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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우성 Apr 19. 2020

#10. 첫 출근 장소는 브라질 입니다

대기업은 시스템으로 굴러간다

 결국 대기업 기술직(항해사)으로 취업 했지만, 그 당시 내 속은 정말 까맣게 타버렸었다. 하루에 수십 통씩 전화가 울렸고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가 결국은 원래 가기로 했던, 해운 장기 불황 여파 및 무리한 사세 확장으로 곧 망할지도 모르는 회사에 억지로 끌려갔다. 기업에서 나의 존재는 거의 느껴지지 않았는데, 그저 하나의 부속품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우여곡절 끝에 입사에 성공하면서 나는 대기업이라는 조직이 어떤 곳인지를 경험하게 된다.


 먼저 대기업은 시스템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명분을 중시한다. 경쟁 회사라도 서로 간의 신의를 지키고자 하는 게 기업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거대한 엔진이 돌아가는 데 필요한 톱니바퀴에 불과하다. "나는 좀 더 특별한 사람이야!"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는 조금 더 특별한 톱니바퀴에 불과하다. 


 그리고 회사는 직원을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직원이 함부로 회사를 버리면 큰일 난다. 특히나 신입사원의 경우에는 괘씸죄가 추가된다. "감히 네가?"라는 생각이 수평선처럼 끝없이 깔려 있는 곳이 바로 기업이다. 


 때문에 나 스스로 대우받으며, 직접 기획하고 성과를 내보는 즐거움을 맛보고 싶다면 대기업을 추전 하지는 않는다. 말했다시피 당신은 그저 잘났다고 생각하는 톱니바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사실 조직화된 시스템은 굉장히 중요한데,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는 조직이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수직적인 구조가 가장 빠르고 쉬우며 책임 소재를 따지기에도 용이하기 때문이다. 또한, 한 사람이 빠져도 조직에 큰 해가 되지 않는다. 바꿔 말하면 나 하나쯤 없어도 다행히 조직이 잘 돌아간다. 따라서 휴가 쓰기에 너무 눈치 보지 말자! 생각보다 회사에서 내 존재는 정말 미미하다. 나는 대기업에 입사하기도 전에 이를 알아버렸다. 


 입사 후에는 굉장히 바쁘게 보냈다. 인사팀은 신입 사원 모두를 교육팀으로 넘겼다. 교육팀에서는 잘 짜여진 커리큘럼에 맞게 우리를 교육시켰다. 교육이 끝나면 다시 다시 인사팀으로 넘어간다. 인사팀은 운항팀과 상의하여 선박 승선 타이밍을 계산한 후 중요도 및 성적에 따라서 신입 사원을 각 선박으로 배분한다. 신입 사원은 모르겠지만 굉장히 많은 부서가 잘 짜여진 시스템에 맞게 굴러간다. 그리고는 최종 결정을 직원에게 통보한다.


 이렇게 대기업의 업무는 굉장히 세분화되어 있다. 어떤 직원은 대리점만 관리하고, 어떤 직원은 하루 종일 유가의 오르내림만 보며 선박 기름을 구매한다. 그들은 그냥 하루 종일 그 일만 한다. 순환 근무를 하기도 하지만 회사마다 다르다. 그렇다고 딱히 대단한 전문가가 되는 것도 아니다. 누구나 몇 년 배우고 일 하면 10 년 동안 그 바닥에 있던 사람 비슷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기업 나오면 치킨집 밖에 할 수 없다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은 아니다. 직접 다녀본 사람만 느낄 수 있다. (물론 기술직군과 일반 사무직군 간의 차이는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기술직군은 경험이 쌓일수록 일이 편해지는 편이고 봉급도 괜찮다.)


