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서비스의 미래]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 근엄한 표정으로 관공서에 들어왔다. 내부를 쭉 둘러보니 뉴스에서 본 것처럼 응대하는 공무원은 아무도 없었다. 마지막에 방문했던 것이 5년 전인데, 그때 사람들로 북적이던 모습은 사라져 있었다. 시선을 돌리니 어렵지 않게 행정처리 매뉴얼을 찾아볼 수 있었다. 그래서 AI 안내 창구로 가서 시작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아무리 매뉴얼대로 처리 방법을 물어봐도 AI 안내 음성은 노인이 원하는 서비스를 불러오지 못하고 있었다.
"흠..."
짧게 신음을 토해낸 뒤 주변을 둘러봤다. 노인 한 명이 능숙하게 행정서비스를 처리하고 있었다. 자신 보다 10년은 더 산 것 같은 노인이 문제없이 일을 처리하고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무엇인가 자존심이 상하는 걸 느꼈다.
집에서는 스마트폰으로 대부분의 행정 업무 처리를 했다. 젊은 시절 회사에서 IT 화면 설계서도 작성해 본 그였다. 그런데 특별한 케이스라 관공서를 반드시 방문해야 한다는 설명을 듣고 관공서로 나온 터였다. 그러나 계속 실패하자 신경질적으로 화면을 두드리고는 관공서를 나왔다.
그날, 노인은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그러다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다시 관공서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이거 만큼은 어떻게든 해결해야겠어."
[성과우수자]
한 사내가 문이 닫힌 카페 앞에 가만히 서서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다.
"아... 어디로 가지?"
출근 시간에 직장 앞에 문이 열린 카페는 많았지만 고민이 깊어졌다. 딱히 그 카페의 커피가 맛있는 것도 아니고 사무실에서 가까운 것도 아니었지만 우연히 그 카페를 들른 이후로 매일을 빠뜨리지 않고 가고 있었다.
"오늘은 탕비실에서 커피 내리는 것도 괜찮겠다."
사무실에 들어와 곧장 커피를 내리고는 자리에 앉아 평소 루틴대로 회사 게시판부터 열었다. 가장 상단의 게시글 제목을 보고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2040년도 성과우수자 선정 결과 게시"
클릭해서 들어가니 역시나 후배 B가 이름을 올렸다.
그러자 애써 잊고 있던 1년 전 기억이 떠올랐다. 그는 1년 전 AI 행정서비스 대응 부서로 발령을 받았다. 평소에 AI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오랜만에 부푼 가슴을 안고 부서 이동했다.
그가 맡은 업무는 AI에 학습시킬 행정 서비스 사례를 모으는 일이었다. 이를 양식에 맞게 표준화해서 IT 부서에 제공하면 IT 부서는 이를 직접 AI에 학습시켰다.
그러던 어느 날 AI 기능을 대폭 상향시킬 기가 막힌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래서 이를 기획했으나 실행 안에서 망설이다가 그만두었다. AI에 관심은 많았지만 IT 관련 지식이 없어 그 부서랑 소통하는 게 두려웠고, 생각해 보니 IT 부서 말고도 너무 많은 부서와 담당자를 설득해야 했다.
"그래, 이거 될 거라는 확신도 없는 거잖아? 너무 힘 빼지 말자. 나중에 부서 업무에 조금 더 익숙해지면 그때 추진해도 늦지 않을 거야."
그러나 3달 뒤 같은 팀 후배가 비슷한 취지의 아이디어를 직접 실행했다. 다른 팀 담당자들은 생각보다 협조적이었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닌 것 같았다. 그렇게 후배 B는 압도적 성과를 만들어냈고, 이번에 연말 표창을 받게 되었다.
후배 B를 볼 때마다 수치심, 시기심 등의 감정이 떠올랐고, 온갖 과거의 수치스러운 기억까지 떠올랐다.
"그래, 생각해 보니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아이디어였는데, 내가 먼저 할걸."
[실행력]
초점 없는 눈으로 과거의 감정을 떠올리던 A는 문득 모니터 시계를 봤다. 9시 32분이 된 것을 본 A는 자신도 모르게 화들짝 놀랐다.
"아이고 늦었네."
아직 공유 기한도 이틀이나 남았지만 어제 자신이 계획했던 시간에 업무를 시작하지 못해 살짝 신경질이 났다.
그때 과장 C가 A를 불렀다.
"A 계장님. 잠깐 회의실에서 보시죠."
가벼운 불안감과 예민함이 올라오는데 과장이 웃으며 말했다.
