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라는 넓은 바다에 뛰어들기 전, 가슴에 물을 적시다
인문계 고등학교에서의 삶은 다람쥐 쳇바퀴 같은 반복의 연속이었다. 특별한 추억은 없다. 만약 인생의 이동량 곡선을 만든다면 노인이 되기 전 가장 이동량이 단순하고 적은 때가 고등학교 시절일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대한민국 학생들의 삶의 변곡점이 되기도 한다. 오로지 명문대 진학만이 성공을 보장하는 것처럼 학교, 집, 언론 등 모든 곳에서 하나로 합심하여 이 시절의 중요함을 목놓아 강조한다.
아침에 눈 비비며 일어나 등교전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한다. 그럴 때면 늘 신선한 과일이 책상에 올려져 있었는데, 공부시켜보겠다는 엄마의 정성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 고마움에 펜을 놓을 수 없었다.
학교에 가는 길에는 늘 영어를 들었다. 학교는 집에서 불과 10분여 거리였지만, 10분은 집중도를 끌어올리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1교시 시작 전에는 자습을 한다. 1교시가 끝나면 늘 그렇듯 낙오자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그들은 꾸벅꾸벅 머리통을 위아래로 흔들며 침을 질질 흘리기도 하고, 아예 대놓고 책상에 이마를 박고 깊은 피로감을 풀어버리기도 한다.
사실 모두에게 전략이란 게 있기 때문에 감히 그들을 욕할 수 없다. 밤새 학원에서 공부한 친구, 전략상 영어를 포기한 학생 등 우리 모두는 수능이라는 한 가지 목표를 향해 각자의 방식으로 뛰는 마라토너다.
수능이라는 마라톤에서 점심시간은 1학년과 3학년의 모습이 확연히 달라지는 구간이다. 1학년은 옹기종기 모여 앉아 식사를 즐긴다. 아직 여유가 보인다. 하지만 3학년은 다르다. 분명 다 같이 모여 앉지만, 이어폰을 꽂고 영어 듣기를 하는 친구, 손바닥에 쏙 잡히는 영어 단어장을 눈으로 읊는 친구 등 각자의 방식대로 점심시간을 활용한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모 학교에서는 배식을 거부하고 도시락을 싸와서 간이 믹서기로 모조리 갈아서 마셔버리는 학생도 있다고 했다. 그 학생은 서울대에 진학했다고 들었는데, 나는 차마 그 정도까지는 자신없었고 조용히 영어를 듣는 정도로 위안삼았다.
수업이 모두 끝나면 야간 자율 학습이 시작된다. 처음 고등학교에 올라와 놀란 점이 바로 이 야간 자율 학습이다. 야자가 이뤄지는 별관 건물은 한 눈에 봐도 정말 멋들어진 건축물이었다. 시설도 웬만한 개인 독서실 저리 가라 할정도로 훌륭했다. 주로 3학년 학생들이 이용하는데, 야자실은우리가 앞으로 사회에 나가서 부딪히게 될 사회라는 녀석의 민낯을 똑똑히 볼 수 있는 공간이었다.
먼저 야자실에 들어가면 총 70개의 칸막이 및 수납장이 갖춰진 좌석이 있다. 공기 청정 기능이 있는 에어컨이 2개, 정수기 2개가 비치되어 있다. 그런데 야자실 맨 끝에 문이 하나 있다. 나무 재질 느낌의 따뜻한 브라운 계열의 문으로 한눈에 봐도 저 문으로 들어가면 신비한 무언가가 튀어 나올 것 같은 위엄이 느껴지는, 마치 '해리포터 비밀의 방' 으로 통할 것 같은 신비로운 문이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빛이 쏟아졌는데 빛에 눈이 적응될 즈음 30개의 자리가 얼굴을 내밀었다. 비밀의 문 안쪽에는 바깥 야자실과 똑같이 에어컨이 2개, 정수기가 2개가 비치되어 있다. 30명의 쾌적한 공부 환경 조성을 위해 꽤나 공을 들인 야자실 안의 야자실인 것이다. 야식을 줄 때도 차별은 느껴졌다. 30명의 학생만 따로 불러서 먼저 야식(파리바게트 빵이나 우유 등)을 받게 했다. 그들의 기다리는 시간을 뺏지 않기 위한 학교의 소소한 배려가 묻어났다. 특히 제일 어이없던 것은 피자 빵 등 학생들이 좋아하는 빵 종류가 먼저 배급 받는 30명에게 돌아간다는 점이다.