 하소연이 길었는데, 나는 군대를 면제받는 대신 3년 이상 대형 해운회사에서 현장직 또는 기술직이라고 불리는 항해사로 근무하게 됐다. 동기들은 약 100명 정도였는데, 어쩌다 보니 내가 동기장을 맡아버렸다. 후에... 동기장으로써 회사 임직원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노래 및 춤 등 의 장기자랑(나는 하하와 스컬이 불렀던 부산 바캉스를 불렀다. 젊은 동기나 선배님들은 좋아하셨는데, 맨 앞자리 임원 분들은 굉장히 불편해하셨다...)을 하게 될 줄을 그때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그냥 눈칫밥 먹으며 들어오다 보니 책임감 있는 자리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지원했었다.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집에서 쉬다 보면 전화가 온다. 드디어 내 배가 정해졌다는 얘기다. 


 "첫 출근 장소는 브라질입니다. 6~9개월가량 3등 항해사로 근무하게 될 겁니다."


 당시 새로 건조된 선박이었다. 이 선박을 운항 및 관리하는 임명을 받은 것이다. 크기로는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초대형선이라는 말만 듣고 잘 부탁한다는 인사팀의 부탁에 떠밀려 선박 승선 길에 올랐다.


 가족의 인사를 뒤로하고 대형 캐리어 한 개와 백팩 한 개를 매고 인천 국제공항으로 향했다. 역시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회사답게 모든 게 척척 진행되었다. 대리점에서 나온 분이 모든 수속 절차를 도와주었고, 선박까지 가는 방법 등을 자세하게 자료를 들이밀며 설명했다. 두근거렸다. 설레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만감이 교차했다. 장시간 비행기를 타고 가는 모습을 상상하니 뭔가 성공한 사람이 된 듯 야릇한 뿌듯함도 들었다. 


 사실 설렘은 오래가지 않았는데, 인천 국제공항에서 독일 프랑크프루트 공항으로, 거기에서 8시간 정도 기다리다가 브라질 리우 공항으로, 리우 공항에서 또 국내선 비행기(국내선 비행장에서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한 명뿐이었다. 그분이 밥을 먹으러 갔다고 해서 하염없이 기다렸었다.)를 갈아타고 어딘가로 들어갔다. 끝이 아니었다. 작은 경비행기가 한대 쑥 나오더니 나를 싣고 철광석이 많이 나는 곳으로 데려갔다. 아마존 강 하류 정도 되는 듯했다. 40시간이 넘는 비행에 온몸이 지쳐버렸다. 비행기 안에서는 닭장에 갇힌 닭처럼 기내식을 주면 먹고 한 숨 자고 일어나서 또 기내식을 먹고 자고... 를 반복했다. 고도가 높아서 그런가? 기내식을 먹으면 그저 졸리다.


 한참의 비행 끝에 부두에 닿을 수 있었다. 나는 녹아버린 껌딱지처럼 오프로더 차에 딱 달라붙어 있었는데, 경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지프차를 타고 몇 시간을 내리 달렸기 때문이다. 좁은 땅덩어리의 대한민국이 격하게 그리웠다. 대리점 직원의 안내를 받아 터벅터벅 걷는데 저 멀리서 배가 보였다. 아니, 그것은 배라고 하기에는 너무 컸다. 나름 부산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이런저런 상선들을 봐왔지만 그 이상이었다. 내가 승선하기 며칠 전브라질 방송국에서 직접 방문하여 촬영할 정도였다. 세계에서 가장 큰 선박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또 한참을 걸어가자 길이 360M, 수면 상 높이 30M, 넓이 65M의 축구장 3개 반 정도 크기의 40만톤 급 선박(무게로보면 1톤의 코끼리 40만 마리를 실을 수 있다.)이 한눈에 들어왔다. 피곤함이 싹 가시고 다시 심장이 쿵쾅거렸다. 우리나라 조선 기술이 뛰어나다고 들었지만 어떻게 이렇게 큰 배를 지을 생각을 했는지 대단했다. 선박 앞에 도달하자 유압을 이용한 갱웨이(전동 사다리)가 내려왔다. 그리고는 끝없이 올라갔다. 한참을 오르자 주황색 빛깔의 갑판이 펼쳐졌다. 드디어 약 6~9개월가량 퇴근 없는 회사 생활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그들은 나를 이렇게 불렀다. "3등 항해사님 어서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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