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귀와 공감하는 마음
한 국회의원이 MBC <100분 토론>에 나왔다.
최근의 부동산 대책을 주제로 상대 패널과 열띤 토론을 하였다. 정부의 부동산 대책을 옹호하던 의원이 공식 회의가 끝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마이크가 켜진 줄 모르고 출연자와 대화를 이어갔다. 상대방이 “집값이 떨어지면 국가경제에 부담이 되기 때문에..”라는 말이 떨어지자 말자 “그렇게 해도 부동산 가격은 안 떨어질 겁니다.”라는 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생생히 들렸다. 100분 동안 본인이 주장한 내용을 10초 만에 뒤집는 일이 벌어졌다.
평소의 본심이 드러난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를 돌이켜본다.
얼마 전 일이다. 국가기술표준인 KS를 심의하는 회의를 화상으로 했다. 요즘 코로나 사태로 인해 모든 회의는 화상으로 한다. 해당 전문위원회의 위원장을 맡고 있어 회의를 진행하였다.
정부에서는 Zoom 플랫폼 보안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는지 ‘온나라 PC영상회의’ 플랫폼을 사용한다. 이 화상회의는 본인이 얘기할 때마다 ‘메아리’가 발생하는 문제가 있었다. 현재 가장 많이 사용하는 Zoom은 ‘하울링’으로 인해 가끔 회의 진행에 방해가 되지만 ‘온나라’는 ‘에코 현상’으로 신경이 많이 쓰였다.
의제는 물류센터에서 사용하는 산업용 랙 선반에 관한 표준이 시험방법에 문제가 있어 민원이 들어온 건이다. 표준에서 요구하는 시험을 시험실에서 할 수 없기 때문에 대안을 찾는 회의다. 회의 중에 갑자기 한 위원이 발언을 요청하여 발언을 하도록 하였다. 지금까지 논의한 내용을 잘 듣지 않았는지 의제와 관계가 먼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가만히 두면 언제 끝날지 모를 것 같아 중간에 개입하여 발언을 마무리하도록 하였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 위원 덕분에 시간을 많이 소비하고 회의 안건에 대한 논의가 진전이 없었다. 그 순간 ‘아이구 참 네, 시간만 많이 흘렀네~’라고 혼잣말로 하고 한숨을 내뱉었다. 그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들리고 한번 더 '메아리'로 다시 되돌아왔다. 순간 깜짝 놀랐다. 내 마이크가 켜져 있는 줄 모르고 나온 말이다. 해당 위원에게 한 말은 아니지만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
사실 그 순간 나는 그 사람의 의견을 듣지 않고 이미 ‘판단’을 하였다.
그 판단에는 평소 그 사람에 대한 편견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회의 안건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쓸데없는 발언이라고 판단하였다. 부정적인 '판단'이 더 이상 듣는 것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인내를 요하는 상황일수록 ‘판단’을 중지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아직 나 자신이 훈련이 덜 되어 있다.
사적인 자리에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
친구 부부와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그날따라 부부가 우리 앞에서 계속 말씨름을 한다. 들어보면 별 중요하지도 않은데 서로 자기가 옳다고 우긴다. 누가 잘못했는지 서로 따진다. 내가 볼 때는 아주 사소한 일로 얼굴을 붉힌다. 그 친구는 자기 아내의 얘기를 전혀 듣지 않는다.
남의 얘기가 아니었다.
나 역시 아내가 가끔 "자기 말을 듣지 않고 그냥 흘려보낸다"라고 지적한다.
왜 듣지 않을까?
과거의 경험으로 이미 머릿속에서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듣지 않는다.
이것은 남과의 대화뿐만 아니라 혼자 생각을 할 때도 일어난다. 한번 부정적인 생각과 함께 판단이 앞서 가면서 끊임없이 고구마 줄기처럼 계속 엉켜 나간다. 나중에는 처음에 무슨 생각으로 출발했는지도 모르게 엉뚱하고 부정적인 방향으로 치닫는다. 생각의 고리가 엮이는 초기에 의식적으로 "중지 - Stop"을 속으로 외쳐야 한다.
