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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명 Dec 08. 2015

16 성(聖) 크리스토퍼를 만나다

스페인 톨레도

16

성(聖) 크리스토퍼를 만나다

스페인 톨레도


햇살을 받은 톨레도의 건물은 하나같이 짙은 주홍빛을 내뿜었다. 건물과 땅의 색 구분이 모호했다. 벽과 지붕의 색은 흙의 색을 닮아 있었다. 지금껏 여행하며 보지 못한 색의 도시였다. 도시의 색에선 톨레도가 변치 않고 버텨온 유구한 세월이 느껴졌다. 톨레도는 1986년 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무엇 하나 함부로 바꿀 수 없는 도시란 소리다. 앞으로도 마치 중세와 같은 지금의 모습을 유지할 것이라 생각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톨레도는 스페인 역사에서 오랫동안 중심이었던 도시다. 6세기부터 16세기까지 약 1000년에 걸쳐 지배세력이 세 번 바뀌는 동안 줄곧 스페인의 정치적·문화적 중심지였다. 톨레도가 각광받았던 까닭은 뭘까. 간단하다. 도시가 강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도시의 이름마저 ‘요새’다. ‘톨레도’란 이름은 이곳을 정복했던 로마인들이 붙인 라틴어 이름 ‘톨레툼(Toletum)’에서 유래하는데 이는 다름 아닌 ‘요새’란 의미라고 한다. 이 이름과 관련된 설 또한 흥미롭다. 톨레도를 공략하며 하도 애를 먹은 로마인들이 ‘항복하지 않고 참고 견디는 인내가 대단하다’고 하여 이런 이름을 붙였다는 것. ‘Toletum’ 앞의 ‘tole-’를 보면 영어 단어 ‘tolerate(참다, 견디다)’가 떠오른다.


톨레도가 본격적으로 도시의 모습을 갖춘 건 기원전 2세기 로마에 정복당해 주도(州都)가 된 이후부터다. 그 후 6세기부터는 서고트 왕국의 수도가 됐다가, 8세기부터는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한 이슬람 세력(무어인)의 영토로 편입돼 근거지로 활용됐다. 이슬람 세력의 톨레도 지배는 약 400년간 이어지다가 11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끝이 난다. 이후 다시 수복된 톨레도는 카스티야 왕국의 수도가 돼 발전을 거듭하다 1561년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가 수도를 마드리드로 옮기면서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지배세력이 여러 번 바뀌는 동안 톨레도에선 이슬람교, 유대교, 기독교가 공존하고 융합했다. 톨레도로 들어서는 관문인 산 마르틴 다리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다리 한쪽 끝에 위치한 문이 평범한 아치 모양이 아니라 양 끝 가운데 부분이 움푹 들어간 아치 모양을 하고 있거나, 성벽 위의 요철(凹凸)에 삼각형 모양의 돌이 놓여 있는 모습 등이 바로 이슬람 건축의 영향이라고 가이드는 설명했다. ‘로마인이 건설하고, 이슬람인이 개축했으며, 후손이 지켜낸 다리.’ 산 마르틴 다리에 대한 가이드의 짧은 평이다.




산 마르틴 다리의 모습. 두 번째 사진의 문을 보면 평범한 아치 모양이 아닌 양 끝 가운데 부분이 움푹 들어간 아치 모양을 하고 있다. 성벽 위의 요철(凹凸)에도 삼각형 모양의 돌이 놓여 있어 흔히 보던 성벽과는 다른 형태를 띠고 있다. 이는 전부 이슬람 건축의 영향이라고 한다.




수도 역할을 끝내고 16세기 이후 일개 지방도시가 된 톨레도는 오히려 그 덕분에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했다. 구불구불 도시를 관통하는 비좁은 골목길, 그 골목길에 깔린 자갈들, 때가 껴 하나같이 얼룩진 건물들은 낡아서 오히려 빛나는 매력을 분출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곳은 오래전부터 철광석이 많이 나는 칼과 검의 도시. 곳곳에서 칼과 검을 팔고 있는 모습은 중세의 풍경을 완성하는 화룡점정이다. 영화 ‘반지의 제왕’ 등에 소품으로 사용된 칼과 검도 대부분 이곳에서 납품했다고 한다.




톨레도 골목골목마다 칼과 검을 파는 가게가 널려 있다. 영화에서 보던 바로 그 칼과 검이다.




중세의 모습에 이슬람의 흔적까지 더해져 흥미로운 골목을 헤매다 톨레도 대성당을 만났다. 꺾어지는 골목으로 들어서자마자 떡 하니 모습을 드러내는 게 과연 톨레도의 대성당다운 등장이었다. 스페인에서 가장 큰 성당은 세비야 대성당이지만 스페인 가톨릭의 총본산이자 수석 성당은 바로 이곳 톨레도 대성당이라고 한다. 이곳에도 서로 다른 문화가 섞여있다. 이슬람 세력이 지배하던 시절 모스크였던 건물을 개조해 만들었기 때문이다.