"계장님, 아시겠지만 이번에 장관님 새로 오시면 업무 보고 들어갈 거니까 계장님 쪽 업무 현황 좀 정리해 주세요. 이 주무관 붙여줄게요."
A 계장은 직장 상사에게 오해의 여지를 만들지 않기 위해 답할 때는 살며시 입꼬리를 올리는 버릇이 있었다.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상황 보시면 알겠지만 AI 응대 관련한 민원 건수가 너무 많잖아요. 이건 100% 새로 취임하는 장관님이 짚고 넘어가실 겁니다. 해결책까지 나와야 해요. 사실은 해결책 나온 거로 안심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실행까지 이어져 있어야 합니다. 최소한 시작 정도는 해 놔야 해요. 한 달 정도 후에 보고 있을 거 같으니까 당장 다음 주 정도까지는 뭐라도 시작해야 합니다."
"하지만 일주일 내로 무언가를 시작한다는 게... 가능할까요? 기획도 제대로 하려면 최소 한 달은 필요할 것 같습니다."
A는 최대한 과장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애썼다. 딱 봐도 장관 보고 준비로 민감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니 기획을 체계적으로 할 시간은 없습니다. 체계적인 기획은 나중에 개별 실행 안 들을 묶어서 포장하면 되는 겁니다. 어차피 장관님이 세부 기획안을 보실 시간은 없을 거예요. 일단은 개선할 수 있는 단순하고 확실한 걸로 실행해 주십시오. 다음 주 수요일까지는 방안이 나와야 해요."
회의가 끝난 후 A는 휴게실로 향했다. 휴게실로 향하는 길에 먼발치에서 후배 B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자 다시 자신의 부족한 실행력이 떠올랐고, 과장이 지시한 빠른 실행 지시가 떠올랐다.
"실행력."
이 단어로 생각이 수렴되었다.
"어후... 스트레스받네 이거."
A는 홀린 듯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아무도 없는 곳을 찾아 들어간 곳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생각해 보니 현장에 가본 적이 한 번도 없네?"
[3,000 원]
노인은 관공서에 들어서자마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비상구 문을 열고 들어오는 한 남성이 공무원증으로 보이는 것을 목에 걸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별히 AI 응대 기계 앞으로 향하지도 않은 채 주변을 둘러보는 것이 드디어 찾아 헤매던 공무원을 만난 듯했다.
"저기요. 혹시 여기 공무원 맞습니까?"
공무원은 화들짝 놀라며 답했다.
"아 네... 저 맞습니다. 따로 기계를 다루지는 않습니다만 여기 관공서 공무원은 맞습니다."
A는 경계하는 듯한 표정으로 노인에게 말했다.
그러자 노인이 스마트폰을 보여주며 말했다.
"거 참 다행이네. 이거 좀 보시오. 공문이 하나 날아왔는데 무슨 처리 안 된 돈을 3천 원 결제하라는데 뭔지 알 수가 있어야지. AI 기계도 모른다고만 하고 말이야."
A는 노인의 스마트폰을 받아 들고 공문을 읽어봤다. 사실 세금 납부 관련해서는 전혀 모르는 영역이라 글을 읽는 척은 했지만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빨리 현장을 벗어나고 싶어 벗어날 방법만 고민했다.
그러다 좋은 방법이 생각났다.
"어르신, 오류 메시지랑 문서 번호 좀 제가 찍어갈게요. 그리고 연락처도 같이 주시면 제가 확인해 보고 해결되면 연락드릴게요."
노인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말없이 자신의 스마트폰을 보여줬다.
A는 연락처까지 받아 들고는 빠르게 인사한 뒤 급히 비상구로 도망쳤다. 비상구 문은 공무원증으로만 열리기 때문에 민간인들은 들어올 수 없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자리로 돌아갔다. 시계를 보니 12시에 가까웠다. 점심을 먹고 자리에 돌아왔는데 머리가 멍했다.
"뭐부터 해야 하지?"
우선 자신이 갖고 있는 AI 학습 사례 매뉴얼부터 보기 시작했다.
[직장인의 본질]
매뉴얼을 본 지 4시간이 지났다. 퇴근 시간은 가까워졌고 아무 답도 나오지 않았다. 이미 예상은 했던 터였다.
그러나 한 가지 결론은 낼 수 있었다.
"이거 내가 혼자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IT 부서에 물어봐야 하나? 그러나 전화기를 쳐다볼 뿐 차마 손이 가지는 않았다. 벌써부터 그들의 답변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이해 안 가는 IT 용어와 개념을 늘어놓으면서 딱히 친절하지도 않았다.
