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세계가 온다
‘하루하루 세월 가니 내 나이도 가는구나’ 여덟 살 무렵 내가 쓴 시의 일부다. 시 전체는 기억 못 해도 이 구절은 까먹을 수가 없는 게, 부모님으로부터 워낙 많이 회자됐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서 만큼은 이 구절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나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와 같이 유명한 시구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이렇듯 어릴 적 난 애 늙은이 같은 면이 있었다.
새천년을 맞이해도 변한 거는 별로 없었다. 컴퓨터 전산망에 대혼란이 와 핵미사일 버튼이 눌러진다거나, 지구가 멸망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내 삶도 그랬다. 나는 여전히 애 늙은이 같았고, 시간은 변함없이 흘러갔다. 그 와중에 가장 큰 변화는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됐다는 거다.
3학년은 한글이 어느 정도 입에 붙고, 누구나 의견을 가감 없이 표현하는 나이다. 동시에 잘 모르는 말도 일단 뱉고 보는 나이기도 하다. 욕도 배우고, 상황에 맞지 않는 말도 떠들어 대면서, 부모님, 선생님한테 혼도 나며 언어 사용법을 익히는 때다. 한편 또래 아이들은 ‘즐’이나 ‘반사’와 같은 그들만의 언어를 쓰며 킥킥거리기도 했다. 나도 대부분 그랬는데, 때로는 그러고 싶지 않은, 도저히 내키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애자냐?” 말이나 행동이 이상하거나 아니면 그냥 별 생각없이 친구들을 놀리거나 비하할 때 쓰던 말이다. ‘장애자’를 나타내는 말에서 왔다. “장애인 같다” “장애인이냐?”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말들이 당시엔 유행이었다. 아이들 사이에서 번지는 유행은 집요하고 경쟁적이다. 반복을 좋아하고 따라 하기 좋아하는 그 또래의 아이들은 서로를 ‘애자’ 취급했다. 학교에 장애인이 늘어갔다. ‘진짜 장애인이 돼도 웃을 수 있을까?’ 쓸데없이 깊게 생각하며 혼자만의 생각에 빠졌고 아이들이 미웠다.
동조는커녕, 그 말을 들어주고 버텨주기도 버거웠다. 버티기 위해 '비유'와 '은유'라는 단어를 배우기 전에 실전용으로 사용해야 했다. 애들이 정말 그런 뜻을 말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웃긴 상황, 어이없는 상황을 말하는 거라고, 애들이라 아는 단어가 별로 없어서 그러는 것이라 애써 생각했다.
안 그랬으면 하루가 멀다 하고 주먹다짐을 했을 것이다. ‘저 아이들은 장애인이 뭔지도 모르면서 그냥 일종의 은유로 사용하는 걸 거야, 아무 생각도 없이, 그냥 또래 애들을 따라 하는 거겠지. 철이 없는 거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비웃으려는 게 아닐 거야.’ 사실 실제로 그랬을 것이다.
그쯤이었다. 내가 또래 애들과 서먹해진 때가. 그들이 서먹해진 게 아니라, 나 혼자 괜히 서먹해졌다. 그런 용어를 스스럼없이 쓰는 또래들이 나와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애자’를 입에 올리는 애들은 내 머릿속 친구 목록에서 엑스자를 그었다. 어느새 내 친구 목록은 빨간 줄로 가득했다.
그때부터 ‘요즘 애들이란...’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 애늙은이 시기가 연장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