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안개 너머의 좌표 - 제1화

사랑이라는 이름의 환상, 그리고 추락

by 우종진 변호사

1.


사건 기록은 거짓말을 하지 않지만, 진실의 전부를 말해주지도 않는다.


늦은 밤, 적막만이 감도는 사무실에서 나는 이지윤의 파일을 두 번째로 펼쳤다. 서원경찰서 마약수사팀이 작성한 범죄사실확인서, 검사의 공소장, 그리고 별도로 열람·등사를 신청해 받아낸 두툼한 증거기록 사본. 갓 내린 커피의 쌉싸름한 향이 피어오르는 사무실에서, 나는 형광등 아래 하얗게 빛나는 A4 용지들을 천천히 넘기며 그녀가 갇혀 있던 보이지 않는 감옥의 형태를 그려보았다.


공소장에 적힌 혐의 사실은 간결하고 냉정했다.


"피고인 이지윤은 피고인 강도진과 공모하여, 2024년 9월 14일 새벽 2시 40분경, 서원시 청운구 호수공원로 117 청운호수공원 내 5번 벤치 하단부 땅속에, 필로폰 약 15그램을 비닐 지퍼백에 넣은 후 비닐랩, 종이컵, 검은색 절연테이프에 감싸 은닉한 후, 그 위치를 사진으로 촬영한 '좌표'를 텔레그램으로 전송하는 방법으로 이를 관리하였다."


적용법조는 마약류관리에관한법률 제60조 제1항 제2호, 제4조 제1항 제1호, 제2조 제3호 나목, 형법 제30조, 제37조, 제38조, 마약류관리에관한법률 제40조의2 제2항, 제67조, 형사소송법 제334조 제1항이었다.


법률가의 눈으로 읽으면 이 공소장의 핵심은 '공모'라는 두 글자였다. 형법 제30조의 공동정범 구성. 지윤이 직접 마약에 손을 댄 것과 법적으로 동일한 책임을 질 수 있다는 의미였다. 검사는 그 논리 위에 사건 전체를 올려놓고 있었다.


나는 공소장을 덮고 증거기록 사본을 펼쳤다.


공소장에는 범죄사실만이 무미건조하게 기재되어 있을 뿐이다. 피의자신문조서, 참고인진술조서, 압수물 목록, 수사보고서, 디지털 포렌식 결과, 감정결과 등—이것들은 모두 증거기록 안에 있었다. 변호인이 그것들을 보려면 별도로 열람·등사를 신청해야 한다. 나는 사건 접수 다음 날 아침 즉시 신청서를 냈고, 사흘 만에 두꺼운 사본 묶음을 받아 들었다.


증거기록 사본 뒷 부분에 김지은의 자필 진술서가 첨부되어 있었다.


법률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 쓴 문장이라는 것이 행간에서 느껴졌다. 단어들은 울퉁불퉁했고, 맞춤법이 틀린 곳도 있었다. 그러나 그 문장들이 가진 무게는 정제된 어떤 진술서보다 무거웠다.


"저는 그날 밤 뭘 하는 건지 몰랐습니다. 오빠가 가야 한다고 해서 따라간 거예요. 무서웠지만 오빠가 없으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제가 왜 그랬는지 저도 모르겠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냥 미쳤던 것 같습니다."


나는 그 문장에서 잠시 멈추었다.


"그냥 미쳤던 것 같습니다."


법정에서 이런 문장은 쓸 수 없다. 판사는 감정이 아니라 사실과 증거를 본다. 그러나 나는 이 투박한 문장 안에서 그녀가 겪었을 공포와 혼란의 냄새를 맡았다. 이것을 법정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이 내 일이었다.



2.


증거기록 사본 압수물 목록을 바라보다가 눈에 걸리는 항목이 있었다.


스마트폰 내 미분류 음성 파일 1건. 파일명: untitled_0823.m4a. 재생 시간: 2분 47초. 촬영일: 2024년 8월 23일 오전 2시 14분.


수사팀은 이 파일을 범행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판단한 듯 하다. 그러나 디지털 포렌식 분석 결과에 관한 수사보고서 안에는 짧은 메모가 있었다.