연구에 의하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약 12,000개에서 50,000개 이상의 생각과 판단 및 평가를 한다고 한다. 우리말에도 '오만 가지 생각이 난다'는 말이 있다. 심리학자 랜디 카멘의 실험에 의하면 대부분의 생각과 평가는 미래에 오지도 않을 걱정으로 가득 찬 부정적인 것이라고 한다. 그것도 끊임없이 반복한다.
부정적인 감정의 사이클이 작동한다.
결국은 자신의 불안과 실수를 내면화하여 오지도 않을 미래를 미리 걱정하고 현재를 놓치면서 살아간다. 또한 타인을 평가함으로써 부정적인 순환 고리에 빠져들게 된다. 타인에 대한 험담은 거의 부정적인 것이 대부분이다. 의식적으로 그 고리를 끊지 않으면 소통할 수가 없다. 가정에서 부부와 부모와 자식 사이, 직장에서는 상사와 동료 간에 소통이 어려운 이유다.
만나고 나면 유독 피곤한 사람이 있다.
왜 그럴까? 소통이 되지 않아서다. 혼자만 일방적으로 얘기하고 상대방의 말을 귀를 기울여 듣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갈등이 갈수록 심각해진다. 청년과 장년, 남자와 여자, 부자와 가난한 자, 지역 간, 이념 차이 등에서 오는 갈등을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 그 갈등을 해소할 정치와 언론 집단이 오히려 더 부추긴다.
인간은 상대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으면 모든 소리는 ‘소음’으로 인식한다. 2009년, 심리학자 로라 쟈 누식의 연구에 의하면 일상의 소통 가운데 약 20퍼센트는 말하고 25퍼센트는 듣는 것이라고 한다. 나머지는 인터넷, 메일링, 전화 등이 있다.
아마 최근에 조사하면 소셜 네트워크(SNS)가 상위에 오르지 않을까. 하지만 SNS는 더 이상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자신의 사생활 노출과 타인에 대한 평가만이 난무하다.
우리가 듣는 시간은 양적으로는 많은데 질적으로는 가장 떨어진다. 우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배운 적이 없다. 귀를 통해 들린다고 다 듣는 것은 아니다. 자연적으로 귀로 들어오는 것은 ‘소음’뿐이다. 관심을 갖고 들으려는 생각이 있고 집중하는 순간 그제야 제대로 들을 수 있고 상호 소통이 된다.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작동하고 상대에 집중함으로써 상호 긍정의 에너지를 교감할 수 있다. 세상의 많은 갈등은 남의 얘기를 듣지 않고 자기 생각만 고집하기 때문이다.
잘 듣기 위해서는 일단 들으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영어를 처음 배우면서 외국 뉴스를 들으면 거의 소음으로 들리는 것과 같이 들으려는 의지가 있어도 훈련이 되지 않으면 상대방의 말이 소음으로 들린다. ‘판단’을 중지하고 듣기 위한 노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소통이 어렵다. 의지와 노력과 훈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소통의 기술’을 몸으로 배운 오래된 기억이 떠오른다.
우연한 기회에 한국파렛트컨테이너협회로부터 국제표준화에 관한 자문을 부탁하는 제안을 받았다. 국제표준화를 다루는 ISO 기구에 물류기술 분야에서 한국을 대표하여 전문가 자격으로 참가하여 국내 기업과 단체의 이익을 대변하는 일이었다.
파렛트와 컨테이너가 무엇이지?
물류 활동에서 지게차를 이용하여 상하역을 하는 데 사용되는 그 파렛트를 말한다. 나 역시 처음에는 그런 협회가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았다.
잠깐 보충 설명을 할 필요가 있다.
물류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용기 중의 하나가 '파렛트와 해상용 컨테이너'이다. 물류는 흐름이 중요하기 때문에 빠르고 정확하고 경제적으로 상품과 원자재를 싣고 필요한 곳으로 물동량이 흘러야 한다. 아마존이나 쿠팡처럼 물류를 성장 동력으로 기업을 성장시킨 사례가 수두룩하다. 이제 물류는 기업 경쟁력의 원천이고 신성장 동력산업이자 국가 기간산업이다.