하지만 아무도 태클 걸지 못했다. 우리는 차가운 물에 들어가기 전에 가슴팍에 물을 뿌리듯, 사회의 잔혹성과 앞으로 닥칠 미래에 상처 받을 마음에 대한 대비를 하고 있던 중일지도 모르겠다.
30명의 학생이라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매 모의고사를 통해 순위는 업치락 뒤치락 바뀌었다. 30개의 자리는 전교 1등부터 30등까지의 등수를 말한다. 전교 1등의 자리는 조용한 구석 자리였는데 내 기억에는 한번도 바뀌지 않았다. 그 친구는 의대로 진학했다. 나는 28번째 자리에 배정받았는데, 늘 언제 바깥 야자실로 튕겨져 나갈 수 있다는 불안감을 갖고 공부에 매진했다. 다행히 졸업할 때 까지 튕겨져 나가지는 않았지만 25~30번째 자리를 맴돌면서 이 무리를 벗어나는 순간 인생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기분으로 절실하게 야자의 삶을 이어갔다.
한번은 크리스마스 때 야자실에서 공부를 했는데 그때 100명 중 단 5명만 야자실에 나와서 공부했고, 나는 그때부터 야자오적이라는 별명을 받았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게 나는 조금 뒤쳐졌지만 묵직하게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막 알에서 깬 새끼 거북이같이 공부했다. 이러저리 사정없이 고개를 돌려대면서 방향을 수정하고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엄마 거북이의 양수속에서 어렴풋이 들었던 파도 소리를 따라 바다로 기어갔다.
학교의 차별은 늘 성적순으로 진행되었다. 나는 이것이 학교의 전략이라고 생각했고, 우리들은 장군의 전략에 잘 따르는 순종적인 병사였다. 곧 닥쳐올 큰 대전에 앞서 학교와 사회의 메시지를 믿고 하루하루 솓아오르는 혈기를 억눌렀다.
학교의 야자실 차별의 효과? 때문인지 몰라도 비밀의 문 안쪽 30명 대부분은 서울대 및 스카이 대학교 포함 소위 명문대에 진학했다. 아직 우리들의 인생은 진행 중이지만 야자실 안쪽 문 학생들 대부분은 대기업, 공무원, 박사 준비 등 생각보다 일반적이고 평범한 삶을 이어나가고 있다.
3년 간의 마라톤 중 나는 딱 한번 튕겨져 나가 버렸는데, 바로 컴퓨터 게임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내 성적이 수직 하강 하기 시작했다. 중학교 3학년부터 본격적으로 즐기던 게임 때문이다. 아들 공부를 위해 쾌적한 게임 환경 조성을 약속한 부모님의 패착이기도 했다. 나는 늘 새벽까지 게임을 즐겼는데, 한 참 게임을 즐기다 부모님이 뒤척이며 거실로 나와 화장실에 갈 때면 재 빠르게 컴퓨터 모니터를 끄고 이부자리에 누웠다. 그럴 때면 부모님은 조용히 방문을 열고 들어와 컴퓨터 뒷면을 만져보셨다. 그리고는 야밤의 꾸짖임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게임을 끊을 수 없었다. 게임을 즐기고 난 후 아침이면 정신이 몽롱했다. 하지만 풍선에 바람을 집어넣으면 가장 취약한 곳이 터져 나오듯, 그 당시 나는 중학교 때부터 지속되는 장기 마라톤에 지쳐있었고 게임은 나의 취약한 부분이자 내 전부였다. 게임 속에서는 늘 나를 마스터라고 부르며 따르는 무리가 있었고, 나는 계속 아이템을 맞춰나가며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나는 롤러코스터에 탑승하고 있었고, 오르막의 끝에는 더 큰 내리막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게임에 열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 인생 전반에서 내린 판단 중 가장 잘 한 판단 중 한 가지로 기억된다. (다른 하나는 어릴적 샘솟던 호기심을 억누르고 담배를 피지 않은 점이다.) 나는 떨어지는 성적과 출구 없는 방황 속에 큰 선택에 직면하게 된다. 바로 게임의 중단이다. 내가 어떤 계기로 게임을 중단하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제는 멈춰야 한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머릿속에 똬리를 틀기 시작했다. 진지한 통제력으로 결단을 내릴 필요가 있었다.
그날은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화창한 주말 오후였다. 브레이크 레버에 조심스럽게 손을 가져갔다. 클릭 한 번에 몇 년간 쌓은 모든 성이 무너지는, 하지만 꼭 해야만 하는 가슴 시린 날로 기억된다. 손이 허공을 가르며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