톨레도 대성당은 가까이 다가서면 카메라에 전체 모습을 담기가 힘들 정도로 크다.


서로 다른 문화가 섞인 대성당이기 때문일까. 내부의 성모자상(聖母子像)에마저 왠지 동양의 느낌이 섞인 듯하다. 성모의 미소가 마치 부처의 그것과 비슷해 보인다.




대성당에서 눈길을 가장 강렬하게 사로잡은 것은 성당 한쪽 벽을 위·아래로 꽉 채우고 있는 성(聖) 크리스토퍼의 그림이었다. 저 거대한 그림은 대체 뭘까 싶었는데, 알고 보니 무교(無敎)인 내겐 흥미로운 이야기가 숨어 있었다. 가이드로부터 크리스토퍼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난 후 한참동안 그림을 들여다봤다.


크리스토퍼는 외경(外經‧성경 편집 과정에서 제외된 문서들)에 나오는 성인이다. 전설에 따르면 힘센 거인이었던 그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를 만나면 주인으로 섬기겠다고 결심했다. 처음엔 왕을 찾아갔으나 왕은 악마를 겁냈고, 이에 악마를 찾아갔으나 악마는 예수를 겁냈다. 결국 거인은 예수가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라고 판단, 예수를 찾아 섬기기로 했다.


예수가 있는 곳을 찾아다니던 거인은 수심이 깊고 물살이 거센 강 앞에서 한 수도자를 만났다. 수도자는 거인에게 “가난하고 곤경에 처한 사람을 섬기는 일이 곧 예수를 섬기는 것”이라며 “강가에 머물며 가난한 여행자가 강을 건널 수 있도록 돕거라”라고 말했다. 이에 거인은 수도자의 말대로 강가에서 돈이 없어 배를 타고 가지 못하는 여행자를 자기 어깨에 짊어지고 강을 건너는 일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거인은 한 어린아이를 어깨에 짊어지고 강을 건너게 됐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작은 아이가 점점 무거워지더니 급기야 강을 건너기 힘들 지경에 이르렀다. 마치 전 세계를 짊어진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거인은 지팡이에 의지해 안간힘을 쓰며 겨우 강을 건넜다.


간신히 뭍에 도착한 순간 어린아이가 입을 열었다. “너는 지금 전 세계를 옮기고 있는 것이다. 나는 네가 그토록 찾던 왕, 예수 그리스도다.” 어린아이의 말이 끝나자 거인의 지팡이가 땅에 뿌리를 내리고 푸른 잎을 피우며 종려나무가 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그때부터 거인은 그리스어로 ‘그리스도를 업고 가는 사람’을 뜻하는 ‘크리스토포로스’라고 불리게 됐다. 크리스토퍼는 예수를 모시고 강을 건넜기 때문에 주로 여행자의 수호성인으로 여겨지며, 그 외에도 운전자나 육체노동자의 수호성인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여행 도중 크리스토퍼를 알게 되고, ‘지팡이를 짚은 채 어린아이를 어깨에 짊어지거나 가슴에 안고 강을 건너는 모습’으로 상징되는 그의 모습을 처음 접한 나는 그의 그림이 매우 흥미로웠다. 그림이 저리도 큰 것은 전설 속 크리스토퍼가 거인이기 때문인가… 라는 궁금증이 들기도 했다. 이날 받은 인상이 커서였을까. 이후 세비야 대성당에서도 크리스토퍼를 만났고, 바르셀로나에서 묵은 호스텔인 ‘St Christopher’s Inns’에서도 혼자서 엄청 반가워했다.




톨레도 대성당 내에 그려진 크리스토퍼. 지팡이를 짚은 채 아기예수를 어깨에 짊어지고 강을 건너고 있다.


세비야 대성당에서 발견한 크리스토퍼. 이 그림의 크기도 톨레도 대성당의 그것처럼 매우 크다. 재미있게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묘 바로 옆에 그려져 있다. 신대륙으로 여행을 떠났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운명도 어쩌면 이름이 예고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유럽여행을 오기 전, 계획을 짜면서 듣도 보도 못했던 도시가 몇 있었다. 런던, 파리, 로마 등 익숙한 도시와 달리 제반지식이 전무한 도시 말이다. 당연히 톨레도도 그 중 하나였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마드리드에서 편리하게 다녀올 수 있는 도시로 세고비아와 톨레도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임의로 한 도시를 정했을 뿐이다. 그런데 톨레도에 와 이처럼 많은 이야기를 접할 줄이야. 톨레도를 떠나기 전 높은 곳에 올라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준 오래된 도시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도시의 풍경은 처음과는 전혀 다르게 보였다. 알게 되면 다르게 보인다. 살면서 모른다는 이유로 무심코 지나쳤던 것들은 도대체 얼마나 많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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