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졸업 6개월 전, 선생님이 사라졌다

영어 선생님이 안티 백신이면 벌어지는 일

by 쭌쓰

고3. 입시를 앞두고 예민함이 극에 달하는 해다.


나는 인도의 국제 학교를 졸업했다. 국제학교는 5월이 졸업이니 인도의 태양이 가장 이글거리는 3-4월의 지옥불을 견디며 고등학교 졸업 시험과 입시 준비에 돌입했다.


상대평가로 인해 성적 압박이 심한 한국의 수능보다는 덜하겠지만, 시험 스트레스로 인해 입맛이 떨어지고 수업 도중에 구토가 나와 조퇴하는 일상이 이어졌다.


코로나 사태가 겨우 진정되고, 전염병으로 인해 약 2년간 대폭 축소되었던 졸업 시험이 점차 정상적으로 진행될 예정이었기에, 학교 선생님들도 덩달아 긴장하셨다. 코로나 시기의 수업 공백을 메꾸고 성적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학교 선생님들의 꼼꼼한 피드백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인터내셔널 바칼로리아 (International Baccalurate, "IB") 교육 과정은 졸업 시험 점수와 (50 - 60%)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internal assessment 점수를 합산하여 (40% 정도) 최종 점수가 나온다.


Internal assessment의 경우, 주어진 조건과 평가 기준에 따라 학교 선생님께서 전수를 부여하고, IB Board (한국의 평가원에 준하는 기관)은 전체적인 점수 평균과 표준편차 등을 고려하여 약간의 조정만 하기 때문에, 학교 선생님의 지도와 점수가 정말 중요하다.


졸업 시험 역시 전 과목 모든 시험이 서술형이고, 대부분의 과목이 에세이 형식으로 글을 써야 하기 때문에, 꾸준히 내 글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와 개선 여지를 알려 줄 수 있는 선생님의 역할이 크다.


3월 중순쯤이었을까? 우리의 영어 선생님은 학교로 돌아오지 않으셨다.


여느 날처럼 교실에 앉아 시험 기출문제를 살펴보던 중, 교무 선생님께서 딱, 딱, 딱 가죽 슬리퍼의 소리를 울리며 비보를 전달하셨다.


영어 선생님이 금일로 나오지 않을 것이며, 해외로 나간 것 같다고 했다.


나와 5명 남짓의 영문학 수업 친구들은 마스크 너머로 서로의 황당한 표정을 확인했다. 귀를 의심했다.


졸업 시험 준비는 지금까지 연습한 것으로 개인 자습을 한다고 해도, 아직 선생님께서 채점해 주셔야 할 internal assessment가 남아 있었다. 아직 에세이 제출 전이었기에, 중간 피드백을 받아 천천히 원고를 고쳐 나가야 하는데, 선생님이 없다니.


학교 측에서는 유감을 표했다. 대면 수업을 진행하기 위해서 모든 교사진에게 코로나 백신을 맞을 걸 요구했는데, 우리의 영어 선생님은 이를 거부했다는, 어이없는 해고 사유를 전해왔다.


안티 백신은 미국의 일인 줄로만 알았는데...


선생님으로부터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화가 났다. 사과는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사전 통보라던지, 대체 선생님을 구할 때까지 기다려 준다는 조치도 없었다. 학교는 교사를 구하고 있으니, 기다리라는 말을 메일로 여러 차례 반복했다.


1년 반 가량 수업을 들으면서 참 특이한 분이라는 생각은 있었지만 이 정도로 무책임한 분일 줄을 몰랐다. 기가 차다 못해 숨이 막혔다.



고등학교 영문학 수업에서 셰익스피어 작품을 하나도 과정에 표함 시키지 않겠다고 하셨을 때부터 범상치 않은 분이었다.


IB 영문학 교육 과정에서는, 학교 선생님이 주어진 작품 리스트에서 13개의 작품을 자율적으로 선택하여 가르칠 수 있는데, 인원수는 적었지만 영문학 덕후들로만 구성되어 있던 우리 반은 영문학의 거장,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다뤄 볼 날을 기대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가지고 현대 대중문화의 영감이 되는 부분들이 파헤쳐 재해석하고, 현대 영어와는 차이가 있는 Middle English를 본격적으로 공부해 보고픈 마음이 컸다. 친구들과 수업 시간에 역할극을 해 보는 것도 재미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백인 위주의 주류 문학에 묘한 반발심을 가진 것 같아 보였던 우리 선생님께서는 고등학생인 우리에게 따분하게만 느껴지는 작품들을 들고 오셨다. 옆 반에서 영어 언어와 문학 (다른 선택과목이다) 수업에서 <템페스트>를 읽는 소리를 엿들으며 목 빠지도록 부러움에 잠기곤 했다.




뭐, 어쩌겠는가.


졸업 반 학기 전 지도 선생님을 잃은 우리는 매 수업마다 서로의 글을 읽어주고, 배워야 할 작품에 대한 의견을 나누며 그룹 스터디를 진행했다.


졸업한 지 4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이때 확립했던 주체적인 문학적 분석 방법과 친구들과의 토론을 거쳐 형성된 작품들에 대한 시선이 평생의 자원이 되었음을 느낀다.


대학생이 된 후, 영문학 과외를 꾸준히 해 오면서 학생들에게 나만의 분석 에세이 쓰기 팁들과 작품에 대한 신선한 아이디어를 얘기해 줄 때 희열을 느낀다. 학생들도 과목에 대한 나의 애정을 느낄 것이다 믿는다.


더 나아가 이때 반강제적으로 읽었던 여러 문화권의 작가들과 내가 스스로 읽지 않던 시들을 접하게 되면서 독서의 폭이 넓어졌다. 아마 이때 읽지 않았더라면 모르고 살았을 문학 장르와 아름다운 글귀들이 내 안에 들어왔다.


다행히 새로운 선생님이 오셔서 internal assessment를 위한 에세이 점수를 주시긴 했다. 하지만 이미 일정이 너무 급박했기에 피드백 과정 없이 최종본을 바로 드리고 점수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나는 영문학 과목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점수가 잘 안 나왔으면 원망할 뻔했다.


저희를 두고 홀연히 떠나신 선생님, 감사합니다.


월,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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