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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명 Dec 09. 2015

17 절망과 환멸이 낳은 작품

스페인 마드리드

17

절망과 환멸이 낳은 작품

스페인 마드리드


도대체 이 화가가 느낀 절망과 환멸의 깊이는 어느 정도였을까.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 전시된 그림 ‘자식을 먹어치우는 사투르누스’ 앞에 서자 소름이 돋았다. 사투르누스(그리스 이름은 ‘크로노스’)는 고대 신화 속 시간의 신. 신화는 그가 ‘자식에게 쫓겨나 왕위를 뺏기게 될 것’이란 신탁을 듣고는 자식을 낳는 족족 모조리 먹어치웠다고 설명한다.


시선을 사로잡은 건 사투르누스의 눈이었다. 흥분해서 희번덕거리는 것인지, 건너선 안 될 강을 결국 건너고야 말았다는 격한 슬픔에 광기가 서린 것인지 도저히 분간이 되지 않았다. 이 기괴한 그림을 그린 사람은 다름 아닌 프란시스코 고야. 그가 70대였던 1819~1823년 그린 작품이라고 한다.




프린시스코 고야, ‘자식을 먹어치우는 사투르누스(Saturn Devouring His Son)’ (1819~1823)




고야는 스페인에서 추앙받는 국민 화가다. 프라도 박물관 앞에는 그의 동상이 서 있을 정도다.  심지어 프라도 박물관을 찾은 2014년 12월 초엔 고야의 특별전까지 열리고 있었다. 고야의 동상과, 거대한 고야 특별전 홍보 플래카드를 번갈아 바라봤다. 여기가 프라도 박물관인지, 아니면 고야 박물관인지 헷갈렸다.


그런데 프라도 박물관에 들어가 고야의 작품을 하나둘씩 접하다 보니 정말로 ‘여긴 고야 박물관이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그의 작품은 충격적·인상적이었고, 압도적인 존재감을 자랑했다. 벨라스케스의 작품이 ‘오, 역시 벨라스케스…’ 이런 평범한 감탄을 이끌어 냈다면 고야의 작품은 ‘으! 무슨 이런 인간이 다 있지?’ 싶은 느낌이 들게 했다.




프라도 박물관의 모습


박물관 앞의 고야 동상




고야는 1746년 스페인 동북부 지방의 한 시골 마을에서 도금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4세 때부터 미술 공부에 정진하며 출세를 꿈꿨다. 그리고 28세였던 1774년 말, 드디어 왕립 태피스트리 공장의 부름을 받고 이듬해 초 마드리드에 입성했다. 마드리드에서 고야가 처음 한 일은 태피스트리의 밑그림을 그리는 일이었다. 태피스트리란 색실을 짜 넣어 그림을 표현하는 직물 공예를 뜻한다. 당시 궁(宮)에선 실내에 이 태피스트리를 걸었다. 돌로 된 궁에서 발생하는 추위와 습기를 방지하고, 더불어 활기찬 기운을 주기 위해서다. 태피스트리의 용도 때문이었을까. 당시 고야가 그렸던 태피스트리의 밑그림은 대부분 밝은 느낌이다. 1777년 그린 ‘파라솔’이란 제목의 그림을 보면 ‘자식을 먹어치우는 사투르누스’를 그린 그 화가의 그림이 맞나 싶을 정도다.




프란시스코 고야, ‘파라솔(The Parasol)’ (1777). 이후 ‘자식을 먹어치우는 사투르누스’를 그리게 되기까지 고야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마드리드에서 고야는 승승장구했다. 1780년 왕립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됐고, 1789년엔 궁정화가가 됐다. 고야의 명성은 점점 높아졌다. 궁정화가로 왕족의 초상화를 그리는 동시에 주요 성당의 벽화도 책임졌고, 기존의 태피스트리 밑그림 작업도 이어갔다. 성공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 찬 출세주의자의 삶은 이처럼 바빴다. 오랜 기간 격무에 시달리던 그는 1793년에야 휴가를 얻어 안달루시아 지방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의 나이 47세의 일이었다.


