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파편들이 재구성한 진실
사건 발생 현장을 직접 보는 것은 내 오랜 습관이었다.
기록은 사건을 설명하지만, 공간은 사건을 느끼게 한다. 판사는 법정에서 서류를 읽는다. 그러나 나는 그 서류가 만들어진 장소를 먼저 걷는다. 그래야 그 서류가 담지 못한 것들을 알 수 있다.
서원시 청운호수공원.
나는 사건 수임한 날로부터 사흘 뒤 이른 아침, 혼자 그 공원을 찾았다.
9월 말의 공원은 아직 단풍이 이르렀다. 가로수 잎이 군데군데 노르스름해지기 시작한 것이 전부였다. 입구에서부터 둘레길을 따라 걸었다. 평일 아침이라 산책하는 노인 몇 명과 조깅하는 직장인 하나가 전부였다.
5번 벤치는 둘레길 안쪽 구간에 있었다.
가로등에서 조금 떨어진 위치였다. 낮에 보아도 주변보다 조금 어두운 느낌이 드는 자리였다. 벤치 주변에는 이미 모든 흔적이 사라져 있었다. 새벽을 거쳐간 잔잔한 습기만이 그곳에 남아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한참 서 있었다.
새벽 2시 40분. 가을비. 가로등 불빛이 번지는 빗속에서 지윤은 이 자리에 서 있었다. 왔던 방향을 바라보며. 등 뒤에서 도진이 흙을 파는 소리를 들으며. 발 안으로 빗물이 스며드는 것을 느끼며.
그리고 도진이 말했다. 찍어.
나는 지윤이 서 있었을 자리를 짐작해 그곳에 발을 옮겼다.
공원 입구 쪽이 바라보였다. 텅 빈 공원길. 가로등 불빛. 그 새벽에 그녀가 본 것이 이것이었다. 올 사람이 없는 길을 망보는 것.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로.
나는 그 자리에서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한 장 찍었다.
법정에서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기억하기 위해서였다.
현대의 범죄는 흔적을 지우려 한다. 그러나 디지털은 망각을 모른다.
인간이 삭제했다고 믿는 것들이 사실 어딘가에 살아남아 있다는 것, 그것이 디지털 포렌식이 범죄 수사에 도입된 이후 범죄자들이 가장 늦게 깨닫는 진실이다.
카카오톡 대화방을 지워도 스마트폰 내부 캐시 메모리에 잔해가 남는다. 사진을 삭제해도 파일 시스템의 FAT 테이블에 흔적이 박힌다. 텔레그램 비밀 채팅은 종단간 암호화가 적용되지만, 수신 단말기가 압수되는 순간 그 벽은 무너진다.
도진과 지윤의 스마트폰은 체포 직후 즉시 압수되었다.
나는 서원경찰서 사이버수사팀이 작성한 디지털 포렌식 결과 보고서를 증거기록 열람을 통해 받아 들었다. 체포일로부터 나흘 후. 요즘 경찰의 포렌식 속도는 예전과 달랐다. 민간 위탁 포렌식 업체의 도움을 받는 경우도 있고, 무엇보다 분석 도구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Cellebrite UFED'나 'GrayKey' 같은 상용 추출 장비들은 잠금 해제가 안 된 스마트폰도 상당 부분 뚫어낸다는 것을 나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보고서는 총 74페이지였다.
나는 그날 저녁 7시부터 새벽 2시까지 그 보고서를 세 번 읽었다.
디지털 포렌식 보고서의 구조는 언제나 건조하다.
감정 기관명, 의뢰 번호, 분석 장비 모델명, OS 버전, 이미징 방법. 이 딱딱한 서두를 넘기면, 비로소 두 사람의 내밀한 세계가 펼쳐졌다.
