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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명 Dec 07. 2015

15 버려진 돌마다 풀이 돋았다

이탈리아 폼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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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돌마다 풀이 돋았다

이탈리아 폼페이


하늘에 낀 먹구름 때문에 햇빛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굵은 빗줄기가 버스 창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요란했다. 로마에서 폼페이로 출발하던 날, 날씨가 좋지 않았다. 이탈리아는 겨울이 우기(雨期)다. 폼페이를 제대로 볼 수 있을까. 걱정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다행히 이날 폼페이의 하늘은 로마의 그것과 달리 맑고 높았다.


내 생일은 1987년 8월 24일, 여름이다. 한국은 여름이 우기지만 이탈리아는 오히려 비를 구경하기 힘든 건기(乾期)다. 아마 내가 태어났던 날 이탈리아의 날씨는 대체로 좋았을 테다. 또 내 생일로부터 정확히 1908년 전인 서기 79년 8월 24일 폼페이의 하늘도 아마 청명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날 오후 1시쯤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면서 폼페이의 하늘엔 묵시록(黙示錄)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폼페이에서. 뒤편 저 멀리 베수비오 화산의 모습이 보인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베수비오 화산 폭발은 두 단계에 걸쳐 일어났다. 먼저 폭발이다. 원자폭탄 강도의 폭발이 몇 초마다 일어났다. 이 때문에 화산의 중심에선 높이가 약 30km에 달하는 거대한 불기둥이 형성됐고, 불기둥에선 작은 조약돌 모양의 화산재가 비처럼 쏟아졌다. 두 번째 단계는 불기둥이 무너지면서 몰아친 화쇄암(火碎巖) 폭풍이다. 엄청나게 뜨거운 화쇄암 폭풍은 산을 타고 내려와 시속 160km의 속도로 사방을 향해 흩어졌다. 이는 일반적인 허리케인의 속도와 맞먹는 수준. 바로 이 두 번째 단계에서 모든 사람이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이 갑작스런 사태는 다음날인 8월 25일 아침에야 끝났다. 불과 하룻밤 사이 폼페이는 두께 4m의 화산재 아래에 묻혀 봉인됐다. 이후 잊혔던 도시는 약 300년 전 우물을 파던 한 농부가 우연히 발견하면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후 폼페이 발굴을 이끈 로마대 주세페 피오렐리 교수는 한 가지 의문에 사로잡힌다. 도시가 그대로 화산재에 묻혔는데, 몇 구의 화석 외엔 사람의 흔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대신 용암과 화산재가 식어 굳은 발굴현장의 흙더미 사이에서 이상한 형태의 빈 공간이 여럿 발견됐다. 주세페 피오렐리 교수는 이 의문의 공간에 주목해 석고를 부었다. 석고가 굳은 후 주변의 흙을 긁어내자 놀랍게도 사람의 형태가 나타났다. 다름 아닌 폼페이 최후의 날 죽어간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사연은 이랬다. 베수비오 화산 폭발 당시 발생한 화산재는 희생자들의 피부를 완전히 덮었다. 이후 시간이 흐름에 따라 화산재는 굳게 돼 고유의 형태를 갖게 됐다. 반면 화산재 내부의 육체는 완전히 썩어 빈 공간이 생기게 된 것이다.


폼페이엔 이렇게 만들어진 석고상이 여러 점 남아 있었다. 입과 코를 막은 채 웅크리고 앉아 있다가 최후를 맞이한 사람, 임신한 듯 배가 불룩 나와서는 바닥에 엎드린 채 삶을 마감한 여인, 몸부림치다가 그대로 굳어버린 개, 손을 붙잡고 엎드린 채 영원히 박제된 연인…. 이렇게 발견된 죽음의 흔적이 지금까지 2000여 개에 달한다고 한다. 그들은 생전에 이런 갑작스런 죽음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새삼 ‘죽음은 참으로 도처에 널려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폼페이에 남아있는 석고상들. 폼페이 최후의 날의 비극을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소설가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왜군의 침략에 쑥대밭이 된 조선 남해(南海)의 비극성은 도도히 피어난 꽃과 대조를 이루며 극에 달한다. 이날 눈앞에 펼쳐진 폼페이의 모습도 그랬다. 화산재엔 식물이 성장하는 데 필요한 성분이 다량 포함돼 있어 폼페이 구석구석마다 풀이 돋아나는 점이 골칫거리라고 가이드는 설명했다. 가이드의 말대로 폼페이에선 버려진 돌마다 풀이 돋아나고 있었다.



버려진 돌마다 풀이 돋았다. 폼페이는 그래서 덧없음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인간 생명과 문명의 모습이 이렇구나. 부서지고 무너진 돌과 푸른 풀을 번갈아 들여다보며 인간 생명과 문명의 덧없음에 대해 생각했다. 버려진 도시는 고대 로마 문명의 찬란함이나 최후의 날의 끔찍함보다는, 덧없음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했다. 그 이야기가 전하는 슬픔 속에서, 덧없는 한 명의 인간으로 살아가는 동안 해야만 할 일이 무엇인지 떠올려 봤지만… 폼페이의 푸른 풀과 맑은 하늘은 아무 대답 없이 평화롭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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