로나 이전처럼 그룹으로 봉사 활동을 다닐 수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내 곁에 항상 있어주신 학교 선생님의 공이 컸다.
봉사 담당 선생님께서는 내가 수업을 할 때 학교 리포트에 필수인 증거 자료로 쓸 사진과 영상을 너무 적극적으로 촬영해 주셨고, 내가 소통이 어려운 부분에서 중간자 역할을 해 주셨다. 매주 릭샤로 날 픽업해 학교로 데려다주시는 것도 선생님이셨다. 그때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학생을 위해 기꺼이 시간과 노력을 내어주신 그분께 너무나 감사하다.
매주 토요일일 같이 하며 선생님께서 네팔에서 오신 분이며, 정원이 있는 집에서 아믈라 나무를 기르는 게 취미라는 걸 알게 되었다. 학교 밖에서 선생님을 보는 것이 새로웠던 나는 마치 다른 세상의 사람을 알아 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자주는 아니지만 주말에 봉사 활동을 나간다. 인도에서의 경험 덕에 어린아이들을 가르치는 봉사 활동이 가장 재밌다.
모든 고등학생에게 봉사 활동은 좋으나 싫으나 필수다.
왜 그런지 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