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에 윤리를 적용할 것인가?

알도 레오폴드와 자연의 윤리

by 환경인문학수첩

1920년대, 미국은 호황이었다.


세계 1차대전의 수혜를 입은 미국의 1920년대는 그 찬란한 경제 성장과 풍요로 인해 추후에 '광란의 20년대'로 기억된다. 기업들은 기록적인 흑자를 맞이하였고, 사람들은 끊임없이 물건을 사고 또 살 수 있는 소비주의 열풍에 빠졌다. 물건이 금방 고장 나는가? 이미 가지고 있는 상품과 똑같은 진열대의 물건이 유독 탐스러워 보이는가? 무슨 문제인가, 또 사면 되는데! 1920년대 미국인들의 소비에 대한 마음가짐은 그러했다. 무한한 자원, 무한한 생산, 그리고 무한한 소비. 이 모든 것이 미국의 풍요로운 사회로부터 비롯되어 영원할 것처럼 보였다.


물론, 이런 소비주의 열풍에 우려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도 존재했다. 바로 19세기 후반부터 힘을 얻어온 자연보호주의 운동(Conservation Movement)이다.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과 같은 정치인들로부터 시작한 자연보호주의 운동은 인간이 기술에 미치는 파괴적인 영향에 대한 주목을 가져왔다. 이에 따라, 미국에서 소위 환경 운동의 "1세대"라고 불리는 운동가들이 등장하며 환경운동의 탄생을 알리게 되었다. 그들은 인간이 초래한 환경 파괴의 경제적인 대가가 얼마나 클 것인지 역설하였다.

그러나 모든 인물들이 이 이야기에 만족한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생태학자인 알도 레오폴드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레오폴드는 그의 저서 <모래땅의 사계>(Sand County Almanac)에서 사람들이 토지에 대해 충분히 '윤리적'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알도 레오폴드(Aldo Leopo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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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폴드의 사상을 알기 위해서는 그가 말하는 '윤리'가 무엇인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레오폴드에게 '윤리'는 공동체의 존립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협력적 장치였다. 자유란 분명 긍정적인 가치일 것인데, 그를 제한하는 것이 윤리라니, 무슨 소리일까?


어려운 정의는 잠시 잊고 간단한 예시를 생각해보겠다. 우리가 길에서 만난 아무 사람에게나 뺨을 때릴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무한한 자유를 행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파괴적인 행위가 허용된 사회는 절대 평화롭게 공존할 수 없다. 길에 나갈 때마다 주먹이 날아오는 사회라니, 그것은 사회가 아니라 홉스가 말하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에 가까울 것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우리는 '다른 사람을 때려선 안 된다'라는 윤리 원칙을 정한다. 윤리는 이런 원칙을 위반하는 행위를 하는 사람들에게 제도적인 처벌을 할 수 있는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런 원리에 따라, 길에서 만난 사람의 뺨을 때리면 처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 다소 단순화한 예시이지만, 레오폴드는 이런 원리로 '누구든 뺨을 때릴 수 있는 자유'를 제한하는 장치가 윤리라고 이야기한다.


여기서 레오폴드는 묻는다. 우리는 토지와의 관계에서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는가? 윤리가 공동체를 유지시키는 원동력이라면, 그 원칙은 사회 공동체 뿐만이 아닌 자연 공동체에게도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레오폴드가 살던 시대의 사람들은 자연과의 관계를 상상할 때 '윤리'라는 개념을 들이밀지는 않았다.

우리가 자연에 대해 윤리적으로 사고하지 않기 때문에 잃는 것은 무엇일까? 남을 때리는 행위에 대해 윤리적으로 사고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길에 나갈 때마다 날아오는 주먹을 맞을까봐 두려움에 떨어야 할 것이다. 즉, 윤리 없이는 공동체가 유지되지 않는다. 레오폴드는 자연 공동체에도 이 원리가 적용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당시 대다수의 미국인들은 자연을 윤리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그들에게 자연은 착취 가능한 경제적인 자원이었다. 특히 소비자주의 열풍이 불며 광란의 사치가 이루어지던 1920년대 이후 많은 미국인들 사이에는 무언가가 꼭 필요하지 않아도 사는 풍조가 자리잡았다. 20년대를 바탕으로 한 F. 스캇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에 등장한 부자들의 사치스러운 생활이 그 예시라고 할 수 있겠다. 그들은 자연에게 어떠한 행위를 해도, 인간에게 돌아오는 반향은 없다고 믿었다.


