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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우성 Apr 05. 2020

#2. 딱. 정말, 제발 딱! 한 번만...

내가 반에서 5등이라고? 

 묵직하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 중간고사는 치러졌다. 그리고 결과가 발표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딱히 초조해하지 않았다. 성적에 큰 기대는 없었다. 그저 오늘 태권도에서 신나게 얻어터진 겨루기 시합 복기에 온 신경이 뻗쳐있었다. 충격을 받은 콧등이 시큰했다. 생각해보면 운동을 못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겨루기만 하면 얻어터지는 걸 보니 딱히 소질이 있는 것도 아니다. 태권도에서 얻어터지고 돌아오는 날이면 나는 늘 양 손을 허리춤에 얹고 부모님께 선언했다.

 "태권도 그만둘거야!" 

 엄마는 늘 그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그만둬도 된다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허락하지 않았다. 꾸준함이 중요하다는 말을 뒷 통수로 따갑게 받으며 나는 다시 태권도 장으로 내 발로 끌려갔다. 


 중간고사 성적서는 친절하게 2차원의 활자로 뽑혀 나왔다. 선생님은 웃으며 성적서를 나눠주셨고, 나는 그저 받았다. 그리고는 한 줄씩 시선을 이동시켜 뽑혀 나온 괴상한 모양들의 활자들을 먹어치웠다. 국어, 영어, 수학, 사회... 그러다가 한 곳에서 동공의 움직임이 다트판에 막 박혀버린 다트처럼 미세한 떨림을 끝으로 완전히 멈춰버렸다.


 "5등? 내가 반에서 5등이라고?"

 아드레날린이 솟구쳤다. 나는 신사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길 게 뽑힌 성적표를 두어 번 고이 접어 주머니 속에 급히 넣었다. 정신이 들자 친구들의 표정을 살피기 시작했다. 종이에 적힌 아라비아 숫자에 따라 웃는 친구, 울상인 친구 제 각각이었다. 고작 몇 줄의 숫자였지만, 사람들은 숫자에 울고 웃고 한다. 

 아직도 기억에서 생생한데, 나는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휘파람을 불고, 신발주머니를 빙글빙글 돌리며 한껏 신이 나있었다. 단순히 게이밍 의자와 새 컴퓨터에 대한 열망 때문은 아니었다. 알 수 없는 뿌듯함이었다. 토끼처럼 껑충껑충 뛰며 집으로 돌아오던 중 뿌듯한 마음을 듬뿍 담아 다시 성적표를 펼쳤다. 몇 번을 봐도 5등이라는 숫자는 뿌듯했다. 우리 반 30명 중에 5등은 정말 잘한 것이다. 내 위로 4명밖에 없는 거니까!

 "짜식들 열심히 좀 하지!"

 아무도 듣지 못하는 허세의 탄성을 지르던 중 갑자기 눈 앞에 아라비아 숫자들의 조각난 퍼즐이 완성되어 맞춰져 갔다. 내가 잘못 본 것이다. 분명 5등은 맞는데... 뒤 숫자가 330명? 분명 우리 반 학생은 30명인데 왜? 의아했다. 나는 생각했다. 고로 깨달았다. 길 한복판에 멈춰 서서...

 어떻게? 왜? 내가 이런 결과를 마주한건지 한참을 고민했다. 시험지를 마구 흔들어보았다. 마치 흔들면 글자가 바뀌는 마법의 양탄지인 것 마냥. 


 그동안 나는 열심히 한다고 뭐 바뀌겠는가? 그저 잘 되는 사람은 잘 되는 거지!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처음으로 무언가 목표를 잡고 노력을 했고, 그 노력의 대가가 눈 앞에 나무통에서 튀어나온 해적 선장의 큰 머리통처럼 급작스럽게 나와버렸다. 나는 그때 꽤 큰 충격을 받았는데, 한 5분 정도를 길 한복판에 멍하게 서서 연신 성적표만 바라보았다. 사실 내가 더 노력할 수 있는 데 불구하고 하지 않았던, 그렇게 흘려보낸 시간들을 모아 보면 더 높은 성적도 가능할 거라는 희망도 여름밤 활공하는 반딫불이처럼 잡힐듯 말듯 어렴풋이 보였다. 