물류는 인체의 혈액 흐름과 유사하다. 혈액이 중간에 잘 흐르지 않고 막히는 순간 동맥경화가 일어나면서 생명까지 위협받게 된다. 산업에서도 물류의 막힘으로 인해 물동량의 정체가 생기면 소비자와 생산자는 제시간에 상품을 받을 수 없어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된다.
그 흐름을 도와주는 물류용기가 파렛트와 플라스틱 컨테이너이다.
파렛트는 물류와 유통센터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물류기기이다. 대형마트에 채소나 과일을 사러 가면 다양한 형상의 플라스틱 박스를 신선식품 진열대에서도 볼 수 있다. 이 물류용기들도 혈액의 적혈구와 유사한 역할을 한다.
혈액의 주요 성분인 적혈구는 산소를 운반하고 이산화탄소를 제거한다. 적혈구가 산소를 운반하듯이 산업계에서는 파렛트와 플라스틱 컨테이너가 상품을 운반하고 회수하고 반복 사용한다. 그런데 이 파렛트가 국가별로 크기와 형식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수출입시에 포장작업을 다시 해야 하는 등 효율성이 떨어져 물류비용이 추가로 든다.
이런 이유로 국제표준화가 필요한 중요한 물류기기이다. 매년 한 번씩 국제표준화 회의가 열리는데 주로 유럽과 미국에서 개최되며 가끔 한국과 일본에서도 열린다.
2002년, 나는 민간전문가 자격으로 미국 플로리다 올랜도에서 개최된 국제표준화 워킹그룹 회의
에 참석하였다. 미리 관련 문건을 검토하니, 물류기기인 파렛트 표준을 개발하고 그 개발안을 각 국의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서로 의견을 조율하면서 국제표준안을 완성하는 과정이었다.
국가별로 물류산업의 인프라와 사용하는 물류용기의 크기, 성능 및 시험방법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회의 안건별로 기술적으로 서로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되어 국제표준을 개발하는 도중에 난관이 많은 경우가 허다하다. 각국 대표는 자국 물류산업의 이익을 대변하기 때문에 의견을 조정하고 표준 합의안을 도출하기는 쉽지 않다. 일반적으로 회의는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만 6시를 훌쩍 넘기는 경우도 허다하다. 워킹그룹 회의는 안건에 따라 3~4일 연속으로 진행되고 마지막 4~5일째 총회를 한다. 빡빡한 일정이고 치열한 논쟁이 일어날 때도 많다.
일반 학술회의와는 또 다른 분위기다.
총회에서는 그동안 워킹그룹에서 회의한 결과 중에 중요한 의사결정은 투표에 부쳐 통과를 시키고 회의를 마무리한다. 유엔에서 하는 회의 형식과 유사하다.
첫날, 호텔에서 시차 적응을 하지 못해 한밤중에 잠이 깨 꼬박 밤을 새웠다. 아침 일찍 회의장에 가니 미국 버지니아공대 교수인 화이트 박사가 워킹그룹의 의장을 맡아 회의를 준비하고 있었다.
화이트 박사는 외국에서 온 참가자를 위해 가능한 천천히 또박또박 회의를 진행하는 그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일상적인 대화는 다소 빨리 하는 것으로 보아, 영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외국 참가자를 위한 배려였다. 회의 중에 발언을 많이 하지 않는 참가자에게 꼭 질문을 한다. 특히 질문이 거의 없는 한국과 일본 등 아시아에서 온 대표들에게 가끔 묻는다. 결정적인 순간에 핵심적인 질문을 한다. 다들 귀를 쫑긋 세우고 들어야 한다. 회의를 아주 부드럽고 능숙하게 진행한다.
