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and Jun 13. 2024

이름은 누가 짓는가  (시카고)

영화 속 ‘박수’ 돋보기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시인의 시 <꽃>에서는 존재는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있지 않다. 그보다는 다른 것들과 관계를 맺을 때 그 관계 속에서 의미를 지닌다. 관계 맺음의 시작은 관심과 명명이다. 시에서는 그 관계가 연인 사이인 것처럼 보이고 시적 화자가 대상을 꽃이라고 명명함으로써 낭만적인 분위기가 나타난다. 하지만, 시어나, 화자와 대상 사이 나타나는 가치를 배제하고 시 전체가 말하는 본다면, 시에서 나타난 낭만이 긍정적인 것이 아니라 ‘여백’과 ‘가능성’의 단어로 바뀐다면,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는 결코 좋은 것이라고만은 볼 수 없다. 


 영화 <시카고>에서 벨마와 록시는 살인을 저지르고도 대중의 관심과 애정을 받는다. 또 죄에 상응하는 벌을 받지 않고, 석방돼 공연을 하며 관객들의 호응을 얻는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변호사인 빌 리가 대중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를 만들어 여론을 호도하고 언론도 합세한 것도 있다. 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그들의 행태에 대중들이 열광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면 변호사 빌리도, 언론도 대중들의 수요가 있으니 거기에 맞춘 것일 뿐이다. 벨마와 록시는 그 과정이 어떻다 할 지라도 결국 살인자다. 또 결정적으로 이들은 일말의 반성도 하지 않고 자신들의 죄를 합리화한다. 그런데도 대중들은 그것을 ‘살인’이라는 이름으로 담백하게 부르길 원하지 않는다. ‘미모의 여성이’, ‘겁박에 못 이겨’, ‘임신한 채로’ 등등의 수식어에 열광하면서 ‘쇼’를 즐긴다. 그러는 사이 사건의 본질은 왜곡된다. 결국 영화 시카고에서 대중들이 불러준 것은 죄나 살인자가 아니라, 그들의 사연과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무대에서 벨마와 록시는 총으로 살해한 자신들의 죄를 연상시키는 총을 들고 쏘는 퍼포먼스를 한다. 록시는  관객에게 “여러분이 없었다면 우리도 없었어요”라고 한다. 관객은 이 말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들에게 아낌없는 박수갈채를 보낸다. 그리고 그 박수는 록시의 말처럼 그 존재를 사라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게 한다. 대중은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어 그들을 있게 했다. 그것도 대중의 지지를 받는 정당한, 사랑받는 존재로서 그들을.     



 영화는 1920년대 시카고의 여성 죄수들의 이야기를 모티프로 하지만, 어떤 시대에 한정된 이야기는 아니다. 아직도 언론과 대중은 범죄와 범죄자를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는 그 이면의 자극적인 이야기를 발굴하고 끊임없이 수식어를 붙인다. 그 행태들이 비록 그것들을 영화에서처럼 대놓고 비호하거나 추앙하는 건 아니지만, 그 자극적인 이야기를 소비하고 불러들이는 행위들은 결국 범죄에게 이름을 불러주어 존재성을 부여하는 건 같다. 시대와 장소적 배경이 다른 영화 <시카고>가 낯설지만은 않은 이유다.   


매거진의 이전글 미완의 완 (화양연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