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의 내면에 있을 악마를 보았다

by JK Kang

나에게 끝은 아쉬운 순간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있는것도 아니었다. 그 사이의 짧지만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순간이 좋았다. 굳이 비유하자면 어떤 가수가 표현했던 신호등의 '붉은색 푸른색 그 사이 3초 그 짧은 시간'의 노란불 같은 순간이 좋았다. 그 노란불에 숨어있는게 좋았다.

첫 직장에서 첫 번째 팀에 배치받아 처음으로 회사의 팀장님과 선배라는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 선후배 관계는 군대 같은 경직된 문화였는데, 끈끈함도 있었다. 그러다 1년이 지났을 때 첫 팀장님이 타 지역 팀장으로 발령받았다. 신기하게도 한곳에 모여있던 팀원들은 모두 울었다. 이것이 내가 처음 느낀 인사이동의 감정이었다.

다시 1년 후 나도 다른 지역의 팀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신기하게도 내가 떠나가니 전혀 슬픈감정이 들지 않았다. 이때는 왜 슬프지 않지? 하는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첫 이동을 포함하여 총 7년간 다섯 번 정도 부서 이동을 했다. 그러다보니 부서이동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되었다. 나에게 무엇이 남고 내가 무엇을 남기는지 알게 된것이 아니라 정확히는 '내가 무엇을 비울수 있는지' 알게 된 것이다.

삶은 고상한 이상을 지향해 가면서 현실의 비참함을 감내해 나가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직장생활이 그렇다. 처음 부서이동을해서 들어오면 잘해내겠다는 다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실무라는 것은, 그리고 일을 해나간다는 것은 현실의 온갖 더러운 것들을 묻히면서 나아가는 것이다. 해결하지 못한 난제, 알면서도 묻어버리고 있는 것들, 주변 사람과의 관계 이 모든 괴로운 것들이 나와 함께 한다. 그래서 직장인의 만성적인 피로감은 단순히 육체의 노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신적인 무게감에 짓눌리고 그 무게감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어느날 뜻하지 않게 부서이동을 하게 되었다. 떠나가면서 업무 인계하는 날의 내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도 명료했다. 연차가 차고 부서이동의 경험이 몇번 생기니 이제는 알게 되었다. 나는 저 무게감을 벗어던지고 나의 모순, 허물, 비겁함을 과거에 묻어버리는게 좋았다.

도리언그레이의 초상화처럼 나의 추악함을 내 초상화와 등가교환했다면 꾀나 추한 그림이 그려져 있을 것이다. 사실 그 추악한 초상화는 내 마음 깊숙한 지하 골방에 은밀하게 걸려있다.

업무 인수의 순간에 나는 업무를 인계해주는 상대방이 악마같은 해방감을 즐기고 있음을 느낀다. 무표정하지만 분명히 아쉬움보다는 후련함이 더 크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어느 때보다 힘있는 말투와 가끔씩 드러나는 악마 같은 웃음은 내가 업무 인계 할 때 보였던 그대로였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나는 첫 이직에 성공했다. 직장을 옮긴다는 것은 부서 이동과는 다를 것이라 생각했다. 그동안 정들었던 회사와의 이별이니 슬프거나 잘못하면 눈물도 날 줄 알았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정확히는 회사에 정이 들었던 것이 아니라 회사에 함께 했던 몇몇 사람들과 정이 들었던 것이었다. 내가 좀 더 잔인하다고 느낀 것은 애정을 갖고 있던 사람들에 대해 우월감을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저 사람들이 감내하고 있을 그 무게감과 현실의 추악함을 악마의 웃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나의 모습에 스스로 실망하기도 했다. 나는 나름 세상의 모든 사람이 동등하다고 믿고 있었고, 그것이 사회의 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나에 관한 것, 나의 절박함에 관한 것과 마주하니 그런 관념은 전혀 나의 생각을 끌고가지 못했다.

그런데 딱히 나의 악마같은 모습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남의 불행을 보고 은근히 기분이 좋아진다는 심리학 용어인 '샤덴프로이데'가 떠올랐다. 이런 감정이 심리학 용어로 있다는 건 모두의 마음 속에 샤덴프로이데가 있음을 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그것이 인간이고 그것이 나다. 딱히 악마같은 나를 변호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새로 옮긴 직장은 정말 좋았다. 연봉도 훨씬 많이 올랐고, 워라벨도 좋았고, 사람들도 좋았다. 파고 들어서 열심히 하면 짧은 시간에도 많은 능력을 획득할 수 있는 시스템도 있었다.

그런데 2년이 지난 지금, 나는 또 내가 현실의 영역에서 나를 더럽혔던 나 자신의 더러운 면을 씻어내고 싶어졌다. 그렇게 또 내 마음속의 추악한 초상화를 더욱 추하게 만들어 갈 준비를 하고 있다.

지난 10여년 간의 직장생활 동안 나는 떠나는 방법을 배웠다. 오히려 떠나면서 더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그런데 왜 나는 떠나지 않고 버티는 사람들을 더 동경하는 것인가? 나는 떠나지 않고도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인지 아직도 확신이 들지 않는다. 동경하는 삶일지라그것이 고통스럽다면 더이상 참아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왔다.

이 생각들의 끝에는 한가지 문장이 남는다.

떠나고 싶다, 떠나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