사실 AI 학습 사례 데이터를 정해진 양식에 맞추어 작성하면 항상 그들에게 자료를 보냈다. 그러나 그것은 부서 간에 협의된 업무 체계였다. 그것에 벗어나는 문의는 서로의 업무 방식에 혼란을 줄 수 있었다.
"그래 어떻게 IT 부서에서 세금 체계를 알겠어..."
매우 짧은 순간 IT 부서에 메일로 문의했다가 크게 망신당했던 기억도 떠올랐다. 그렇게 기억에 때려 맞은 후 다시 매뉴얼 화면으로 돌아왔다.
시간은 지나 어느새 밤 9시가 다 되어갔다. 오랜만의 야근에 머리는 멍했고, 더 이상 볼 매뉴얼도 없었다.
'그래 조금만 더 본질을 생각해 보자. 나에게 진짜 중요한 게 뭐지? 나는 직장인이니까 내가 맡은 업무 제일 잘하고 인정받으면 다 아니야? 괜히 IT 부서에 연락해서 일 크게 키우지 말자. 어차피 IT 부서랑 주고받는 양식에 반영하면 어떻게든 개선이 되겠지. 이거로 개선이 안 되면 이 시스템 만든 내 상사들이 문제인 거 아니야? 내가 할 일은 내일부터 간략하게라도 실행 안 보고서를 쓰는 것인데, 이 상태라면 다음 날 보고서도 제대로 못 쓸 거 아니야?'
A의 눈동자에 갑자기 생기가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까 노인한테는 해결되면 연락하겠다고 한 거잖아? 무조건 연락하겠다고 말한 것도 아니네?"
A는 무의식적으로 발을 떨기 시작하면서 빈 사무실에 탁탁탁 일정한 리듬의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발을 떨던 소리가 멈추더니 적막이 찾아왔다. 어느새 사무실의 불은 꺼지고, 소리도 빛도 모두 사라진 채 어둠만이 사무실을 덮었다.
[평범한 일상]
다음 날 A는 매일 가던 카페에서 커피를 사들고 사무실 자리에 앉았다. 컴퓨터를 켜고 업무 폴더를 열었더니 어제 살펴보던 매뉴얼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의 손가락은 결심한 듯 재빠르게 해당 폴더를 지나쳐 '보고서' 폴더로 넘어왔다.
실행 안에 대한 간이 보고서를 작성하고 과장에게 보고했다.
"오케이 빠르게 진행합시다. 그리고 장관님 보고용에는 업무 개선 효과 빨리 측정해서 반영하세요."
점심시간이 되어 밥을 먹으러 가는데 그 노인의 연락처를 적은 종이가 바지 주머니에서 만져졌다.
며칠 후, A는 'AI 학습용 사례 데이터' 폴더를 열었다. IT 팀에 보낼 학습 데이터 양식에 노인의 오류 케이스를 반영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이 케이스는 괜찮은 성과를 보였다. AI 응대율 관련 지표들이 소폭이지만 확실한 개선을 보였다.
팀장도 만족했는지 적절한 칭찬과 함께 농담을 던지며 퇴근했다.
A도 일찍 퇴근해서 익숙한 발걸음으로 E 지하철 역을 향했다.
E 지하철 역 근처 00 술집. 노인들이 모여 지나간 세월을 떠올리며 왁자지껄 떠들어대며 웃고 있다.
"하여튼 친구는 똑똑한 놈을 둬야 혀! 아니 공무원들도 해결 못 한 일을 이놈이 쉽게 해결했다니까?"
그러자 노인의 친구가 거들었다.
"야 그거 뭐 노인 학교 나오면 다 알려준다니까~ 나이가 들었어도 배울 때는 확실히 배워야 해!"
"하여간 옛날에도 자존심 때문에 나랑 싸웠던 거 생각하면 아직도 혈압이 오른다 야."
그러자 네댓 명의 노인들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공무원 A는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에 올랐다. 조금 지나자 어두운 터널이 나타났고, 습관적으로 창문에 비친 자신의 흐릿한 얼굴을 바라봤다. 특별히 웃고 있지도, 슬퍼 보이지도 않았다.
집에 들어오는 길에 맥주 한 캔을 샀다. 여느 때와 같이 저녁을 먹고 가족들과 TV를 봤다. 시간이 지나 평소대로 아이들을 재우고 맥주를 땄다. 탄산 빠지는 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한 모금 마시고 멍하니 TV를 바라봤다. 다음 한 모금을 먹고 싶지가 않았다.
A는 맥주를 모두 버리고 조용히 TV와 거실 불을 껐다. 방에 들어가 눈을 감으니 가늘게 이어지던 세상의 모든 소리와 불빛마저 끊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