경찰이 도진의 갤럭시 S23에서 복원한 데이터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카카오톡 삭제 메시지 복원본. 도진은 체포 직전 카카오톡 대화방을 삭제했지만, 스마트폰 내부 저장소의 데이터베이스 파일(.db)에서 약 68%의 메시지가 복원되었다. 특히 지윤과의 대화방은 복원율이 높았다. 도진이 삭제한 것은 메신저 앱의 표시 항목이었을 뿐, 실제 데이터는 SQLite 데이터베이스 내 'chat_logs' 테이블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둘째, 텔레그램 대화 로그. 도진은 '블랙' 채널 및 하위 판매채널 '래빗'과 연결된 계정들과 텔레그램을 통해 통신하고 있었다. 조직은 추적이 어려운 텔레그램을 통해 마약 판매 채널을 운영하며 매수인을 확보하고, 대금은 가상자산으로 지급받은 뒤 미리 은닉해 둔 마약의 위치를 전달하는 이른바 '던지기'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비밀 채팅은 서버에 기록이 남지 않으나, 수신 단말기인 도진의 스마트폰이 압수된 이상 단말기 내 캐시에 저장된 일부 대화가 복원 가능했다. 복원된 대화는 총 23개 메시지. 양적으로는 많지 않았지만, 그 내용은 결정적이었다.
셋째, 사진 메타데이터. 지윤의 아이폰 SE에서 사건 당일 새벽 2시 47분 촬영된 사진 1장. EXIF 데이터에는 GPS 좌표와 촬영 시각이 초 단위로 박혀 있었다. 좌표는 청운호수공원 5번 벤치와 오차 3미터 이내로 일치했다.
나는 그 사진의 메타데이터 항목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지윤이 찍은 사진 한 장.
그녀는 아마 그 사진을 찍는 순간에도 자신이 얼마나 정교한 증거를 만들어내고 있는지 몰랐을 것이다. GPS가 기록되는 것을, EXIF 정보가 시간과 장소를 초 단위로 새겨 넣는다는 것을.
디지털은 인간이 의식하지 않는 순간에도 꾸준히 증거들을 축적한다.
나는 보고서를 읽다 멈추어, 복원된 카카오톡 메시지 목록을 처음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다.
법정에서 쓸 수 있는 것과 쓸 수 없는 것을 분류하기 위해서였다. 검사는 이 메시지들 중 불리한 것들만 발췌해 공판에서 제시할 것이다. 나는 같은 메시지들에서 지윤에게 유리한 맥락을 찾아내야 했다.
5월의 온기가 7월의 통제로, 8월의 감시로 이어지는 궤적은 이미 확인한 것이었다. 나는 그 이후의 메시지들을 더 주의 깊게 읽었다.
[8월 17일]
도진 : 오늘 어디 갔다 왔어
지윤 : 병원이요. 약 타러요
도진 : 무슨 병원
지윤 : 정신건강의학과요. 우울증약이요
도진 : 그거 먹어서 나아지는 거 맞아? 계속 우울해 보이던데
지윤 : 잘 모르겠어요. 근데 안 먹으면 더 힘들어서요
도진 : 그거 끊어. 그게 더 독이야
[9월 2일]
도진 : 나 오늘 힘들어
지윤 : 왜요 무슨 일 있어요
도진 : 그냥. 옆에 있어줘
지윤 : 지금 가요
도진 : 빨리 와
지윤 : 5분이요
도진 : 나중에 부탁 하나 할게
지윤 : 응 말해요
도진 : 나중에. 지금은 그냥 와
나는 9월 2일의 마지막 메시지에 형광펜을 그었다.
나중에 부탁 하나 할게.
9월 14일 새벽의 그 공원은 이미 여기서부터 준비되고 있었다. 도진은 그 '부탁'을 위해 지윤의 감정을 미리 달구어 두었다. 사랑한다면 도와주는 것이 맞지 않냐는 논리. 나중에 부탁이 있다는 예고. 그것이 어떤 부탁인지를 명확히 밝히지 않은 채로.
이것은 즉흥적인 범행이 아니었다.
나는 그 사실을 메모했다.