레오폴드는 <모래땅의 사계>에서 이를 날카롭게 꼬집는다. 그는 당시에는 사람들에게 생소했던 '생태계'라는 개념을 꼽으며, 어떻게 토지에 있는 모든 생명체들이 하나의 시스템으로 연결되어 있는지 설명한다. 초식동물은 살아가는데 식물에 의존하고, 육식동물은 초식동물에 의존하듯이, 인간 역시 자연 공동체에 의존하며 살아가는 동물이다. 만약 이 원리를 무시하고 자연으로부터 무분별하게 자원을 가져온다면, 자연 공동체는 결코 존속할 수 없을 것이며, 인간 역시 그 영향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윤리 원칙을 무시했을 때 사회가 존속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레오폴드는 이렇게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었던 당대 자연적 사고의 '비윤리성'을 지적한다.


2024년, 우리는 레오폴드가 경고한 바로 그 결과를 목격하고 있다. 생태계는 더 이상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아마존 열대우림의 30퍼센트가 사라지자 남미의 강우 패턴이 바뀌었고, 그 여파는 브라질의 농업을 위협하고 있다. 북극의 빙하가 녹자 제트 기류가 약화되어 유럽과 북미에 이상 한파가 찾아왔다. 생태계의 한 부분을 건드리면 전체가 흔들린다는 레오폴드의 경고는 이제 뉴스에서 매일 확인할 수 있는 현실이 되었다. 우리는 자연에 대해 윤리적으로 사고하지 않은 대가를 치르고 있다.


경제적 환경운동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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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비윤리적인 사고방식은 환경파괴만을 초래한 것은 아니었다. 레오폴드는 토지에 대해 윤리적으로 접근하지 않기 때문에 환경운동 역시 한계를 맞고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 환경운동가들이 환경보존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환경보존의 경제적인 이익을 주장하는 경우가 다수였다. 예컨대 자연환경 중에서도 비옥한 녹지, 가치 있는 품종의 동물, 식물들의 경제적 이익에 집중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수익성이 없는 사막, 습지, 곤충과 같은 자연의 부분들은 종종 환경운동에서조차 무시되곤 했다. 레오폴드는 이런 '수익성'이 없는 자연의 부분들이 '수익성'을 가진 부분들과 유기적이며, 결코 떼어놓을 수 없음을 열변하며 당시 환경운동가들의 문제를 비판한다. 레오폴드가 보기에, 환경운동은 경제적인 언어가 아닌 윤리적인 언어를 빌려야 했다.


이 비판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기후위기 대응이 '녹색 성장', '탄소 시장', 'ESG 투자'와 같은 경제적 언어로만 이야기될 때, 우리는 레오폴드가 경고한 함정에 빠진다. 경제적 가치가 없는 습지는 개발되고, 탄소 배출권이 거래되며, 기업들은 '친환경'이라는 라벨을 붙인 상품을 팔면서 본질적으로는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다. 레오폴드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자연을 보호해야 하는 이유가 그것이 경제적으로 이득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윤리적으로 옳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자연의 정복자가 아닌 생태공동체의 일원으로 생각해본다면, 자연에 대한 우리의 자유가 제한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생태공동체의 가장 강력한 구성원이기 때문이다. 다시 길거리의 예시로 돌아가보자면, 내가 단순히 힘이 세다고 해서 남들을 길거리에서 때리고 다니지는 않지 않는가? 그것이 어떤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 준다고 해도 말이다. 자연도 마찬가지이다. 설령 환경보호가 인간에게 일말의 경제적 이득도 가져다 주지 못한다고 해도, 자연으로부터 무언가를 가져올 때에는 항상 윤리적으로 생각해야만 한다.


레오폴드가 말하듯, 그것이 자연 공동체의 존속을 위한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연 공동체가 존속하지 못한다면, 인간 공동체 역시 존속할 수 없다. 이것이 레오폴드가 100년 전에 했던 경고이고, 기후위기 시대를 사는 우리가 지금 직면한 현실이다.


참고문헌

알도 레오폴드, <샌드 카운티 연감>, 1948, 이디북스, 이동신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