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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여진 Aug 16. 2020

일관적인 거짓말

나는 학교 수업 시간에 진행되는 토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국어책을 보면, 2년에 한 번? 1년에 한 번? 씩은 꼭 들어가 있는 교육과정인 토론. 우리 학교가 그랬던 건지, 우리가 너무 어려서 그랬던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학교에서 했던 토론은 항상 별로 흥미롭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일단 첫 번째 문제는, 대개 찬성 진영과 반대 진영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항상 자기 마음대로 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학교에서 과제로 내주는 토론은 대개 찬성 혹은 반대 중 하나에 아이들이 쏠리는 경우가 많은데, 토론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려면 찬성측과 반대측의 수가 어느 정도는 비슷해야 한다. 그렇기에 선생님들은 제비뽑기로 팀을 나누거나, 가위바위보를 해서 진 쪽을 할 수 없이 다른 진영으로 옮기거나, 혹은 찬성 역과 반대 역을 한 번씩 번갈아가며 할 수 있게 한다.     


이 방식의 문제점은, 운이 없거나 가위바위보를 못 하면 내 생각과 반대에 있는 의견이 타당하다고 주장해야 하는 일이 생긴다는 사실이다. 내 생각과 전혀 반대되는 말을 온 힘을 다해 외쳐야 하는데, 토론에 의욕이 생기겠는가? 아니라고 본다. 물론 자신의 생각과 다른 이야기를 해야 하더라도 최대한 그 근거를 찾고, 주장하는 연습을 하는 것도 좋다. 살다 보면 자신이 원하는 말만 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토론 자체를 좋아하고, 의욕이 있는 학생들 한정이다. 토론에 대한 의욕이 별로 강하지 않은 학생들은 팀이 잘못 정해지면 그대로 아, 그냥 대충 하자. 라고 생각하게 된다.     


두 번째는, 토론에 의욕이 있는 학생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점이다. 많이 잡아도 반? 결국 주도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발언하고 싶어하는 학생들이 토론을 주도하게 된다. 의욕 없는 학생들은 다른 친구가 말해 주는데, 내가 굳이 말할 필요가 있을까? 싶어 참여율이 현저히 낮아지고, 결국 의욕 있는 학생들끼리만 주장을 주고받게 되는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반 전체를 반으로 나눠서 토론을 했는데 나와 다른 한 명 둘이서만 말한 적이 있다.    

 

세 번째(이건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이유와도 같다)로는, 다른 쪽의 의견을 수용하고 내 관점을 바꾸는 것을 ‘지는 것’이라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이건 우리 반만 그랬던 건지도 모르겠다.     


사실 토론이란,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가 생각하는 바를 공유하며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를 더욱 탄탄하게 다지거나, 다른 쪽의 주장에 대해서도 이런 부분은 이 쪽이 맞는 것 같아. 하며 시야를 넓히거나, 토론을 하며 나누었던 근거들을 통해 단순한 찬성/반대가 아닌 절충안을 만드는 등에 의의가 있다.결국 토론의 궁극적인 목표는 ‘사고 영역의 확장’이지 단순히 이기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내가 토론 중에 이런 부분에서는 이 말이 맞는 것 같다고 말하자 왜 반대쪽의 의견을 인정하는 거냐고, 그러면 우리가 지는 거 아니냐고 떠들던 아이들이 있다. 나는 내가 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하고 시야의 범위를 조금 더 넓힌 것이다. 장기적으로 보자면 토론에서 이기는 것보다 오히려 타인의 의견을 수용하고 생각을 넓히는 것이 훨씬 더 이득이다. 그러나 학교에서 진행되는 토론은 이 부분을 간과한다.     


나는 교육학 학위를 가진 사람도 아니고, 매일 토론을 하며 토론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는 사람도 아니다. 이런 내가 하는 말이 그저 웃기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학교에서 하는 토론을 직접 생생하게 경험한 학생의 입장이고, 내가 생각하는 점을 기록으로 남길 뿐이다. 따라서 내 생각은 정답이 아니고(애초에 정답이라는 게 있긴 한가?) 그러니 완전히 믿을 필요도 없으며 정답이 아니라고 헐뜯을 필요도 없다.     


내 생각은 내 생각이고, 읽는 여러분의 생각은 여러분의 생각이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내 생각에 근거가 빈약하다고, 잘 알지도 못하는 학생이 어째서 한국 토론교육의 실태에 대해 비판하냐고 욕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거창하게 한국 토론교육의 실태에 대해 비판하고 싶은 것도 아니고, 오로지 ‘내’가 겪은 ‘우리 반’의 토론에 대해 ‘나만의 기록’을 남기고 싶은 것이다.     


나는 거창하게 한국 교육계가 이런 문제점을 고쳐야 한다! 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그냥 내가 생각하는 우리 반의 토론에 대한 문제점을 알아보고, 굳이 토론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의견이 갈려 대립하는 상황에서‘나는 이렇게 하지 말아야지’하고 나를 되돌아보며 다짐하기 위함이다. 이 브런치에 올리는 모든 글들은 오로지 나를 위한 성찰 일기, 조금 더 나아가서 내 말에 공감하는 독자분들이 계신다면 함께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떤지 제안하는 글이다. 전혀 거창할 필요가 없다. 나를 바꾸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세상을 바꾸겠는가?     


며칠 전에 읽었던 책을 생각하면 비단 학교에서 진행하는 토론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베스트셀러를 읽어보고 비평하는 책이었는데, 책의 앞 페이지에서 주장하는 내용과 뒷 페이지에서 주장하는 내용이 상반되면 앞뒤가 안 맞는다, 의견에 일관성이 없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일관성이 꼭 필요할까? 한 실험 결과에 따르면, 실험자들에게 설문지를 작성하게 시키고 한 달 후 실험자가 작성한 설문지와 비슷한 필체로 전혀 다른 내용에 체크한 뒤 설문지를 보여주었더니 자신이 체크한 내용이 확실하다고 주장하였다고 한다. 고작 한 달 전에 내가 어떤 의견을 가졌는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사람인데, 책을 쓰는 데 걸리는 시간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지만 보통 한 달보다는 훨씬 오래 걸린다. 일관성을 바라는 건 욕심이 아닐까?     


또한, 글을 쓰다 보면 의견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고작 한 편의 글을 쓰는 중에도 말이다. 주장하는 내용이 변하는 건 이런 이유다. 글을 쓰다 보면 썼던 내용이 차곡차곡 쌓여서 그와 함께 내 머리도 성장하기 때문에, 책의 후반부 쯤이면 세상을 보는 관점도 반쯤 바뀌어 있을 수 있다. 글을 쓰는 동안 내공이 쌓이며 초반에는 보지 못 한 것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의견이 바뀌었으면 이전에는 이렇게 썼지만 이제는 관점이 바뀌어 이렇게 생각한다. 라고 덧붙이면 되는 일이다. 일관적이지 않음은 나쁜 일이 아니다.     


나는 가끔, 일관성이란 많은 이들이 추구하는 덕목이지만 실제로 일관성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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