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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을 잠시 중단하는 ‘에포케’ 시간

다름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by 엄재균

설이나 추석이 끝나고 나면 이혼이 급증했다는 뉴스를 듣는다.


최근 코로나 사태로 부부가 함께 24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중국에서는 이혼율이 증가한다는 소식이 전해온다. 부부가 같이 있는 것이 당연한데 왜 오래 같이 있으면 갈등이 심하고 이혼까지 할까?

명절이나 코로나 때문에 이혼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잠재된 갈등이 특별한 상황에서 한꺼번에 폭발되기 때문이다.


재택근무를 하는 부부들이 가사와 육아, 회사 일을 한 공간에서 함께 처리하려니 스트레스로 인해 평소에 쌓인 갈등이 증폭된다. 갈등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에 가장 큰 이유는 ‘마음 씀씀이와 대화’에서 오는 문제가 많다. 대화가 서툴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갈등이 허다하다.


“우리 부부는 도대체 대화가 안돼요”라고 호소하는 부부가 많다.


나 역시 아내가 하는 말에 건성으로 듣고 혼나는 경우가 많다. 어느 저녁 아내가 내 속옷과 수건을 건조기에서 빼내어 그것을 개기 위해 거실에 가져왔다. “내가 대신해 줄까요”라고 했다가 한 소리 들었다. 아내는 세월이 흐르면서 목소리가 커진다.


평소에 내가 가끔 아니 아주 가끔 가사 일을 도와주고는 생색을 내려고 하면 바로 “이건 대신 해주는 것이 아니고 그냥 함께 하는 것”이라고 대못을 확 박는다. 맞는 말이다. 내가 후배에게 자주 조언하는 얘기인데 나는 정작 그렇게 하지 못한다.


후배가 하루는 아내와의 갈등을 나에게 토로하다가 “이혼을 해야 하나”하고 심각하게 고민을 털어놓는다. 휴일 날, 오랜만에 날씨도 나빠서 골프 약속도 취소되어 집에 쉬다가 설거지를 도와주었다고 한다. 그 후 시간이 흘러 다른 일로 말씨름을 하다가 “설거지도 도와주었는데”하고 생색을 내는 순간 아내의 눈빛이 달라졌다고 한다. 자기는 아내가 왜 그렇게 화를 내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내가 훈수를 두었다.


아내에게 도와주고는 절대 생색내지 말라고. 아예 도와준다는 생각일랑 말고 그냥 ‘내가 함께 하고 싶어서 한다’라고 생각하라고 구체적인 조언까지 했다.

그런데 막상 내가 가끔 ‘삑사리’를 낸다.


평소 아내의 말에 자꾸 판단을 하려고 한다.

아내는 집안 정리를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성격이다. 하루는 퇴근해서 집에 오니 아내가 베란다 청소를 하고 화분을 정리하고는 힘들다고 한다. 그러면 나는 “무리하게 하고 힘들다고 하지 말고 중간에 쉬엄쉬엄 하던지 아니면 내일 해도 되지 않나 “ 하고 충고부터 하고 해결책을 찾으려고 한다. 아내가 뭔가를 얘기하면 ‘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지?’라는 생각이 먼저 들고 고민한다.

정신과 의사인 정혜신은 ”충고, 조언, 평가, 판단“을 하지 않음으로써 공감을 시작할 수 있다고 한다. 맞다.


항상 공감하기보다는 아내 의견에 대해 그것을 문제로 바라보고 그 문제를 분석하고 해법을 찾아

조언과 충고를 하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마 아내는 공감을 더 원했을지도 모른다. 얼마나 힘들었냐고. “베란다를 정리하니 화분의 꽃이 너무 예쁘다고”. 그냥 “수고했어요” 하면 될 일을. 그 아내의 형편을 내가 마음속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공감이 간다. 이해가 되어야 공감할 수 있다.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서 공감하려고 노력하면 오히려 스트레스로 온다. 그것도 입으로만 하면 안 된다. 베란다에 흘린 흙이라도 치우는 행동이 따라야 한다.


‘왜 꼭 저렇게 하지?’가 감정적으로 먼저 다가온다.

그러면 입장을 바꾸어 한번 생각하면 대부분 이해가 된다. 이해가 되면 ‘저렇게 할 수도 있겠다’라는 공감이 따라온다. 실제로 나도 일을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끝까지 마무리를 하고 싶은 마음에 무리를 하게 될 때가 있다. 그 상황을 나에게 대입하면 공감할 수 있다.


‘나도 그랬으니까 ‘라고.


“인간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약점과 오류로 가득찬 존재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어리석음을 서로서로 용서하자. 이것이 첫 번째 자연법칙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볼테르가 <철학사전>에서 한 말이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프린스턴 대학의 심리학자 대니얼 카네먼 교수는 <생각에 관한 생각>에서 인간은 직관적이고 감성적인 판단을 하는 '경험 자아'와 이성적 판단을 하는 '기억 자아' 두 개의 시스템으로 인식한다고 주장하였다. 첫 번째 인식 시스템은 감성적인 판단이다. 감성은 당연히 편견과 당시의 감정에 치우치기 쉽다. 감정이 지배하는 판단이기 때문에 오류가 많다.


인간이 편향적이고 오류 투성이의 인식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카네먼 교수가 주장하는 두 번째 시스템이 이성적 판단이다. 이 시스템 또한 자신의 판단에 대해 왜곡하고 합리화를 하는 경향이 높다. 결국 인간은 그다지 합리적인 판단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새삼 증명한 학자이다. 볼테르의 "인간은 약점과 오류를 지닌 존재"라는 주장을 심리 실험으로 증명하였다.