해당 파일은 피의자 이지윤이 혼자 기타를 연주하며 흥얼거린 것으로 추정. 가사 일부 식별 가능하나 범행과 무관하여 별도 분류.


식별된 가사 일부가 메모 아래에 적혀 있었다.


'아무도 없는 이 방에서 나는 또 혼자 소리를 질러— 들리지 않아도 괜찮아, 어차피 들을 사람이 없으니까.'


나는 그 문장을 두 번 읽었다.


8월 23일 새벽 2시 14분. 도진을 만난 지 약 석 달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리고 사건이 발생하기 3주 전이었다. 지윤은 그 새벽에 혼자 기타를 치며 이 가사를 흥얼거렸다. 아무도 없는 이 방에서. 들을 사람이 없으니까.

나는 파일을 덮었다.


이 여자는 도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혼자였다. 아니, 어쩌면 도진이 있었기 때문에 더 깊이 혼자였는지도 몰랐다.



3.


이지윤의 삶을 이해하려면 서원시 외곽의 낡은 빌라 404호에서 시작해야 한다.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27만 원. 전용 면적 10평이 조금 안 되는 공간이었다. 현관문을 열면 바로 주방 겸 거실이었다. 두 팔을 양옆으로 뻗으면 손가락 끝이 벽에 닿을 것 같은 폭이었다. 그 안쪽에 방이 하나 있었고, 방과 거실 사이의 경계는 얇은 미닫이문 하나가 전부였다.


지윤은 그 미닫이문을 열어두고 살았다고 했다. 닫아두면 공간이 더 좁게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방 안에는 싱글 매트리스, 옷을 쌓아두는 작은 선반, 그리고 기타 케이스가 있었다. 기타 케이스는 매트리스 옆 바닥에 놓여 있었다. 세울 공간이 없었다. 창문은 하나였는데, 맞은편 건물 외벽이 너무 가까워서 낮에도 햇빛이 들어오지 않았다. 벽 곳곳에 직접 붙인 얇은 방음재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아래층 주민이 두 번 민원을 넣은 이후였다. 그 뒤로 지윤은 밤에는 헤드폰을 꽂고 기타를 쳤다.


아무도 듣지 않는 음악을 혼자 만드는 일이었다.


그녀가 서원시로 내려온 것은 스물다섯 살의 일이었다.


서울에서 실용음악을 전공하고 졸업 후 2년간 버텼지만, 인디씬의 현실은 그녀에게 가혹했다. 매달 50만 원짜리 연습실을 빌려 데모 테이프를 만들고, 홍대와 이태원의 소규모 공연장에서 한두 곡씩 불렀다. 한 번 공연에 받는 돈은 교통비를 제외하면 5만 원이 남지 않았다. SNS 팔로워는 1,200명에서 좀처럼 늘지 않았다.


"서울이 저를 뱉어낸 것 같았어요. 아니면 제가 서울을 이기지 못한 거겠죠. 어쨌든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어요. 부모님한테 실패했다는 걸 보여주기 싫었거든요."


고향인 서원시로 내려온 것은 도피였다. 그러나 도피처에서도 삶은 달라지지 않았다. 낮에는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고, 밤에는 10평짜리 공간에서 헤드폰을 꽂고 혼자 기타를 쳤다. 우울증은 그해 봄부터 진단명이 붙었다. 정신건강의학과에서 받아온 세르트랄린 처방전과 수면유도제 처방전이 증거기록에 첨부되어 있었다.


처방받은 지 6개월이 넘도록 약을 성실하게 복용했지만, 그녀는 나아지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고 했다.



4.


강도진이 그녀의 삶에 발을 들인 것은 사건 발생 4개월 전인 5월의 일이었다.


만남의 장소는 지윤이 야간 알바를 하던 편의점이었다.


경찰 수사 기록에 따르면 도진은 그 편의점의 단골이었다. 거의 매일 새벽, 지윤의 야간 근무 시간에 맞추어 나타났다. 처음 한 달은 그냥 손님이었다. 야식을 사고, 음료를 사고, 가끔 계산하면서 짧은 말을 건넸다.


나는 이튿날 오후 다시 접견실을 찾아 지윤에게 직접 물었다.