간혹 새로 참여한 국가의 전문가가 전후 맥락을 잘 모르면서 엉뚱한 질문을 하는 경우도 많다. 예전에 합의한 내용에 다시 이의를 달고 질문하여도 의장은 중간에 말을 자르지 않는다. 끝까지 경청하는 모습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 예를 들어, 지금까지 합의한 사항을 원점으로 되돌리고 새로운 제안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의장은 일단 끝까지 듣는다. 공감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한다. 그리고는 차분하게 제안한다. "그 생각을 정리하여 공적인 절차를 밟아 제안하길 바란다."라고 정리한다. 그러면 그 논쟁은 끝이 난다. 새로운 표준화 제안을 하는 것은 상당한 수준의 표준화 능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대화를 할 때는 항상 상대방의 눈을 보면서 심각한 내용을 웃으면서 말한다.
호감을 주는 인상이다.
나중에 사적인 기회에 있어 "그럴 때 어떻게 그 터무니없는 질문을 다 들을 수 있느냐?"라고 물었다. "체코 대표는 그 이야기하려고 먼 체코에서 미국까지 왔다고 생각하면 들어줘야 한다."라고 대답한다.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마음이다. “그러면 피곤하지 않냐고?” 다시 물었다. 자기는 출장을 오면 운동을 하면서 몸 컨디션을 유지한다고 한다. 수영을 좋아한다. 보통 한 시간을 쉬지 않고 한다.
그렇구나. 육체에 힘이 생겨야 정신도 함께 날이 선다.
얼굴 표정이 밝은 수밖에 없다. 한 수 배웠다. 그 날 당장 올랜도 시내에 나가 러닝 팬티를 구입하여 호텔 피트니스 센터의 트레드밀에서 땀을 흘렸다. 그다음 날부터 잠도 잘 오고 시차까지 극복했다. 회의에서 맑은 정신으로 회의 안건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의장은 회의 때나 혹은 회의 밖에서 누군가와 대화할 때 항상 이름을 불러 가면서 얘기한다. 회의를 하다가 갑자기 '재이'라고 부르면서 나에게 질문한다. 상호 토론 과정에도 중간에 꼭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얘기를 한다. 내 이름 '재균'의 앞 글자 '재'를 영어 이름 중에 'Jay'라는 것이 있어 영어 호칭을 그렇게 부른다. 그렇게 이름을 부르면 나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다.
회의 중에 다른 참가자한테도 꼭 이름을 외웠다가 얘기 중에 상대방에게 강조할 부분이 있으면 이름을 부르면서 얘기한다. 회의가 훨씬 부드럽게 진행되고 있음을 느낀다. 나도 처음에는 '닥터 화이트'라는 호칭을 사용하다가, 다음 날부터는 본인이 '마크'라고 부르라고 하여 그냥 이름을 부른다. 훨씬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얘기할 수 있어 좋다.
한 수 이상을 배웠다.
마침 2003년에 연구년을 받아서 '어디로 갈까?'하고 망설이던 차였다. 회의가 끝날 즈음, 화이트 박사에게 나를 버지니아공대에 방문교수로 초청해 줄 수 있는지 물었다. 흔쾌히 수락해 주어 버지니아공대 연구소에 방문교수로 1년간 체류하면서 함께 연구를 이어갔다.
2007년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자신은 대학에서 은퇴하고 컨설팅 회사를 설립하려고 하니 ISO 국제표준화기구의 기술위원회 작업반 의장을 내가 맡았으면 한다고 제안했다. 그 후로 그분으로부터 배운 ‘듣기 훈련’을 바탕으로 지금까지 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아직도 회의 중에 엉뚱한 발언을 길게 하는 사람을 보면 가끔은 속에서 뭔가 ‘훅’ 올라온다.
다만 그것을 관찰할 수 있는 힘은 생긴 것 같다. 다시는 화상회의에서 감정조절이 안되어 ‘삑사리’를 내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아내가 얘기할 때는 귀를 쫑긋 세워 들을 것이다. 그러면 다음 날 밥상이 달라지고, 이것이 습관이 되면 세상이 다르게 보일 것이다.