오래전 아내가 어깨 수술을 받은 후 재활운동을 받으면서 체력이 많이 떨어졌다. 재활운동이 끝나는 즈음 체력을 회복하기 위해 가까운 산에 가자고 하여 함께 올랐다. 동네 산이기는 하지만 처음 올라가는 비탈길은 상당히 가파르다. 산 중턱 즈음 올라가면서 아내가 힘들어해서 얼굴을 보니 안색이 좋지 않았다. 아내가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자기는 먼저 내려가겠다고 한다. 할 수 없이 함께 내려오면서 생각했다. 동네 산행이지만 처음부터 가파른 깔딱 고개가 서너 개가 있다는 사실을 잊고 내 위주로 판단하였다. 그동안 ‘떨어진 체력을 보강하는 데는 등산만 한 것이 없다는 것’은 나만의 생각이었다.

아내의 현재 몸 상태는 살펴보지도 않고는.


그 후로 아내는 다시는 산행을 하지 않는다.


함께 산책을 할 때도 나와 아내는 같이 걷다가 나는 산으로 아내는 호수로 걸어간다. 그리고는 호숫가 카페에서 만나 커피를 마시곤 한다. 아내는 평지를 빠른 속도로 걸으면서 즐기고 나는 약간은 가파른 산행에서 걷기의 즐거움을 느낀다. 서로 다르다.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을 함께 하면서 서로 터득한 노하우이다.


지난 국회의원 선거가 있기 전에 고교 동창의 단톡 방에서 자칭 ‘태극기 일원’이라는 친구가 일간지에 실린 선거와 관련된 정치적인 기사를 올린다. 누군가 댓글을 달았다. "정치적인 의견은 생각이 서로 다를 수 있고 갈등의 소지가 있기 때문에 올리지 말라"는 댓글이었다. 친구의 글이 옳고 그름을 떠나 남이 싫어하는 행동은 하지 않는 것이 상식이다. 단지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도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도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여 쓴 글도 아니다. 신문사 칼럼이나 유튜브 방송을 계속 올렸다.


처음에는 '이 친구가 왜 이럴까' 짜증이 났다.

지금 우리는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오히려 한쪽으로 편향되지 않고 균형을 잡기 위한 개인적인 노력이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 '정치적으로 혹은 다른 이유로 생각이 편향되지는 않았을까' 생각하면서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해하려는 노력 그 자체가 스트레스이고 나에게 좋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그냥 인정하기로 했다. ‘지금 이 친구가 무언가 힘들구나. 그 상황을 이렇게 표현하는구나’라고 생각하면 내 마음의 불편함이 사라진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에서 자신의 편향된 정치적인 신념을 강요하는 것은 성숙되지 못한 행동이다. 민주사회의 시민으로 산다는 것이 교양을 가진 품위 있는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의미와 동일하다. 교양을 가진 삶이란 어떤 것인지는 사실 초등학교 도덕 시간에 다 배웠다. 아니 “내가 정말 알아야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머리로는 알지만 가슴으로 내려오기까지는 세월이 많이 걸린다.


왜 이런 사소한 갈등이 생길까?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이다.

우주의 중심은 나이다. 어떻게 변화할 수 있을까?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삶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 책 읽기다. 특히 소설을 통해 인간의 다양한 삶 속에 잠깐이나마 들어가서 주인공과 함께 공감할 수 있다. 박완서의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읽으면서 소설로 쓴 작가의 일생을 함께 체험할 수 있다. 작가의 삶의 방식에 대한 이해가 나와 같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리고 공감했다.

글을 쓰면서 자기중심의 사고를 변화시킬 수 있다.


산책하면서 사색하고, 자신을 성찰하면서 여러 시선에서 사건과 인간을 바라볼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누구와 갈등이 있는 날은 꼭 나의 감정을 글로 쓴다. 글로 표현하면 내 감정을 객관화할 수 있어 냉정하게 그 갈등을 볼 수 있다. 불편했던 마음이 가라앉는다. 시간이 지나고 다시 읽으면 느낌이 다르다. ‘내가 이렇게 쪼잔한 생각을 했던가 ‘ 하고.

나의 부족함을 새삼 느낀다.


상대방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아주 간단한 사실을 우리는 자꾸 잊어버린다. 가정에서 부모 자식 관계가 똑같다. 서로 인격을 존중하고 지켜 봐 주면 된다. 가능한 칭찬하고 비판과 비난은 사양해야 한다.


아니 사실 다 필요 없다. 부부가 행복하면 자녀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딸 바보, 아들바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부부 바보 관계다. 부부가 행복한 모습을 보이면 아이들도 자연히 그 모습을 따라간다. 아이를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에 대해 부부가 갈등하여 싸우는 모습을 보이고 나면 어떤 양육 방책도 아이에게 소용이 없다.


사랑은 관심이다.

속으로 생각만 하면 아무도 알지 못한다.

오늘은 아내가 오랜만에 머리를 손질하고 왔다.

“파마가 잘 나왔는데, 멋지네요?”

어색하지만 표현을 자주 하면 익숙해진다.


다음은 황성희 시인의 "부부"라는 시다.


낱말을 설명해 맞추는 TV 노인 프로그램에서

천생연분을 설명해야 하는 할아버지

“여보 우리 같은 사이를 뭐라고 하지?”

“웬수”

당황한 할아버지 손가락 넷을 펴 보이며

“아니 네 글자”

“평생 웬수”


어머니의 눈망울 속 가랑잎이 떨어져 내린다

충돌과 충돌의 포연 속에서

본능과 본능의 골짜구니 사이에서

힘겹게 꾸려온 나날의 시간들이

36.5 말의 체온 속에서

사무치게 그리운

평생의 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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