"강도진 씨가 처음에 어떤 사람으로 보였습니까?"


그녀는 잠시 생각하는 눈빛을 했다.


"좋은 어른 같았어요."


"좋은 어른이요?"


"마흔두 살이잖아요. 저보다 열네 살이 많은데."


지윤이 탁자 위를 내려다보며 천천히 말했다.


"처음에 스타트업 얘기를 해줬어요. 자기가 어떤 서비스를 만들려고 했는지, 왜 안 됐는지. 그 이야기가 이상하게 솔직했어요. 실패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 같았어요."


"그게 매력적으로 보였습니까?"


"그때는요."


그녀의 입꼬리가 옅게 당겨졌다가 풀렸다.


"실패해도 무너지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어요. 저는 그때 너무 쉽게 무너지고 있었으니까요. 그게 달라 보였어요."


나는 그 말을 받아 적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강도진은 처음부터 계산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그 역시 처음에는 진심이었을까.


수사 기록이 포착한 도진의 윤곽은 이랬다. 실패한 스타트업 창업자. 돌려막기로 연명하는 신용불량자. 카드 연체 4개월. 개인 채무 3,700만 원. 압류 예고 통보. 그리고 하나 더—그는 유부남이었다.


나는 그 항목에서 잠깐 멈추었다.


수사 기록에는 도진의 가족관계가 간략하게 기재되어 있었다. 배우자 있음. 자녀 2인—아들 하나, 딸 하나. 아이들의 나이는 각각 열두 살과 아홉 살이었다. 도진이 지윤의 10평짜리 빌라를 드나들던 그 시간에, 그의 집에는 아내와 두 아이가 있었다는 뜻이었다.


지윤은 그것을 알고 있었을까.


나는 그 질문을 다음 접견 때 직접 물어볼 항목으로 메모했다.



5.


도진의 전 직장 동료에 대한 참고인들의 진술 기록이 증거기록 안에 있었다.


전 동료는 이렇게 진술했다.


"강도진 씨는 원래 능력 있는 사람이었어요. 아이디어도 좋았고,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어요. 근데 스타트업이 망하고 나서 완전히 달라졌어요. 자기가 틀렸다는 걸 절대 인정 못 하는 사람이 됐어요. 투자자 탓, 시장 탓, 팀원 탓. 그러다가 연락이 끊어졌어요."


나는 그 진술을 읽으며 도진이라는 인간의 형태를 다시 그렸다.


한때 무언가를 꿈꿨던 사람. 그 꿈이 무너지는 과정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세상을 탓하는 방향을 선택한 사람. 그리고 그 방어기제가 굳어지면서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아내도, 아이들도, 그리고 이제는 지윤도—자신의 생존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방식을 자연스럽게 익힌 사람.


도진은 처음부터 나쁜 인간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행위를 용납할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것이 더 서늘했다. 완전히 검은 악인은 피해 갈 수 있다. 그러나 처음에 진심처럼 보이는 사람은 피해 가기 어렵다.


지윤이 그를 쉽게 끊지 못했던 이유가 그 안에 있었다.



6.


두 사람은 편의점에서의 만남이 이어진 지 한 달 만에 연인 관계가 되었다.


도진이 먼저 고백했다. '당신처럼 순수한 사람을 오랜만에 봤다'는 말과 함께.


나중에 지윤은 접견실에서 내게 말했다.


"그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는 지금도 모르겠어요. 근데 그때는 그게 너무 듣고 싶은 말이었어요."


처음 두 달은 괜찮았다고 지윤은 말했다.


도진은 지윤의 음악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어떤 장르를 좋아하냐, 가사는 어떻게 쓰냐, 꿈이 뭐냐. 그런 것들을 물어봐 주는 사람이 오랜만이었다고 했다. 부모님은 음악을 그만하라고 했고, 서울의 친구들은 각자의 삶으로 흩어진 상태였다.


"별것 아닌 것 같죠? 근데 그땐 그게 너무 소중했어요."


지윤이 그 말을 했을 때, 나는 잠깐 펜을 내려놓았다.


무언가에 오래 굶주린 사람에게 작은 관심이 얼마나 거대한 닻처럼 기능하는지를, 나는 이 일을 통해 이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결핍은 사람을 맹목적으로 만든다. 그 맹목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이 사건 기록이 보여주고 있었다.


