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 근데 내가 살아야겠어
팀장이 볼펜을 던졌다.
볼펜은 책상에 튕겨서 바닥으로 떨어지더니,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어두컴컴한 구석으로 굴러갔다.
이제 저 볼펜은 영원히 밖으로 나오지 못할 것이며, 발견된다 하더라도 제 기능을 하지 못한 채 버려질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볼펜의 운명은 정해졌다.
볼펜의 마지막을 바라보며, 주변이 순식간에 조용해지는 것을 느꼈다. 팔락이던 종이가 멈추고, 키보드 두들기는 소리가 사그라들었다. 소음이 하나둘씩 꺼져가는 것이 나를 더 옥죄었고 숨 막히게 만들었다. 들려오는 건 통화가 끝나지 않은 몇몇 직원들의 목소리뿐이었다.
내가 유일하게 싫어하는 조용함이었다.
더 이상 대답할 힘도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웃음이 나왔다. 그저 웃음만이 나왔다. 단념과 체념의 것이었다.
과장님이 상황의 심각성을 느끼셨는지 중재에 나섰다.
다행히 집에 갈 수 있었다.
다행히 아니었다.
도대체 뭐가 다행일까. 지금 다행인 것은 하나도 없었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차라리 울면 속 시원할 것 같은데, 야속하게도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예전에는 술을 마시면 그나마 괜찮던데, 이제는 그 방법도 통하지 않는다. 감정은 메마른 지 오래고, 제대로 우는 법을 잊어버렸다.
맴도는 무언가를 어찌하지 못하고, 한숨을 쉬거나 삼키기를 반복했다.
오늘도 잠에 들지 못할 것을 직감했다. 애써 떨쳐보고자 휴대폰을 들여다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시선은 화면을 보고 있었지만, 의식은 섞이고 뒤엉켜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항상 내가 문제였던 것 같다. 이번에는 뭘 잘못한 걸까. 도대체 뭘...
매번 똑같은 레퍼토리다. 슬픔, 질책, 상황분석, 해결책 마련.
마지막으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기. 하던 대로 했으면 될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원망이었다. 다 제쳐두고 그저 원망스럽기만 했다.
'너무하다. 정말 너무해.'
아니, 오히려 잘 되었다. 마음 편히 그리고 아쉬움 없이 떠나갈 수 있겠다. 남아있던 작은 미련마저 싹 다 가져갔다. 이미 10월에 퇴사하기로 마음을 정했기 때문이다. 감정을 추스르고 노트에 휘갈겼던 난잡한 것들을 차분히 정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