도진의 사전 계획성 — 9월 2일 메시지 참조. 지윤의 비계획성과 대비.
텔레그램 복원 메시지들은 성격이 달랐다.
복원된 23개의 메시지 중 범행과 직접 연관된 것들을 추리면 다음과 같았다.
[9월 10일 / 블랙 → 도진]
다음 주 토요일 새벽. 서원 북쪽 공원. 5B 지점. 물량 15. 가상자산 입금 후 진행. 좌표 사진 전송 필수.
[9월 11일 / 도진 → 블랙]
알겠습니다. 기존 방식대로 진행합니다.
[9월 14일 02:52 / 도진 → 블랙]
(사진 파일 1개) 완료했습니다.
[9월 14일 03:01 / 블랙 → 도진]
확인. 입금은 내일.
이 대화들은 도진이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조직적 유통망의 하선으로 기능했다는 것을 증명했다. '5B 지점', '물량 15', '좌표 사진 전송 필수', '가상자산 입금'—이 표현들은 조직 내에서 통용되는 고유한 지시 체계였다.
그리고 나는 도진의 텔레그램 기록에서 더 오래된 메시지들을 훑었다.
복원된 것들 중 가장 오래된 것은 4월이었다. 범행 5개월 전이었다.
[4월 3일 / 블랙 → 도진]
처음이죠. 간단해요. 물건 받아서 지정 장소에 묻고 사진 찍어 보내면 끝. 건당 5만. 하루 잘하면 열 건도 가능.
[4월 3일 / 도진 → 블랙]
혼자 해야 합니까
[4월 3일 / 블랙 → 도진]
처음엔 혼자. 익숙해지면 알아서들 해요.
나는 그 메시지를 읽으며 잠시 멈추었다.
처음엔 혼자.
도진이 지윤에게 처음 '부탁'을 건넨 것이 9월 2일이었다. 그리고 조직과 접선한 것이 4월이었다. 5개월 동안 도진은 혼자 해온 것이다. 그러다가 9월 14일, 처음으로 지윤을 데려갔다.
왜 그날이었을까.
나는 수사 기록을 다시 뒤졌다.
도진은 조직에 진 '외상' 채무가 있었다. 마약 유통 조직은 도진에게 필로폰을 외상으로 지급했고, 도진은 드랍퍼 수당으로 그것을 갚아야 했다. 9월 초 기준으로 외상 채무가 상당했다. 조직 측에서 압박이 들어왔다는 정황이 수사 메모 안에 있었다.
겁이 났던 것이다.
혼자 하기 두려웠던 것이 아니라, 조직의 압박이 커진 상황에서 자신을 안전하게 보이기 위한 방패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방패로 10평짜리 빌라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여자를 택했다.
반면 지윤의 아이폰에서 텔레그램 관련 데이터는 단 한 건도 검출되지 않았다.
이것이 중요했다. 지윤은 조직과 직접 연결된 채널이 없었다.
다음 날 오후, 나는 서원대학교 법의학-디지털포렌식 협력센터의 이형준 교수를 만났다.
이형준은 내가 까다로운 디지털 증거 사건을 맡을 때마다 자문을 구하는 전문가였다. 전직 경찰청 사이버수사대 팀장 출신으로, 민간으로 나온 뒤 대학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증거를 분석하는 데 있어 검사 쪽이든 변호인 쪽이든 감정 없이 같은 태도를 유지했다.
"보고서 봤어요?"
이 교수는 내가 건넨 포렌식 보고서 사본을 훑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봤습니다. 몇 가지 짚어드릴 게 있어요."
그는 지윤의 아이폰 SE에 대한 분석 항목을 펼쳤다.
"피의자 이지윤의 단말기에서 텔레그램 앱 자체가 설치된 흔적이 없습니다. 앱 설치 이력에도 없고, 잔여 데이터도 없어요. 이 피의자가 마약 유통 조직의 통신 채널과 직접 연결된 적이 없다는 의미예요."
