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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도 귀찮아. 알아서 망해.’
인스타그램 알고리즘을 통해 우연히 보게 된 문구였다. ‘인과응보’라는 사자성어를 비튼 것 같은 모양새가 작은 웃음을 끼얹었다. 한편으로는 퍽 씁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정말 귀찮아서 복수를 못 하는 걸까? 아니면 순진하게도, 진짜 알아서 망할 거라고 믿는 걸까?
드라마 ‘더 글로리’를 보았다. 학교 폭력으로 몸과 마음이 망가진 여학생(송혜교)이 성인이 되어 복수하는 내용이다. 드라마를 보고 난 후 떠오른 영화 ‘친절한 금자씨’는 누명을 썼던 여자(이영애)가 출소 후 복수하는 내용이다. 주인공이 시원하게 복수하는 장면을 보면서 우리는 쾌감을 느낀다. 알고 보면 너무나 비현실적인데도 말이다. 십수 년 복수를 계획하고 조력자들을 모으고 그것을 실행한다는 게 가능할까? 평범한 서민이라면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는 송혜교나 이영애가 아니다. 우리의 삶이 영화가 아닌 것처럼.
흔히 ‘잘 사는 게 복수다’라는 말을 한다. 그런 말은 이미 잘 살 수 없게 된 사람들에게 했다가는 화만 불러온다. 나도 수없이 들은 말인데, 화난다. 그게 무슨 복수야. 가해자들은 피해자들이 잘 살든지 말든지 관심도 없는데! 그렇다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말하기엔 우린 힘이 없다. 특히, 상처 입은 사람들은 약해질 대로 약해져 있다. 받은 고통을 되돌려줄 만큼 악해지기도 힘든 사람들이다. 그러니 결국에는 ‘복수도 귀찮아. 알아서 망해.’ 밖에 답이 없는 것이다.
인과응보라는 말을 좋아하게 된 계기는 내게 해를 끼친 사람이 불행해진 장면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 불행이 나로 인해 생긴 것은 아니었지만, 불행해진 모습을 보니 무서워졌다. 인과응보라는 게 정말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 말을 믿게 된 건 나의 나약함 때문일지도 모른다. 모든 인생에 희로애락이 있고 굴곡이 있는 법인데, 마침 그 사람 인생이 바닥을 칠 단계였을 뿐 인과응보는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믿어야 살 것 같은 때가 있었다.
오래전에 내 인생을 지저분하게 만든 남자한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살면서 당신 인생에 나쁜 일이 생길 때마다 날 떠올려! 죽을 때까지 당신이 불행하길 바랄 거니까!”
그 사람이 지금 잘 사는지 못 사는지는 모르겠다. 불행할 때마다 진짜 나를 떠올리는지도 모르겠다. 근데, 죽을 때까지 그 사람이 불행하기를 바라는 건 일찌감치 그만뒀다. 내 인생, 내 감정을 그렇게 낭비할 만큼 나는 어리석지 않았다. 잘 살든지 말든지, 불행하든지 말든지 관심 없다. 그저 나쁜 관계를 끊을 수 있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이었나 싶다. 어쩌면 그게 행복으로 가는 첫걸음이었다. 나쁜 인연을 끊는 것이.
어차피 사람들은 나쁜 사람을 싫어한다. 좋은 사람으로부터 선한 영향력을 입고 싶어 한다. 잘 웃고 밝고 건강한 사람을 좋아한다. 나쁜 사람 옆에 좋은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근데 좋은 사람 옆에 있고 싶어 하는 나쁜 사람들은 있다. 좋은 사람은 만만하게 보이니까. 여기서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의 기준을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해서는 안 된다. 사람은 누구나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데, 어떤 인격을 부각하며 살아가는지가 중요하다. 그러니까 좋은 사람이라도 내면은 돌덩이일 수도 있는 것이다. 나도 가끔 그런 말을 듣는다. 보기보다 강하다는 말. 보기엔 어땠길래?
내가 좋아하는 작가인 마루야마 겐지가 말했다. ‘목적이 없는 자는 목적이 있는 자에게 죽임을 당’한다고. 그것은 ‘간접적인 자살’이라고. 언젠가 나는 이 말이 괴로워 살 수가 없었다. 내 청춘이 그랬던 것 같아서였다. 목적이 없었으니 계획도 방향도 없었다. 그저 목적을 가진 사람들에게 끌려다니며 살았다. 얼마나 쉬운 먹이였을까. 그 시기에 나쁜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그들이 나쁜 사람이라는 건 세월이 지나서야 깨달았다. 목적 없는 삶, 의미 없는 관계, 낮은 자존감, 모든 것이 나를 간접적인 자살로 내몰았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였다. 복수고 뭐고, 살고 싶었다. 모든 관계를 끊고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그래야만 했다. 나는 고립과 글쓰기를 택했다. 가난은 부록으로 따라왔다. 9년 동안 외진 시골 마을을 떠돌았고 사람들과 소통하지 않았다. 이전의 관계들이 자연스럽게 끊어졌다. 한동안 지독하게 혼자였다. 새로운 인연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소설가’라는 뚜렷한 꿈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삶의 목적이 생긴 것이다.
완전히 달라진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미 한번 죽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다시 살아난 나는 나를 죽인 사람들에게 복수를 다짐했다. 수많은 방법을 생각하고 계획했지만 실행하지는 못했다. 다만, 그 생각들을 종이에 쓰다 보니 소설이 완성되고 있었다. 진짜 복수를 한 것처럼 꽤 성취감이 들었다. 그래서 계속 썼다. 나쁜 인간들을 소설 속에 집어넣어서 때리고 죽였다. 내가 한번 죽었던 것이 간접적인 자살이었다면, 나를 그렇게 만든 사람들에게 간접적인 복수를 시작한 것이다. 그 불손한 목적이 나를 소설가로 만들었다.
작가가 된 후, 나는 또 한 번 바뀌고 있었다. 나쁜 사람은 칼 같이 끊고 뒤돌아보지 않는다. 그 어떤 연결 고리도 남겨두지 않는다. 그랬더니 사람들은 나를 쉽게 보지 않았다. 점점 자존감이 높아지면서 복수라는 단어는 사라졌다. 나쁜 사람들에게 분노했던 마음이 연민으로 바뀌기도 했다. 왜 그런 어른이 되었을까, 너희야말로 계속 자신을 죽이며 살고 있구나, 참 가엾다. 그랬더니 내가 쓰는 소설의 색깔도 바뀌기 시작했다. 모든 인물을 연민하는 쪽으로.
이제는 누구에게도 복수하고 싶지 않다. 내 소설 속 인물들을 연민하고 싶을 뿐이다. 진짜 나쁜 사람들은 알아서 망할 테니까, 나는 내가 망하지 않을 방법만 생각하면 된다. 나쁜 마음을 먹는 것만으로도 삶은 피폐해진다. 나쁜 사람과는 헤어지는 게 아니라 끊는 것이다. 잘 끊고 잘 비우고 좋은 것으로 채워 나가자. 복수? 귀찮다. 각자 알아서 망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