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남자 사람과 약속이 있었다. 그는 지하철을 타고 강남역에서 출발했다고 연락이 왔다. 1시간은 걸릴 거라고 했다. 나는 지하철 입구에서 그를 기다렸다. 직장인들 퇴근 시간이었고, 그도 직장인이었기에 지하철은 인파로 넘쳤다. 계단을 올라오는 수많은 사람 중에 구겨진 그가 보였다. 많이 지친 것 같았다.
그는 연신 팔을 주무르며 팔이 아프다고 하소연을 했다. 1시간 동안 서서 왔다고. 나는 의아했다. 서서 왔으면 다리가 아파야지 팔이 왜 아픈 걸까. 그 이유를 듣고 나서야 그가 안쓰러웠다. 솔직히 말하면 지하철에 있는 거의 모든 남자가 안쓰러웠다. 처음 느끼는 연민이었다.
남자 사람은 일단 지하철에 오르기 전에 백팩을 앞으로 맨다. 지하철에 들어가면 무조건 두 손을 높이 든다. 주위에 여자 사람이 있을 때는 더 신경 써서 손을 들어야 한다. 내 손은 여기 있어요! 절대로 손을 내리지 않는다. 출퇴근을 그렇게 한다. 매일 두 번씩 그렇게 벌을 선다, 고 남자 사람이 말했다.
“너무 예민한 거 아닌가?”
내 말에 남자 사람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출퇴근하지 않는 너는 입을 다물라는 듯 황당한 표정이었다.
“그 많은 남자가 모두 그렇게 벌을 선다고?”
대체로 그렇다고 대답하면서 그는 한숨을 쉬었다. 내가 좀 한심한 모양이었다. 세상 물정, 아니 대중교통 물정을 모르는 건 맞는데, 나는 그가 유난히 예민한 거라고 단정했다.
그날 이후로 남자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물었다. 그 사람의 말이 진짜냐고. 그랬더니 그날 내가 본 눈빛과 표정과 대답이 돌아왔다. 그걸 이제 알았냐고. 지은 죄도 없는데 탑승과 동시에 양손에 수갑을 채운다고. 가방을 앞으로 메는 이유는 남은 비밀의 손 하나도 차단하기 위해서라고.
“남자로 사는 거 존나 힘든 세상이야.”라고 말했다.
학창 시절에 버스 안에서 추행당한 적이 있었다. 범인의 손은 버스 위에 매달려 있었고, 추행한 건 손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부위, 누군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비밀의 손이었다. 그러니까 그의 양손은 버스 손잡이에 올라가 있었으므로, 아무도 내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나중에 알았다. 범인이 상습범이라는 것을. 내 친구도, 친구의 친구도 당했다는 것을. 무엇보다 그를 처벌할 증거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피해 다녔다. 그 작은 네모 안에서 나쁜 손을 피하기 위해 계속 고개를 돌리며 남자 사람을 주시했다.
그 기억을 얘기하며 나는 남자에게 말했다.
“여자로 사는 게 더 힘든 세상이야.”
남자가 반격했다.
“남자로 사는 건 ‘존나’ 힘들다니까?”
나는 지지 않았다.
“여자로 사는 게 ‘더’ 힘들다니까?”
‘존나’와 ‘더’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답이 없는 싸움. 우린 허탈하게 웃었다. 남자든 여자든, 그러니까 모두 힘든 세상인 거다. 남자 사람은 무심결에 신체가 닿지 않기 위해. 여자 사람은 누가 감히 연결하나 관찰하기 위해. 남자 사람은 괜한 오해를 받지 않으려고. 여자 사람은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사람들은 정말 피곤하게 살고 있구나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음에 개탄했다.
이 문제를 개인이 풀 수는 없을 것 같다. 상당히 예민한 문제이기도 하다. 서로 닿을 수밖에 없는 지옥 같은 대중교통에 방안이 없을까.
서울동행버스가 개통되기는 했다. 그러나 특수 지역에 제한된다. 찾아보니 여러가지 의견들이 있다. 지하철에 남녀 칸을 각각 만들자는 의견도 있었고, 출퇴근 시간을 대기업부터 조정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재택근무를 확대하자는 의견, 통근 차량 서비스를 의무화하자는 의견도 보였다. 내 생각은 재택근무가 확대되는 게 좋을 것 같다.
이렇게 국민들은 열심히 의견을 내는데, 그 의견을 수렴해야 할 높으신 분들은 지옥을 경험할 일이 없으니 생각이나 있으신지 모르겠다. 국회 종합정책질의에서 국무총리에게 현재 택시 기본 요금을 물었더니 '천 원'이라고 대답했고, 버스비를 물었더니 '2천 원쯤'이라고 대답했다. (현실은 서울의 택시 기본 요즘 4,800원, 버스 요금 1,500원) 이런 기막힌 현실에서 '존나'와 '더'의 싸움은 끝날 수 있을까.
집에서 일하는 게 지겨울 때마다 출근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곤 했던 나, 반성한다. 적어도 나는 자신과의 싸움만 하면 되니까. 물론 돈은 못 벌지만, 지옥철 안에서 벌어지는 오해와 불신과 혐오의 위험에서 안전하니까. 닿지 않기 위해 손을 들고 벌서거나 미어캣처럼 두리번거리지 않아도 되니까. 그 덕분에 얻는 건 외로움과 가난이다. 이러나저러나 완벽한 삶은 없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