"검사 측에서 이 부분을 어떻게 해석할 것 같습니까?"
"아마 '사전 공모는 도진이 주도했고 지윤은 실행 단계의 공범'이라고 주장하겠죠. 지윤이 직접 조직과 통신하지 않았어도 범행 실행에 가담했으면 공동정범이 될 수 있으니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한 논리였다.
"그런데 변호사님, 여기서 제가 흥미롭게 본 부분이 있어요."
이 교수는 사진 메타데이터 분석 항목을 가리켰다.
"지윤이 찍은 사진 있잖아요. 사진이 촬영된 직후, 지윤의 카카오톡에서 도진에게 메시지가 하나 발송됩니다. 02시 48분."
나는 그 항목을 찾았다.
지윤 → 도진: 찍었어. 이거 진짜 괜찮은 거야?
"그리고 도진의 답장은요?"
"없습니다. 도진이 그 메시지를 읽은 흔적은 있는데, 답장을 안 했어요. 대신 도진은 그 직후 텔레그램으로 사진을 전송하죠."
나는 잠시 그 흐름을 머릿속에서 재구성했다.
지윤이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도진에게 "이거 진짜 괜찮은 거야?"라고 물었다. 답장은 없었다. 도진은 지윤의 질문을 무시한 채 그 사진을 텔레그램 조직망으로 넘겼다.
"이거 진짜 괜찮은 거야?"
이것은 범행에 대한 확신을 가진 공범의 언어가 아니었다. 무언가를 하긴 했지만 그것이 옳은 것인지 의심하고 있는 사람, 판단을 상대방에게 의존하고 있는 사람의 언어였다.
"그리고 한 가지 더요."
이 교수가 다른 페이지를 펼쳤다.
"도진의 텔레그램 메시지에서 복원된 4월 3일 접선 기록 있잖아요. 건당 5만 원, 하루 열 건. 이걸 보면 도진이 이 일을 한 지 최소 5개월이 넘었다는 건데."
"그게 왜 중요합니까?"
"숙련됐다는 거예요."
이 교수가 말했다.
"5개월 된 드랍퍼가 처음 일에 데려간 사람한테 사전 교육을 했을까요, 아니면 그냥 도구처럼 썼을까요. 메시지 내용을 보면 지윤에게 사전 설명을 한 흔적이 전혀 없어요."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잠시 생각했다.
5개월간 혼자 해온 숙련된 드랍퍼. 그리고 처음으로 데려간 동행자에게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은 것. 그것이 오히려 지윤이 사전에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음을 방증하는 논거가 될 수 있었다.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설명이 필요 없다. 그러나 모르는 사람에게도 설명하지 않았다는 것은—의도적인 은폐였다.
이형준 교수와 헤어지면서 나는 악수를 나눴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그림이 더 선명해졌어요."
이형준 교수와 헤어져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신호에 걸려 차를 세운 순간, 전화가 왔다. 모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변호사님이세요?"
여자 목소리였다. 낮고 조심스러웠다.
"그렇습니다. 누구십니까?"
"저는... 강도진의 아내입니다."
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호가 바뀌었다. 뒤에서 경적 소리가 들렸다. 나는 천천히 차를 출발시키며 귓가에 전화기를 붙였다.
"무슨 일로 연락하셨습니까?"
"변호사님이 이지윤 씨 변호를 맡으셨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아무 감정도 없었다. 오히려 그 감정의 부재가 더 무거웠다.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될까요."
"말씀하세요."
"그 여자, 남편한테 아내 있는 거 알고 만난 거예요?"
나는 갓길에 차를 세웠다.
"왜 그것을 알고 싶으십니까?"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저는 이지윤 씨를 원망하고 싶었어요. 1년 동안."
그녀가 말했다.
"근데 생각해 보니까, 그 여자도 아마 제대로 몰랐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 사람이 그런 식으로 상대를 속이는 사람이라는 걸 제가 이미 알고 있으니까."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알고 싶은 답을 제가 드리기는 어렵습니다."
