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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다, 산다 (원더풀 라이프)

by Anand

죽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종교가 있으면 종교에서 말하는 천국으로, 아니면 죽는 순간 뇌에서 분출되는 엄청난 양의 도파민이나 집중력을 높이는 노르에피네프린이 환각을 일으켜 자신이 원하는 이상적인 공간에 머문다는 착각을 일으키게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과연 그런가. 영화 <원더풀 라이프>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고 당연히 찾아오는 것. 그게 다인가. 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죽는다고 죽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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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시작하면서 학교 같은 곳에 죽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모습을 보여준다. 생을 다한 이들에게 남은 관문은 사는 동안 가장 행복했던 기억을 끄집어내 상세히 말해주는 거다. 림보라 불리는 이곳의 직원들은 망자들과 같이 대화하며 그들이 가장 행복했던 기억을 꺼낼 수 있도록 돕는다. 그리고 이에 따라 영상을 만든다. 이 과정을 거쳐야만 망자들은 비로소 천국에 가 행복한 기억을 끊임없이 재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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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막상 자신이 행복했던 기억을 찾기가 쉽지 않다. 역시 망자인 직원들이라고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계속해서 질문하고 대화를 할 뿐 특별한 능력은 없다. 상대의 생각을 말하지 않아도 알아차린다거나 하지도 못하고, 상대가 말하는 정도의 정보만 알 뿐이다. 영상을 만드는 것 역시 신비로운 공간과 신비로운 존재들이라는 설정에 비해서는 투박하다. 살아있는 존재들이 고뇌하고 무언갈 만들어 가는 모습과 흡사하다. 이런 설정은 마치 삶과 죽음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죽음과 삶은 불가분의 관계라는 걸 역설하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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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은 회의적인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 ‘결국 죽으면 다 의미 없는 것 아닌가’ 어디까지나 영화적 상상력일 뿐이지. 죽어서 어떤 경험을 할지는 모르는 것이고, 설령 그런다고 해서 죽었는데 무슨 소용인가. 하지만 영화는 죽음에 대해 말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영화는 죽음의 공간을 특별하게 그리지 않음으로써, 또 삶의 행복한 기억으로 영원한 죽음을 맞을 수 있다는 설정을 통해 삶이 맞닿아 있는 것을 보여주며 어떻게 죽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죽음의 모양이 삶의 모습에 달려있다는 것은 한 차례 더 생각하면 동어반복처럼 들리겠지만 결국 삶의 모양은 삶의 태도에 달려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영화는 죽음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삶과 맞닿아 있는 죽음을 말하면서 역시 죽음과 맞닿아 있는 삶에 대해 말한다. 천국은 착한 사람이 가는 게 아니라 행복한 기억을 말할 수 있는 행복한 사람이 간다. 인간은 부유하고 태평스러워도 불행할 수 있으며 고난한 가운데도 행복할 수 있다. 행복은 행복할 조건을 외부로부터 가져와 쌓는 게 아니라 행복한 사람은 자신의 삶에 대한 애착을 통해 그 내부로부터 채워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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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같은 사람은 진정으로 ‘생’을 사랑하는 만큼 자신의 생과 뿌리가 같은 다른 사람들과 모든 생명의 생을 존중하며 사랑한다. 그런 점에서 행복한 사람은 모든 종교나 철학에서 신이나 인간에게 놓인 삶을 사랑하는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영화가 던지는 ‘죽는다고 죽는 것인가’ 하는 질문은 삶에 대한 질문으로 향한다. ‘산다고 사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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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는 인물들이 달을 바라보거나 언급하는 부분이 종종 나온다. 달은 움직이지 않는다. 지구가 태양을 공전하면서 지구와 태양, 달의 위치가 바뀌면서 다르게 보이는 것일 뿐. 그 실체는 변하지 않는다. 그런 달을 두고 누구는 꽉 찬 보름달을 보며 눈을 떼지 못하기도 하고 누구는 손톱 모양의 달을 아름답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영화에서 달은 삶을 빗대는 것처럼 보인다. 이미 살아온 삶은 제자리에 있지만,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또 아름다움의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삶도 마찬가지다. 삶이 정해져 있든, 혹은 이미 지나간 삶일지라도 이를 바라보는 시선과 삶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삶의 모양은 이리저리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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