도진은 지윤의 10평짜리 빌라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아내와 두 아이가 있는 집을 두고, 그는 이 좁은 공간에서 며칠씩 머물렀다. 비정기적이었다. 2~3일씩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도 했고, 때로는 일주일을 그 좁은 공간에서 거의 나오지 않은 채 머물기도 했다. 그 10평 안에 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지윤은 그의 불규칙한 리듬에 자신을 맞추기 시작했다. 아르바이트 시간표를 그의 일정에 맞춰 바꾸었고, 그가 원할 때 밥을 차렸다. 그것이 이상하다고 느끼기도 전에, 그 생활이 당연한 것이 되어버렸다.



7.


세 번째 달부터 무언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도진은 자주 신경질을 냈다. 사소한 것들이 이유가 되었다. 지윤이 늦게 일어났다는 것, 밥이 조금 짜다는 것, 통화를 한 박자 늦게 받았다는 것. 그리고 그런 신경질의 끝에는 늘 같은 문장이 따라왔다.


"너는 나를 왜 이렇게 힘들게 해."


지윤은 그 말이 두려웠다. 그녀가 그를 힘들게 하고 있다는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미 우울증으로 무너져 있던 그녀에게, '내가 상대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은 쉽게 자기혐오의 형태로 내면화되었다.


"제가 더 잘해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오빠가 왜 화를 내는지 제가 부족해서라고만 생각했어요."


나는 복원된 카카오톡 메시지 목록을 처음부터 읽으며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추적했다. 초기의 대화들과 사건 직전의 대화들은 같은 두 사람이 나눈 것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온도가 달랐다.


[5월 22일]

도진 : 오늘 공연 어땠어

지윤 : 관객이 여섯 명밖에 없었어ㅠ 근데 그 여섯 명이 끝까지 봐줬어

도진 : 여섯 명이면 대통령보다 더 소중한 관객들이네

지윤 : ㅋㅋㅋㅋ 그렇게 생각하니까 좋다

도진 : 언젠가 그 여섯 명이 육백 명 되는 거야. 난 믿어


[7월 8일]

도진 : 왜 전화 안 받아 지윤: 미안 알바 중이었어

도진 : 알바가 나보다 중요해?

지윤 : 그런 게 아니잖아 오빠

도진 : 됐어


[8월 3일]

도진 : 너 오늘 왜 그 남자랑 웃어

지윤 : 그 남자가 누구야

도진 : 편의점 자주 오는 그 새끼

지윤 : 손님이잖아 오빠 그냥 서비스로 인사한 거야

도진 : 앞으로 손님한테 그렇게 웃지 마. 불쾌해

지윤 : ...알겠어


나는 그 대화들에 형광펜을 그었다.


5월에서 8월까지 석 달. 온기가 점차 불만과 요구로 바뀌고, 급기야 통제와 감시로 이어진 궤적이 거기 있었다. 그리고 지윤의 응답은 일관되게 같은 방향을 향했다. 사과, 복종, 그리고 자기 검열.


이것은 범죄 사건의 증거이기 이전에, 한 관계가 어떻게 잠식되어 가는지에 대한 기록이었다.



8.


그달 말, 도진이 재정 상황을 털어놓았다.


카드 연체 4개월. 개인 채무 3,700만 원. 압류 예고 통보.


그는 지윤 앞에서 울었다. 강한 어른처럼 보였던 사람이 무너지는 모습은 지윤에게 더 강한 유대감을 불러일으켰다.


지윤은 그때 처음으로 그에게 아내와 아이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두 번째 접견에서 그것을 직접 물었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어떤 마음이었습니까?"


지윤은 한참 동안 탁자 위를 내려다보았다.


"충격이었죠. 근데..."


그녀가 말끝을 흘렸다가 다시 이었다.


"그때 오빠가 울면서 말했어요. 아내랑은 이미 남남이나 다름없다고. 아이들 때문에 형식적으로 유지하는 것뿐이라고. 그리고 저한테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그 말을 믿었습니까?"


"믿고 싶었어요."


지윤이 조용히 말했다.