나는 천천히 말했다.
"의뢰인에 관한 사항은 말씀드릴 수 없어요. 그러나 한 가지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지윤 씨는 지금 많이 무너져 있습니다."
또 잠깐의 침묵.
"저도 무너졌어요."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아이들도요."
나는 그 말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전화 끊겠습니다."
그녀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나는 한참 동안 전화기를 내려다보았다. 도진이라는 남자가 무너뜨린 것들의 목록이 머릿속에서 천천히 늘어났다. 사업. 재정. 결혼. 아내. 열두 살 아들과 아홉 살 딸. 그리고 이지윤.
그 모든 것을 옆에 두고 그는 새벽에 혼자 텔레그램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틀 후, 나는 다시 접견실을 찾았다.
"지윤 씨, 그날 밤 사진을 찍고 나서 도진 씨한테 카카오톡을 보냈죠?"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조금 흔들렸다.
"...기억하세요?"
"기억합니다. '찍었어. 이거 진짜 괜찮은 거야?'라고 보냈어요."
지윤은 오랫동안 침묵했다.
"그때... 뭔가 이상한 것 같았어요. 오빠가 가방에 넣어온 게 뭔지, 어디다 왜 묻는 건지. 근데 물어보면 화낼 것 같아서 그냥 찍었어요. 찍고 나서 불안해서 그렇게 물어봤는데... 오빠가 아무 말도 안 했어요."
"그때 오빠가 무엇을 하는 건지 알았습니까?"
"완전히 알았다고는 못 해요. 뭔가 나쁜 거라는 느낌은 있었어요. 근데 마약인 줄은 몰랐어요."
"9월 2일에 오빠가 '나중에 부탁 하나 할게'라는 말을 했죠?"
지윤의 눈이 달라졌다.
"...기억해요."
"그 부탁이 그날 밤이라는 걸 알았습니까?"
"9월 10일쯤에 오빠가 다시 말했어요. 이번 주 토요일 새벽에 같이 나가달라고. 어디 가냐고 물었더니 그냥 잠깐이라고만 했어요."
"더 묻지 않았습니까?"
"물으면 화낼 것 같아서요."
지윤이 탁자 위를 내려다보았다.
"그때 저는 오빠가 뭔가 불법적인 일을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은 있었어요. 근데 그게 마약 관련이라고는... 오빠가 마약을 한다는 것도 그 이후에 알았으니까요."
나는 그 진술을 받아 적으며 동시에 계산했다.
9월 2일 '부탁 예고', 9월 10일 구체적 요청, 9월 14일 실행. 도진은 12일에 걸쳐 단계적으로 지윤을 끌어들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지윤에게 무엇을 하는 것인지 한 번도 명확히 설명하지 않았다. 설명하지 않는 것. 알면 거절할 테니까.
"도진 씨의 자해 이력—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게 있습니까?"
"제가 그때 119에 신고했어요. 9월 초였어요."
나는 즉시 메모했다.
9월 초 119 신고 기록 조회. 강도진 응급 이송 이력 확인 요청.
"그날 상황을 말해줄 수 있습니까?"
지윤은 탁자 위에 올려둔 손을 천천히 내려다보았다.
"오빠가 며칠째 연락이 없었어요. 그러다가 갑자기 빌라로 왔어요. 들어오자마자 이상했어요. 눈이 풀려 있고, 말도 잘 안 하고. 화장실에 들어가서 한참 안 나오더니..."
그녀가 잠깐 멈추었다.
"피가 났어요. 왼쪽 팔에. 많이는 아니었는데, 그래도 무서웠어요. 제가 119 불렀어요."
"도진 씨가 신고하는 걸 알고 있었습니까?"
"몰랐어요. 화장실 문 두드리면서 신고했어요. 구급대원들이 왔을 때 오빠가 엄청 화냈어요. 왜 불렀냐고. 창피하게 만드냐고."