 부모님은 당연히 기뻐하셨다. 무뚝뚝하던 아버지도 환히 웃으며 잘했다고 연신 등을 두드렸다. 고래도 춤추게 하는 칭찬을 받으면 고래보다 한 없이 작은 사람이 춤을 추는 건 당연한 게다. (물론 나는 춤에 소질은 없다.)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너무 고마웠다. 꾹 참고 견디면 마시멜로를 준다던 사회의 거짓 부렁이 진실이 이제는 진심처럼 느껴졌다. 딱히 높은 사람들의 생활 소식에 관심 없던 내가 노력하면 그 자리에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묘한 울림이 가슴과 머리에서 여름날 매미처럼 웅웅 울렸다.


  시험 이후로 내 삶을 감싸고 있떤 환경 요소가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부모님은 내가 뭐라도 될 것 마냥 교육 예산을 올려 잡았다. 덕분에 끊임없는 문제 풀이의 감옥에 갇혀버렸다. 학교에서도 난리였다. 딱히 공부에 관심 없어 보이던 친구가 전교 5등을 해버렸으니 대우가 달라졌다. 친구들은 모르는 문제가 있으면 가져와 물었다. 나는 귀찮았지만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일일이 답해줬다. 답하면서 내 머릿속에서는 정리가 일어났고 나는 한 층 더 배워갔다. 가르치면서 배운다는 게 뭔지 알 수 있었다. 그전에는 나에게 물어보는 친구는 없었다. 게임 공략법을 제외하는고는! 


 게임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나는 중학교 내내 게임 광이었다. 내가 게임만 끊었어도 지금쯤 180cm를 훌쩍 넘었을 게다... 왜냐하면 게임은 성장 호르몬이 뿜어져 나오는 새벽까지 이어졌기 때문이다. 학원이 끝나고 집에 오면 늘 편안한 의자에 기대어 속도감 좋은 컴퓨터로 게임을 즐기는 게 인생의 낙이었다. 덕분의 몇몇 게임에서는 현질 투자 없이 길드(게임속 단체) 마스터가 되었고, 주말마다 게임을 만든 운영자들과 게임 속에서 캐릭터라는 아바타로 만나 게임의 방향성에 대해 심도 있게 고민도 했다. 그때 나는 내 미래보다 게임 내 유저 확보 방안과 신규 아이템 출시에 열을 올렸다. 연합장 중에 중학생은 나뿐이었다.


 다시 시험 직후 생활을 얘기해보자면, 선생님들의 대우도 달라졌다. 그 전에는 내가 여러 번 얘기해야 들어주던 것들이 한 번만 말씀드려도 착착 처리 되었다.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셨다. 물론 좋은 점만 있는 건 아니다. 

 한 번은 점심시간이 끝났지만 축구 대결의 승패가 나지 않자, 모두가 5교시 수업을 째기로 다짐하고 축구에 열을 올렸다.  결국 우리 팀이 졌고 쓸쓸한 마음으로 수업 중간에 쭈뼛쭈뼛 교실문을 열었다. 그 당시 아이들은 내가 반장이고 공부를 잘한다는 이유로 제일 먼저 들어가서 싹싹 빌라고 했고, 나는 선생님의 잔소리를 면전 앞에서 들어야 했다. 시험을 잘 봐서 생기는 나쁜 사례는 더 있었다. 수업 중에 불쑥불쑥 발표를 시키고 생각을 정리해서 한번 얘기해 보라고 하고, 친구들은 내가 노트를 정리할 때까지 기다리다가 서로 내 노트를 빌려갔다. 노트를 잃어버린 경우도 허다했다. 

 집에서는 점점 사교육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끝 모르는 기대심으로 내 게임 시간은 절반으로 줄어버렸다... 그때마다 나는 소설 '죽은시인의 사회'에서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현재의 꿈과 희망을 포기하는 학생들의 안타까운 상황을 바라보던 존 키팅 선생이 학생들에게 외쳤던 카르페디엠(Carpe Diem) 즉, 현재를 즐겨라! 를 무성으로 외쳐보았지만, 소용없는 외침이었다. 나는 갑작스런 외침(外侵)에 어리둥절한 군인처럼 정신없었고, 세상은 이런 나를 억지로 끌고 경쟁의 구덩이 속으로 던져버렸다.


 단 한 번의 시험으로 내 주변이 바뀌기 시작했고, 그 변화들이 모여서 나도 모르게 나의 인생 나침반을 설계하고 있었다. 나는 그 변화들에 적응하고자 했다. 아니 가만히 있어도 톱니바퀴처럼 주위가 맞물려 굴러갔다.