"믿으면 덜 상처받으니까요."


나는 그 말을 받아 적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결핍이 많은 영혼은 타인이 내어주는 알량한 온기에도 쉽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준다. 그리고 그 온기가 계산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그 안에 있는 사람은 가장 늦게 깨닫는다.


도진이 '블랙래빗' 조직과 연결된 경위는 마약수사팀의 수사를 통해 어느 정도 밝혀졌다.


그는 채무 관계로 얽혀 있던 브로커를 통해 마약 유통 조직의 하선 운반책, 이른바 '드랍퍼' 역할을 제안받았다. 조직은 텔레그램을 통해 마약 판매 채널을 운영하며 매수인을 확보하고, 대금은 가상자산으로 지급받은 뒤 미리 은닉해 둔 마약의 위치를 전달하는 이른바 '던지기'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드랍퍼의 역할은 단순했다. 지정된 장소에 마약을 은닉하고, 그 위치를 촬영한 사진—이른바 '좌표'—을 텔레그램으로 전송하는 것. 수당은 좌표 한 건당 5만 원에서 10만 원이었다. 단순해 보이는 금액이었지만, 숙련된 드랍퍼는 하루에 수십 건을 처리했다. 하루에 많게는 수백만 원이 들어오는 구조였다. 드랍퍼는 조직의 윗선과 얼굴을 마주치지 않았다. 적발되더라도 조직 전체가 아닌 하선만 처리된다는 구조적 방어막이 있었다.


도진이 선택한 이유가 거기 있었다. 3,700만 원의 채무를 단기간에 해결할 수 있는, 얼굴 없는 방법.


그는 두 번 해봤다고 진술했다. 처음에는 혼자. 두 번째는 지윤을 데리고 갔다.


왜 지윤을 데려갔는지 묻는 수사관에게 도진은 이렇게 말했다.


"혼자 하기 겁이 났어요. 옆에 누가 있으면 덜 수상해 보이잖아요."


나는 그 진술이 적힌 페이지에서 잠시 멈추었다.


아내와 두 아이가 있는 남자가, 그 아내 몰래 드나들던 여자의 10평짜리 빌라에 머물다가, 그 여자를 '덜 수상해 보이기 위한 소품'으로 데리고 나갔다.


자신이 연인에게 그런 방식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지윤은 알고 있을까. 그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그녀가 무엇을 느낄지를 나는 잠깐 생각했다가 멈추었다. 지금 내가 해야 할 것은 감정이 아니라 논리였다.



9.


그 밤은 9월 14일, 토요일이었다.


도진은 그날 저녁부터 지윤의 빌라에 있었다.


두 사람은 그 10평짜리 공간에서 저녁을 먹었다. 지윤이 간단히 차린 것이었다. 밥을 먹는 동안 도진은 말이 없었다. 휴대폰을 계속 들여다보고 있었다. 텔레그램 쪽이었다. 지윤은 그것을 보면서 묻지 않았다. 물으면 화낼 것 같았다.


새벽 1시가 넘었을 무렵, 도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지윤의 빌라를 나섰다.


지윤은 피곤했다. 편의점 야간 알바를 마치고 겨우 두 시간 잔 참이었다. 10평짜리 빌라의 창문 너머로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빗방울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두 사람의 메신저 대화 내역을 다시 한번 펼쳤다.


도진 : 빨리 준비해. 시간 없어.

지윤 : 비 오는데 꼭 오늘 해야 해? 나 너무 무서워...

도진 : 겁쟁이처럼 굴지 마. 금방 끝나.

지윤 : 오빠 이게 뭐야 진짜로... 나 이런 거 못 해.

도진 : 네가 안 하면 나 죽어. 나 죽는 꼴 보고 싶으면 알아서 해.

지윤 : 알았어... 금방 나갈게. 화내지 마.


나는 그 마지막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알았어... 금방 나갈게. 화내지 마."



10.


그리고 지윤은 그 새벽에 신발을 신었다.


비가 내렸다.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 빗방울이 얼굴을 때렸다. 가을비는 차가웠다. 지윤은 우산을 폈다. 도진은 이미 앞서 걷고 있었다. 한 손에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후드를 눌러쓰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지윤은 그 뒷모습을 따라 걸었다.