"그 이후에 도진 씨가 자해 협박을 했을 때, 당신은 그것을 허언으로 볼 수 없었겠군요."
지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이 차오르지 않았다. 이미 그 감정을 너무 많이 반추해서 눈물조차 말라버린 것 같은 건조한 눈빛이었다.
"네. 그래서 그날 밤에도요. 오빠가 '나 죽어'라고 했을 때, 저는... 진짜라고 생각했어요."
나는 펜을 내려놓았다.
강요된 행위. 완전한 면책은 어렵겠지만, 양형에서 유의미한 변수가 될 수 있었다. 9월 초 119 신고 기록은 지윤의 진술을 뒷받침하는 객관적 증거였다.
그날 밤 나는 서재에 홀로 앉아 변호 전략 메모를 다시 작성했다.
검사의 논거 예상:
이지윤은 도진과 공모하여 필로폰 은닉 행위를 실행했다. 형법 제30조 공동정범.
현장에서의 망보기 및 사진 촬영은 범행에 필수 불가결한 요소로서 적극적 가담에 해당한다.
이지윤은 범행 당시 행위의 불법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나의 반박 논거:
공모는 의사의 연락과 범행의 인식을 전제로 한다. 지윤에게는 조직망과의 직접 통신 채널이 없었으며(텔레그램 미설치), 범행 직후 "이거 진짜 괜찮은 거야?"라는 메시지가 인식 불완전성을 방증한다.
도진은 5개월간 혼자 드랍퍼 활동을 해온 숙련자였다. 그러나 지윤에게 범행의 성격을 단 한 번도 설명하지 않았다. 이것은 지윤의 인식이 불완전했음을 역으로 증명한다.
도진의 자살 협박과 실제 자해 이력(9월 초 응급 이송 기록)은 지윤의 선택이 강요된 것이었음을 입증한다.
이지윤은 경제적 이득을 전혀 취하지 않았다. 그 이득은 오로지 도진에게 귀속되었다.
도진의 사전 계획성(4월 조직 접선, 9월 2일 '나중에 부탁 하나 할게', 9월 10일 구체적 요청)은 지윤의 비계획성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나는 메모 아래에 한 줄을 더 썼다.
이 사건의 본질은 공모가 아니라 예속이다.
창밖으로 서원시의 밤이 조용히 내려앉아 있었다.
새벽 1시가 넘어서야 나는 펜을 내려놓았다.
거실로 나오니 하루가 소파 한쪽에 웅크리고 있었다. 갈색 시바견. 여덟 살. 자리에서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하루 옆에 앉아 등을 쓰다듬었다.
오늘 하루에 있었던 것들이 머릿속에서 천천히 지나갔다.
청운호수공원 5번 벤치 앞에서 촬영한 사진. 이형준 교수와의 대화. 도진 아내의 전화 목소리. 그리고 접견실에서 지윤이 말한 것들.
이 사건에서 진짜 피해자가 누구인지를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법정에서 그것을 증명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나는 서랍 안쪽의 낡은 메모지를 꺼냈다.
잉크가 바래 흐릿해진 글씨였다. 나는 그것을 한참 바라보다가 다시 서랍 안에 넣었다.
하루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내일 아침에는 119 응급 출동 기록 사실조회 신청서를 써야 했다. 유재원 전문의에게도 연락해야 했다. 그리고 도진의 조직 관련 진술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지켜봐야 했다.
그것이 다음 순서였다.
지금은, 잠시만, 그냥 이대로 있었다.
이 이야기는 작가가 법정 안팎에서 마주한 수많은 인간의 서사에서 출발한 허구의 기록입니다. 그러나 이 안에 담긴 고립과 추락, 그리고 다시 일어서려는 의지만큼은, 어딘가에서 실제로 살아 숨 쉬는 것들입니다. 등장하는 모든 인물과 사건은 창작된 것으로, 실존 인물 및 실제 사건과 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