  많은 자기 계발서에는 노력해서 이룬 성공이 자신감을 주고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고 한다. 나는 거기에 살을 하나 덧붙이고 싶은데, '딱 한 번만 성공해보라!'라고 얘기하고 싶다. 특히 빠르면 금상첨화다. 각자의 인생에서 가장 빠른 순간은 어쩌면 '바로 지금'일 테다. 

 한 번의 성공 가지고 인생이 왜 바뀌겠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나도 첫 중간고사 전 까지는 그랬다. 그 후 나는 전교 1등까지도 해버렸는데, 첫 단추의 중요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걸 지금까지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단순히 전교 1등을 한다고 인생이 바뀌지는 않지만 그로 인해 주변 환경은 모조리 바뀐다. 눈 앞에서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수많은 싱싱한 기회들을 물어다 준다. 가만히 앉아 있는 와중에도 주변 환경은 내게 관심을 갖고 내 삶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모든 게 한 번의 노력과 성공으로 얻어진 것이다. 


 변화는 스노우 볼(Snow ball)이 되어 계속 굴러갔다. 학교에서는 나를 과학 영재로 발탁하여 전국에서 과학 영재들이 모여 로봇을 만들어보는 약 2 주일 간의 프로젝트에 보냈다. 과학은 그저 집에서 읽은 과학 만화책과 학교에서 달달 외운 중학교 교과목이 다인데 말이다. 세상은 어미새처럼 자꾸만 내게 부담스러운 기회를 물어다줬다. 덕분에 과학고 특채? 비슷한 것으로 남들보다는 조금 쉽게 들어갈 수 있는 자격도 주어졌었다. (집안 사정상 과학고로 진학할 순 없었다.)


 로봇 과학 영재 프로젝트는 정말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안경잡이에 한 분에 봐도 공부 좀 할 것 같은 아이들이 모여있었다.(나도 안경잡이 중 한 명이었으니, 다른 아이들도 나를 공부벌레로 봤을 수도 있겠다. 그야말로 벌레 천국이었다.) 우리는 코딩을 배우고 프로그램을 짜서 직접 만든 로봇을 움직여 보고 센서가 작동되게 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로봇은 바퀴가 달려있어서 움직여야 하고 벽에 다가가면, 센서가 장애물을 인식해서 벽이 아닌 곳으로 움직여야 했다. 미로를 모두 빠져나오면 만점을 받았다. 만점을 받는 학생에게는 추후 대학입시에 엄청난 혜택이 있을 거라는 얘기는 들었다. 나는 로봇을 건담 프라모델 수준으로 기가 막히게 만들었다. (정말 그럴싸했다.) 하지만 마지막 시험 날 내가 만든 로봇은 진열장 속 프라모델처럼 꼼짝 하지 않았다.  미세한 떨림도 없이 철저하게 죽어있었다. 뻔한 결말이었다. 그 동안의 코딩 수업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몰라도 가만히 있었다. 질문도 어느정도 알아야 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이야 학교에서 코딩을 가르치지만, 이때만해도 코딩은 대학교 컴퓨터 전공자 이상이 누릴 수 있는 전유물 이었다.


 결국 나는 붉어진 얼굴로 로봇을 이곳저곳 매만지다가 시험장을 빠져나왔다. 그 당시 천재가 아닌 지극히 평범한 내게 주어진 너무나도 큰 도전이었고 좌절이었다. 하지만 세상에 이렇게 똑똑하고 다양한 친구들이 많다는 걸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이렇게 한 번의 성공은 의도치 않은? 기회들을 자꾸만 물어다 준다. 그리고 그 기회들로 나는 새로운 도전을 접하게 되고, 그 도전의 경험치가 쌓여 나를 성장시킨다. 그래서 나는 10등을 10번 하는것 보다(물론 10등도 대단하다.) 한번 1등(1등을 찍고 100등 아래로 내려가더라도)을 해보는 게 더 큰 자극과 환경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만약 인생의 방향침이 덜덜덜 떨리고 불안하다면 딱 몇 일 / 몇 주 / 몇 달만 미친듯이 노력해보자. 기회라고 불리는 눈이 오는데 눈 뭉치를 만드는 수고로움을 감수할 수 없다면 스노우 볼은 평생 굴려보지도 못할 것이다. 장갑안의 손이 따뜻하다고 웃어넘길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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