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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여진 Dec 06. 2020

쓰지 못한다는 말에 대하여

글을 쓰는 것은 운명이나 영감이 아니라 오로지 나의 손이다

글 쓸 때 약간의 자괴감을 느낀다. 분명 첫 번째 책을 낼 때까지만 해도, 글을 쓰는 건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아름다운 일이라고 여겼다. 물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쓰는 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예전에는 내 글을 보면서 키야, 잘 썼다. 난 역시 너무 멋지다. 스스로 감탄한 적이 많았다. 요즘에는 전혀 그런 적이 없다.     


나는 분명히 내 일상을 쓰고, 내가 하고 싶은 메시지와 자연스럽게 연결시키는 글을 쓰고자 했다. 그런데 내 일상도 제대로 쓴 거 같지 않고, 그렇다고 메시지와 연관성이 있는 거 같지도 않다. 글이 너무 쉽게 쓰여지는 문제도 있다. 첫 책을 쓸 때까지만 해도 머릿속에서 생각난 것을 자판 위로 옮겨 쓰고 있었다. 지금은 머릿속에서 생각 없이 그저 손이 타자를 치는 대로 쓰는 것 같다. 필터링과 고민 없이 쉽게 쓰여진 글은 누구에게도 울림을 주지 못할 거라는 부담감이 엄습해온다.     


나는 깊이도 없고 울림도 없는, 얄팍한 궤변을 늘어놓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책 원고를 쓸 때만은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중이라는 자각 정도는 있었는데 지금은 전혀 없다. 그저 컴퓨터 앞에 앉아서 시간 낭비만 하고 있다. 내가 쓰는 말을 내가 지키지 못하고, 그저 분량을 채워내는 데만 급급하다. 이런 글을 써서는 안 된다는 불안감이 문득 찾아온다.     


누군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소위 ‘힐링책’ 으로 불리는, 에세이는 전부 불쏘시개라고. 나는 그런 사람의 말을 믿지 않지만 마음 어딘가가 아파 오는 것은 틀림없었다. 아름답게 빛나던 내 안의 불꽃을 잃어버린 걸까? 그 불꽃은 어째서 꺼져버린 걸까? 나는 이제 마음속에서 글에 대한 열정이 사그라져 가는 것을 느꼈다.     


어제는 오랜만에 브런치에 접속했다. 새로 쓴 글을 올려야 했기 때문이다. 몇 달 전에는 내가 위에 쓴 내용처럼 글에 대한 회의감이 너무 심하게 들어서, 글을 써서 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왜 이런 글을 쓰고 있는지 의미를 알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몇 달 동안 브런치에 접속하지도 않았다. 나는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을 쓰는 게 아니지만, 내 스스로 내 글을 사랑할 수 없다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어제는 아니었다. 어제는 글 쓰는 일이 오롯이 즐거웠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그 말을 기록으로 남겨야 하는 이유가 뭔지 명확히 알고 있었다. 주제가 선명했고, 기억이 선명했으며 그것을 남겨야 한다는 사명감마저 느껴졌다. 잊지 않아야 한다는 사명감. 선생님의 목소리가 언젠가 내게 희망이 되고 구덩이에 빠졌을 때 일으켜줄 수 있는 손이 될 거라는 믿음. 잊고 싶지 않다는 소망. 학교에서 선생님의 그 말을 듣고 자리로 돌아가는 길에 번개 치듯 떠오른 강력한 한 문장. 마치 운명처럼.     


한글 프로그램으로 글을 쓰고 있는데, ‘모든 일들을’ 이라 입력하니 사용자가 맞춤법을 틀렸을 때 나타나는 붉은 줄이 그어졌다. 영어 문법에서 everyone을 단수 취급하는 것처럼, 이미 ‘모든’ 이라는 단어가 앞에 있으니 ‘들’ 이라는 말이 필요 없는 것일까? 아니면 차가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포도주 와인처럼 중복되는 뜻을 나타내는 말이 두 번 들어갔기 때문에 하나는 없애라고 하는 걸까? 나는 잘 모르겠다. 모든 일들을. 모든 일들을. 세상은 이렇게 돌아가지 않을까.     