이 여행에서 고야는 삶을 뒤흔드는 파국과 조우한다. 여행 도중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청력을 상실해 귀머거리가 된 것이다. 이후 그의 작품 세계는 급변한다. 인간의 내면과 잠재의식에 대한 표현으로 나아갔다. 고야의 우울한 후반생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의 후반생을 직조해 나간 씨줄이 청력 소실이었다면 날줄은 혼란스러운 시대 상황이었다. 고야가 귀머거리가 된 1700년대 말 유럽은 들끓고 있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점화됐고 주변 국가들은 혁명의 파고가 국경을 넘어올까 전전긍긍했다. 당시 고야가 살던 스페인은 고압적이고 무자비한 종교·정치권력이 다스리는 야만적 사회로 악명이 높았다. 하지만 스페인에도 이성의 힘으로 미신과 인습을 타파하고 몰아낼 수 있을 것이라 믿는 계몽주의자들이 있었다. 고야도 그런 이들 중 하나였다. 이들이 루소와 볼테르의 나라, 프랑스에 호감을 가진 건 당연했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 이후 스페인으로 건너온 건 혁명의 정신이 아니라 나폴레옹의 군대였다. 1808년 프랑스가 스페인을 침공한 후 고야는 인간의 잔혹성과 광기를 목도한다. 죽고 죽이는 살육의 현장에서 이성은 도대체 어디에 있었을까. 전쟁은 5년간 이어지다가 1813년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 패하면서 겨우 끝이 났다. 이후 스페인은 주권을 되찾는 데 성공하지만 역사의 수레바퀴는 거꾸로 돌아 왕정이 복고된다. 1814년 왕좌로 돌아온 페르디난드 7세는 철저한 전제군주제의 정착을 꿈꾸며 의회를 해산해버린다. 고야를 비롯한 계몽주의자들이 타파하고 몰아내야 했던 괴물은 다른 무언가가 아닌 ‘인간’, 그 자체는 아니었을까.


1819년, 70대가 된 고야는 마드리드 교외에 ‘귀머거리 집’이라고 불리던 2층짜리 시골집 하나를 구입한다. 원래 주인이 귀머거리였던 집이다. 고야는 1823년까지 이 집의 1층과 2층 벽 전체에 14점의 대형 벽화를 그린다. 이 그림들은 어둡고 기괴한 모습 때문에 일명 ‘블랙 페인팅’, 즉 ‘검은 그림’이라고 불린다. ‘자식을 먹어치우는 사투르누스’도 ‘검은 그림’ 중 하나다.


‘옷 벗은 마하’와 ‘옷 입은 마하’는 그림치고는 너무 관능적이어서, ‘1808년 5월 2일, 마드리드’와 ‘1808년 5월 3일, 마드리드’는 비극적 사건의 찰나를 강렬하게 포착해서 탄성이 나왔다. 그러나 ‘검은 그림’을 마주하고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림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옮기지 않도록 한다. ‘검은 그림’은 그림 그 자체로 깊은 절망과 환멸을 진하게 전하고 있었다.


이탈리아를 떠나 마드리드에 도착한 건 해가 완전히 저문 지 한참 된 늦은 저녁이었다. 숙소 체크인을 하는데 “올라(Hola)!” 호스텔 직원의 환영이 격했다. 숙소에 짐을 풀고 나와 마요르 광장과 솔 광장 등을 둘러봤다. 곳곳마다 흥겨움이 넘실댔다. 광장은 연말을 맞아 화려한 불빛과 인파로 가득했다. 거리 곳곳의 불 밝힌 술집도 사람들로 빼곡했다. 솔 광장을 지나가는데 사람들을 모아놓고 우스꽝스러운 행동으로 돈벌이를 하고 있던 광대가 날 잡았다. 아시아인이 지나가기만을 노렸던 모양이다. 다짜고짜 가방을 뺏더니 태권도도 가라데도 우슈도 아닌 국적불명의 무술 자세를 취하며 대결을 청한다. 이어 ‘에너르기파’까지 쏜 광대는 가까이 다가와 이번엔 ‘강남스타일’의 말춤을 같이 추자고 권한다. 지켜보던 마드리드 시민들은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를 앞둔 마요르 광장의 모습




식민지 조국의 시인 임화는 시 ‘자고 새면’에서 “자고 새면/이변을 꿈꾸면서/나는 어느 날이나/무사하기를 바랐다”라고 썼다. 소설가 김훈은 이를 인용하며 세설집 ‘바다의 기별’에서 “행복에 대한 추억은 별것 없다. 다만 나날들이 무사하기를 빌었다. 무사한 날들이 쌓여서 행복이 되든지 불행이 되든지, 그저 하루하루가 별 탈 없기를 바랐다. 순하게 세월이 흘러서 또 그렇게 순하게 세월이 끝나기를 바랐다”라고 썼다. 평화롭고 마드리드 시내를 거닐며 고야의 ‘검은 그림’과 안쓰러운 운명을 생각하다가, 문득 저 두 문학가의 글이 떠올랐다. 암스테르담에서 마주쳤던 고흐와 안네의 흔적도 갑자기 환영처럼 떠올랐다. 내가 살고 싶은 삶은 무엇일까. 위대한 작품인 고야의 ‘검은 그림’은 떠올리는 것만으로 여전히 전율이 일었는데, 마드리드 시민들의 웃음소리는 무사히 흩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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