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증인신문이 있는 날 아침.
나는 법원 계단을 올라가며
파일을 한 번 더 확인했다.
CCTV 기록.
감정서.
휴대전화 문자.
영상 목록.
그리고 반대신문 질문지.
반대신문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다.
그것은 이야기의 구조를 바꾸는 작업이다.
검사가 만든 이야기가
견고한 성벽처럼 서 있다면
반대신문은 그 벽에 금을 내는 일이다.
그리고 오늘의 증인은
그 성벽의 가장 중심에 있는 사람이었다.
법정 문을 밀고 들어서자
공기가 달랐다.
피고인은 피고인석에 앉아
두 손을 모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구금된 지 석 달이 지난 사람의 자세였다.
그리고 증인석.
피해자가 들어왔다.
평범한 얼굴이었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사십 대 중년 여성.
동네 마트 앞에서 마주쳐도
그냥 지나쳤을 것 같은 얼굴.
그녀의 옆에는 수화 통역사가 있었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며 잠시 생각했다.
이 여자는
서울에 남편을 두고 내려왔다.
남편과 다퉜고
아는 사람이 있는 이 도시로 왔다.
그리고 그날 밤 그 방에 있었다.
나는 그녀를 악인으로 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진술이
사실과 얼마나 가까운지는
따져봐야 했다.
검사의 주신문이 시작됐다.
피해자는 수화 통역을 통해
익숙한 이야기를 반복했다.
"피고인이 나를 묶었다."
"도망치려고 했다."
"성기구를 사용했다."
"촬영했다."
나는 조용히 메모를 했다.
처음 듣는 내용은 없었다.
검사의 신문이 끝났다.
재판장이 나를 바라봤다.
"변호인, 반대신문 하시죠."
나는 천천히 일어났다.
첫 질문부터 시작했다.
"피해자는 수사기관에서
사건 당시 객실에서 도망치려고 했다고 진술했습니다.
맞습니까?"
통역이 전달됐다.
피해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 정도 시도했다고 했습니까?"
통역사가 말했다.
"여섯 번 정도라고 합니다."
나는 리모컨을 눌렀다.
모니터에
호텔 복도 CCTV 영상이 나타났다.
"이 영상은 사건 당일부터
구조 시점까지의 복도 CCTV입니다."
영상 속 복도는 조용했다.
새벽. 아침. 낮.
객실문은 열리지 않았다.
나는 영상을 멈췄다.
"이 영상에서
객실문이 열린 장면은 확인되지 않습니다.
단 한 번도."
법정이 조용해졌다.
"도망치려고 문을 열었다면
이 영상에 그 장면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통역이 전달됐다.
피해자는 잠시 멈췄다.
그리고 손을 움직였다.
통역사가 말했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나는 그 말을 조용히 적었다.
두 번째 질문.
모니터에 영상 일부를 띄웠다.
여자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물건을 던지고 있었다.
창문을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화면 밖에서 남자의 목소리.
"괜찮다."
"진정해라."
"아무도 없다."
"이 장면이
피해자가 말한 강간 장면 촬영입니까?"
통역사가 말했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세 번째 질문으로 넘어가려는 순간
법정 안에서 소리가 났다.
말이 아니었다.
낮고 거친 소리.
말을 할 수 없는 사람이 내는
괴성에 가까운 소리였다.
피해자였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몸이 흔들리고 있었다.
통역사가 재판장에게 말했다.
"증인이 잠시 중단을 요청합니다."
"어지럽다고 합니다."
재판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휴정하겠습니다."
법정에 침묵이 흘렀다.
나는 그 침묵 속에서 앞을 바라봤다.
피해자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마약과 환각과 혼란 속에서
무언가 끔찍한 밤을 보냈고
그 밤을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 의뢰인에게는
인생 전부가 걸려 있었다.
잠시 후 신문이 재개되었다.
피해자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창백한 얼굴이었다.
세 번째 질문.
감정서였다.
"피해자는 성관계가 있었다고 진술했습니다.
하지만 감정 결과
모든 곳에서 정액 반응은 음성이었습니다."
검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변호인, 단정적인 표현은 자제하십시오."
나는 차분히 말했다.
"감정서 내용 그대로입니다."
재판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관계가 있었다면
정액 반응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통역이 전달됐다.
피해자는 잠시 멈췄다.
그리고 손을 움직였다.
통역사가 말했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관계가 있었던 것은 맞다고 합니다."
나는 그 말을 메모했다.
그리고 마지막 질문으로 넘어가기 전
나는 잠시 멈췄다.
피해자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수화 통역사가 그 말을 전달했다.
나는 그 과정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피해자의 수화 동작이
통역사의 말과 완전히 맞아떨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수화를 할 줄 아는 게 아니었으니.
하지만 뭔가 달랐다.
미묘하게
달랐다.
나는 수화 기록을 들여다봤다.
그리고 결정했다.
나는 재판장에게 말했다.
"재판장님.
수화 통역사의 통역 내용이
증인의 수화 동작과 일치하는지
확인이 필요합니다."
법정이 조용해졌다.
통역사의 얼굴이 굳었다.
재판장이 천천히 말했다.
"구체적으로 말씀해 보시죠."
나는 말했다.
"증인은 수화로 질문에 답할 때
몇 차례 동작을 멈추거나 반복했습니다.
하지만 통역 내용에는 그 부분이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재판장이 통역사를 바라봤다.
"통역사는 정확하게 통역하십시오."
그 말 한마디로
법정의 공기가 달라졌다.
통역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이
오히려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 질문을 꺼냈다.
휴대전화였다.
모니터에 문자 메시지가 나타났다.
"발기가 안 된다."
"그냥 애무만 하자."
잠시 침묵.
"창문 열지 마."
나는 법정을 바라봤다.
그리고 말했다.
"강간범이
이런 문자를 보낼까요."
검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재판장은 펜을 잠시 멈췄다.
그 작은 침묵 속에서
법정의 공기가 바뀌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 앉았다.
손끝이 차가웠다.
피고인은 곁에서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처음 보는 감정이 있었다.
희망.
아주 조심스러운 희망이었다.
- 본 작품은 상상력과 문학적 재구성을 바탕으로 창작된 허구의 이야기입니다. -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단체, 사건, 배경 등은 모두 소설적 표현을 위해 구성된 것이며, 실제 인물이나 실제 사건과의 유사성은 의도된 것이 아닙니다. - 이 작품은 현실에서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인간관계와 사회적 상황을 소재로 삼아 문학적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특정 개인이나 단체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사실관계를 서술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의 성격, 행동, 직업, 관계, 사건의 경과 등은 이야기의 전개를 위해 창작되거나 변형된 요소이며, 현실의 특정 인물이나 사건을 직접적으로 지칭하거나 재현하려는 의도가 없습니다.- 독자분들은 본 작품을 사실 기록이 아닌 문학 작품으로서의 허구적 서사로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