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의 통찰력이 나를 파고들었다.
생각보다 삶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순간은 많지 않다.
예상되는 문제가 발생한거라면 두려움보다는 걱정이 더 맞는 표현일지도 모른다.
내가 느낀 두려움은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찾아왔다.
친절하고 일 잘하는 그 선임은
매일 똑똑한 말로 상냥함을 표현했다.
그 말은 내 겉을 자연스럽게 감싸 안았다.
그런데 어느 날 짧고 날카롭게 던진 타인에 대한 평가 한마디가
별거 아닌 듯 매우 통찰력 있었다.
그 통찰력에 대한 감탄은 찰나의 순간이었다.
나는 정말 오랜만에 두려움을 느꼈다.
이러한 날카로움이라면
내 허물도 다 간파하고 있겠구나
모르겠다는 나의 냉정한 말도
귀찮아서 못 들은 척했던 행동들도
조심스럽게 티 내지 않게 눈치 보던 내 눈동자도
모두 읽고 있었겠구나
어쩌면 다른 사람 앞에서는
나에 대해서 짧고 통찰력 있는 평가를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두려움은 내 머릿속을 깊숙하게 파고들어
순식간에 내 무의식 속 기억과 감정까지 일깨웠다.
그러자 이제는 아무 연관도 없는 기억까지 소환됐다.
20년 전의 수치스러움
자존심 상하던 상대의 한마디
평생 갈 것 같던 두려움
다 극복했다고 믿었던 기억과 감정들은
다시 한 번 나를 지배했다.
매우 긴 악몽을 꾼 것과 비슷한 감정이었지만
고작 몇 분 남짓 지나 있었다.
악몽을 꾼 후의 공포는 1분이면 지나가듯이
업무 관련 전화벨 소리에 나는 이성을 되찾았다.
매트릭스의 네오가 전화를 받고 현실로 돌아오듯이
나는 다시 현실 세계의 감각으로 휩쓸려 갔다.
다음날, 또 다른 평범한 일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확연히 달라진 게 하나 있었다.
선임의 눈을 바라보는 것이 쉽지 않았다.
마음이 읽힐까 봐, 어쩌면 이미 읽혀버린 마음이
부끄럽고 수치스러워서
나는 내 잘못된 행동을 바꾸는 게 아니라
두려움을 피해 도망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