조금 틀리고 문법에 어긋난 말이라도, 내용만 전달할 수 있다면. 말하고자 하는 마음을 꺼내서 생생하게 보여줄 수 있다면. 괜찮은 게 아닐까. 그런데 아직 확신이 없다. 내 마음을 제대로 꺼내서 보여주고 있는 건지.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마음을 보여주는지. 내가 보여주고자 하는 마음이 진심인지도 잘 모르겠다. 비문으로 가득찬 글. 읽기 싫어지고 진정성을 떨어트리는 온갖 미사여구와 부사들... 나는 아직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떠오는 대로 토해내듯 생각 없이 쓰기만 하는 글이 내게 어떤 가치가 되는지도 잘 모르겠다.     


어느새 창 밖의 하늘이 오색 빛깔으로 밝았다. 나도 지금까지 몰랐던 사실인데, 해가 막 떠오를 때의 하늘빛은 정말로 무지개색이다. 지면과 가까운 곳은 붉은색, 청명한 하늘은 상쾌한 푸른색. 그 사이에는 설명할 수 없는 오묘한 색들이 자리하고 있다. 무지개를 빨주노초파남보라 말하는 것처럼 쉽게 여기부터 여기까지는 빨강, 여기는 주황, 이렇게 끊어 말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하늘색은 정말 무지개색이다.     


그라데이션, 이 말이 맞는 것 같다. 7시 반쯤의 하늘에는 빨간색과, 주황색과, 약간의 노란색 그리고 초록색, 마지막으로 푸른색이 자리하고 있다. 딱 무 자르듯 가를 순 없겠지만 그 모든 색들이 존재한다. 내 삶도, 내 글도 이렇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어떻게 살면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무가치와 가치, 무의미와 유의미, 아름다운 글과 그렇지 않은 글로 나누겠는가.     


인생에서 확실히 나눠지는 건 잘 없다. 흑과 백. 긍정과 부정. 좋음과 싫음. 이것들이 칼로 무 자르듯 명확하게 베어지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아주 가끔이다. 흑과 백 사이에는 수많은 회색이 있고, 긍정과 부정 사이에는 명확하게 가르지 못할 감정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긍정과 부정으로 분류하기 어려운 일련의 사건들이 우리 인생에는 너무 많이 일어난다. 좋으면서 싫은 것. 싫은데 좋은 것. 어찌 이런 것이 없겠는가?     


운명을 너무 낭만적으로 보지 말아야겠다. 인생에 운명이라는 게 어디 있는가. 내가 운명이라고 느끼고 싶어할 뿐이다. 번개처럼 찾아오는 기분 좋은 떨림은 아주 가끔 강력한 동기가 있을 때 나타나는 것이다. 그게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우며 떨림이 찾아오지 않을 때 쓰는 글은 아름답지 않다고 믿지 말아야겠다. 내가 즐겨 봤던 모 웹툰의 명대사처럼, 운명은 없다. 선택만 있을 뿐이다. 내가 운명이나 영감이라고 믿고 싶어 하는 것은 사실 우연이다. 글을 쓰는 것은 운명이 아니라 오로지 나의 손과 나의 머리와 나의 경험과 나의 인생이다.     


내 글을 마음에 들게 하는 것은 우연히 써진 아름다운 글이 아니다. 거지 같고 내 실력이 의심되고 눈 뜨고 못 봐주겠는 글이라도 매일 앉아서 쓰는 습관이다. 내 글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다음 날 눈을 뜨면 다시 자판에 손을 얹는 용기이다. 그렇게 쌓인 시간이, 쌓인 글이 결국 매일 아름다운 글을 쓰는 실력이 된다. 지금은 명확한 주제, 쓰고자 하는 욕망, 생생한 경험이 한 번에 겹쳐 마음에 드는 글이 나오는 날이 가끔이다. 그러나 세 가지가 갖춰지지 않아도 일단 오늘 쓰는 나날이 계속되면 그게 매일이 된다.  

   

그래서 나는 오늘 한 번 더 용기를 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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