청운호수공원까지는 걸어서 10분 거리였다. 그 10분 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빗소리만 있었다. 우산이 작아서 어깨 한쪽이 조금씩 젖어들었다. 지윤은 그것을 말하지 못했다. 말하면 도진이 화낼 것 같았다.


공원 입구를 지나자 가로등이 드문드문해졌다.


5번 벤치.

도진이 걸음을 멈추었다. 주변을 한 번 훑어보더니 지윤에게 말했다.


"뒤에 오는 사람 없는지 봐. 휴대폰 들고. 사진 찍으라면 찍어."


지윤은 그 자리에 서서 왔던 방향을 바라보았다. 텅 빈 공원길이었다. 빗속에 가로등 불빛이 번졌다. 등 뒤에서 도진이 무릎을 꿇고 흙을 파는 소리가 들렸다. 축축한 흙 냄새가 올라왔다. 비닐랩과 종이컵과 검은색 절연테이프로 감싸진 지퍼백이 그 안으로 들어가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지윤의 발 안으로 빗물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신발 밑창이 얇았다. 흙이 젖어 있어서 발바닥까지 냉기가 전해졌다. 지윤은 그것을 느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냥 그 자리에 서서, 젖어가는 발을 느끼며 텅 빈 공원길을 바라보고 있었다.

찍어.


도진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지윤은 휴대폰을 들었다. 벤치 아래의 흙을 화면에 담았다. 셔터를 눌렀다.


새벽 2시 47분.


사진은 즉시 텔레그램으로 전송되었다. 받는 사람은 '래빗03'이라는 닉네임이었다. 조직은 그 좌표를 확인하고 이후 매수인에게 위치를 전달할 것이었다. 그것이 이 사건의 핵심 증거가 되리라는 것을, 그녀는 물론 알지 못했다.


도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에 묻은 흙을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공원길을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지윤은 그 뒷모습을 따라 걸었다. 우산 아래에서, 젖은 발로, 아무 말도 없이.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11.


접견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온 밤, 나는 한동안 모니터를 꺼놓은 채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


이 일을 하다 보면 가끔 이런 순간이 온다.

인간의 어리석음이 아니라, 인간의 취약함이 정면으로 보이는 순간.


지윤은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법은 나쁜 사람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관이 아니다. 법은 행위를 판단한다.

그리고 그녀의 행위는 명백했다.


현관문을 열자 하루가 꼬리를 흔들며 달려왔다.

갈색 시바견. 여덟 살. 서원시 동물보호센터에서 데려온 지 6년이 넘은 녀석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조금 느려졌지만, 내가 집에 들어오는 소리는 여전히 가장 먼저 알아챘다. 하루는 내가 어떤 얼굴로 집에 들어와도 같은 얼굴로 맞이했다. 세상에서 가장 무조건적인 환영의 눈빛으로.


나는 그 앞에 쪼그려 앉아 하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윤이 잃어버린 것은 단지 자유가 아니었다.

아침에 일어나 평범하게 밥을 먹고, 누군가에게 반갑게 맞이받고,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 스스로 결정하는 그 당연한 감각들이었다.


그리고 그 새벽, 젖어가는 발로 텅 빈 공원길을 바라보던 그 감각.


나는 그것을 법정에서 어떻게 꺼낼 수 있을지 생각하며 하루의 등을 쓰다듬었다.


변호인이 항상 무죄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죄의 무게를 정확히 달아내는 것, 그리고 그 무게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판사에게 알리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진짜 변호다. 그리고 실제로 변호인의 노력의 대부분은 죄의 무게를 판사에게 전달하는 일을 하는 경우가 더 많다. 피고인이 잘못한 만큼만 처벌받을 수 있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로 들어가 다시 펜을 들었다.




이 이야기는 작가가 법정 안팎에서 마주한 수많은 인간의 서사에서 출발한 허구의 기록입니다. 그러나 이 안에 담긴 고립과 추락, 그리고 다시 일어서려는 의지만큼은, 어딘가에서 실제로 살아 숨 쉬는 것들입니다. 등장하는 모든 인물과 사건은 창작된 것으로, 실존 인물 및 실제 사건과 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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